기절했다 깬 것 같다 - 경남여고 1학년 학생들이 쓴 시
경남여고 1학년 학생들 지음, 구자행 엮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사랑하는 시 38



학교에서는 모두 똑같다

― 기절했다 깬 것 같다

 경남여고 아이들 글

 구자행 엮음

 나라말 펴냄, 2011.8.5.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나들이를 옵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예전에는 혼자 나들이를 왔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갓난쟁이를 업고 왔으며, 아이가 제법 자라 씩씩하게 걷고 뛸 적에는 아이 손을 잡고 왔습니다. 어제는 두 아이를 시골집에 두고 혼자 옵니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여러 책방을 둘러봅니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아이와 함께 읽을 책을 살핍니다. 이 책 저 책 만지작거리다가, 이곳을 찾아온 다른 책손을 스치기도 합니다.


  아이와 함께 책방골목에 온 어머니가 많고, 때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아이 손을 잡고 걷기도 합니다. 일요일이니 아버지를 제법 볼 수 있는데, 여느 날이라면 거의 어머니만 볼 수 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책방골목에서 책마실을 하는 여느 어버이를 문득 가만히 바라봅니다. 내가 고르던 책을 손에 쥔 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우리 시골집에 있는 아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요.



.. 이른 아침 학교로 가는 봉고 / 그 속에는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 아이들이 앉아 있다 ..  (봉고/조연경)



  어린이책을 고르는 사람은 거의 모두 어머니입니다. 아버지 가운데 어린이책을 고르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어느 어머니는 이녁 곁님(아이 아버지)한테 이런 작가 저런 출판사 책이 좋다면서 찬찬히 알려줍니다. 어느 아버지는 이녁 곁님(아이 어머니)더러 마음에 드는 책은 다 골라서 사자고 말합니다. 아이 어머니는 으레 아이와 나란히 서서 책을 찬찬히 넘기면서 살 만한지 안 살 만한지 살핍니다. 아이 아버지는 으레 사진기를 들고 두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이와 함께 책마실을 나온 아버지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서 그림책을 함께 읽거나 아이한테 읽어 줄 분은 얼마나 될까요. 아버지는 집에서 아이와 뛰놀거나 뒹굴기만 할까요, 아니면 아이와 그림놀이도 하고 책놀이도 할까요. 아이를 돌보거나 가르치는 몫은 누가 맡을까요.



.. 옆에서 학생부장 선생님이 서 계신다. / “너 이리 와 봐. 니 치마가 규정에 맞다고 생각하니?” / “키가 커서 맞는 치마가 없어요.” / “우리 학교 교정은 치마가 무릎을 덮어야 한다.” / 하면서 5만 원이나 하는 치마를 또 사라고 한다 ..  (교복/최은영)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여느 아버지는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에 아주 크게 마음을 쏟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느 아버지 가운데 집에 오래 머물면서 아이가 자라는 결을 꾸준히 살피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 마음밭에 씨앗을 심는 아버지가 대단히 드뭅니다. 아이가 읽을 책을 골라서 선물할 줄 아는 아버지는 아주 드물고, 아이가 배울 삶과 사랑과 꿈을 보여주거나 알려주거나 밝히는 아버지는 그지없이 드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한테 꿈을 심어 줄까요? 어머니는 아이한테 사랑을 심어 주나요? 어머니는 아이한테 이야기를 심어 주는가요?



.. 선생님이 와 보라는 신호 / 손이 먼저 머리 위로 올라온다. / “그게 무슨 선생님 앞에서 할 소리야 새끼야.” / 선생님은 이 새끼 저 새끼 욕이란 욕 다 하면서 / 왜 나한테만 난리야 ..  (최악의 체육 시간/양정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머니 가운데 스스로 즐겁게 아침저녁을 짓고, 빨래를 하며, 집일을 건사하는 분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아이를 낳아 보살피는 어머니 가운데 아버지더러 집밖에서만 나돌지 말고 집안에서 함께 사랑을 꽃피우도록 이끄는 분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뱃속에 아기를 열 달 동안 못 품습니다. 꼭 이 때문은 아닐 텐데, 아이를 온몸이나 온마음으로 품는 몸가짐을 못 갖추기 일쑤예요. 그래서, 어머니 자리에 있는 이들이 아버지를 새롭게 일깨우거나 가르치거나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기까지 학교를 다니거나 회사를 다니거나 술동무와 사귀거나 인문책을 조금 읽기는 했을 테지만,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 사랑할 줄 아직 모르는 아버지요 사내입니다. 그러니, 이런 아버지나 사내를 바로 어머니나 가시내가 찬찬히 일깨우거나 가르치거나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 공부하다 앞을 보니 / 조그마한 아이들이 / 누워 있다. / 온몸이 뜨거운 아이 / 온몸이 차가운 아이 / 온몸이 따듯해 보이는 아이 / 그리고 누워 있다가 / 선생님에게 자주 잡히는 아이 / 아, 나도 저기 따뜻해 보이는 아이처럼 /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 누워 있고 싶다 ..  (부러운 분필/문윤경)



  경남여고 푸름이가 쓴 시를 모아서 엮은 《기절했다 깬 것 같다》(나라말,2011)를 읽습니다. 여러모로 푼더분하구나 싶은 이야기가 깃듭니다. 경남 ‘여자 고등학교’ 아닌 ‘남자 고등학교’에서 시를 쓰도록 했다면 이만 한 이야기가 나왔을까 살짝 궁금하기도 합니다.


  남자 고등학생도 이웃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마음결이 없지는 않겠지요. 남자 고등학생도 너른 사랑을 마음자리에 심을 수 있겠지요. 남자 고등학생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꿈을 곱게 여밀 수 있겠지요.



.. 맑다. / 푸르다. / 내 마음과 같았으면 / 좋겠다 ..  (창밖/김지안)



  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입시공부만 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참말 바랍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모든 아이가 제 고장에서 즐겁게 삶을 배워서 제 고장에서 씩씩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고등학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서울로 아이를 올려보내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그저 시골을 떠나 도시에 있는 대학교나 공장이나 회사에 들어가도록 다그치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배워서 사랑하고 꿈꾸도록 이끄는 고등학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아빠는 늘 /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단다. / 내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하면 / “그거 하게? / 그런 걸론 먹고 못 산다. / 니보다 뛰어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 내 꿈을 깔아뭉갠다. /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더니 / 순 거짓말이다 ..  (반어법/임성미)



  푸른 아이들은 무엇을 바랄까요? 삶을 바랍니다. 푸른 아이들은 무엇을 꿈꿀까요? 사랑을 꿈꿉니다.


  이 나라에 40만이나 있다고 하는 교사들은 부디 이 대목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요. 아이들한테 시험공부는 그만 시키기를 바라요. 아이들은 교과서를 배우려고 태어나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삶을 배우려고 태어났어요. 아이들은 등급이나 성적을 받으려고 태어나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꿈을 키우려고 태어났어요.



.. 친구가 배가 고프다 해서 / 우리 집 근처 시장에 갔다. / 나는 배가 불러 / 하나만 시켜 먹으라고 하고 / 아주머니께 한 그릇만 달라고 했다. / 조금 기다리니 / 그릇 두 개가 나왔다. / 어, 한 개만 시켰는데요? / 혼자 먹으면 쓰나! ..  (시장 칼국수/이정은)



  아이들은 앞으로 돈을 잘 버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장사꾼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앞으로 아름다운 어른으로 자라야 합니다. 아이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제 고장에서 즐겁게 사랑을 속삭이면서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어야 즐겁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는 입시지도와 성적지도와 진로지도는 있지만, 삶이나 꿈이나 사랑을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푸름이가 쓴 시를 모은 《기절했다 깬 것 같다》 같은 책은, 힘겨운 아이들이 속풀이를 하도록 돕기는 하지만, 정작 어떤 꿈으로 나아갈 때에 즐겁거나 아름다운가까지 짚거나 이끌거나 돕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두껍고 딱딱하며 메마른 입시지옥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몸으로는 이만큼 하기도 힘들 수 있어요. 부산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 한 곳에서 입시지옥 울타리를 걷어치우거나 없애기는 힘들 수 있어요.


  그러나, 아이들은 바로 오늘 이곳에 있습니다. 입시지옥 울타리가 아무리 높다 한들, 아이들 삶은 바로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도록 돕는 몫은 바로 어버이와 어른한테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모두 똑같습니다. 게다가 집에서까지 모두 똑같습니다. 동네에서마저 모두 똑같습니다. 다 다른 모든 아이들을 다 똑같은 틀에 가두는 사회 얼거리를 그저 팔짱을 낀 채 구경할 수는 없습니다. 이 아이들한테 시 한 줄만 맛보인 뒤 고등학교를 마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내딛으면서 아이들 손을 잡고, 둘레에 있는 다른 어른과 어버이도 눈을 뜰 수 있도록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7.10.2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문학 비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