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삶
양정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80



함께 꾸리는 삶

― 내가 읽은 삶

 양정자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4.6.10.



  아이들이 입는 옷은 작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작은 옷을 입을 뿐, 어른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른 가운데에는 몸집이 큰 사람이 있고 몸집이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몸집이 크대서 큰 사람이 아니고, 몸집이 작대서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몸집이 조그마한 아이들을 씻깁니다. 작은 옷을 벗긴 뒤 작은 몸을 슥슥삭삭 문지르면서 씻깁니다. 아직 아이들은 몸도 손도 발도 조그맣기에, 스스로 제 몸을 씻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몸집이 큰 어른이 아이들을 씻깁니다.


  기운이 센 사람은 기운이 여린 사람보다 짐을 잘 나릅니다. 기운이 세니 짐을 잘 나르거나 더 나르겠지요. 기운이 여린 사람은 짐을 덜 나를 테며, 때로는 아무 짐을 못 나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두 사람은 똑같이 배가 고픕니다. 센 사람이나 여린 사람이나 배고프기는 서로 마찬가지요, 밥을 똑같이 먹어야 합니다. 기운이 센 사람이라서 두 그릇을 먹거나 기운이 여린 사람이라서 반 그릇만 먹어도 되지 않습니다.



.. 할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광활했던 들판. 어두웠던 마음을 알 수 없는 환희로 가득 채워주었던 드높은 하늘, 뭉게구름, 반짝이던 나뭇잎들, 시뻘건 황토밭들, 그 붉은 흙 위에 어른어른 눈부셨던 빛 아지랑이들 ..  (초록빛 들판)



  아이들이 놉니다. 뛰고 달리면서 놀기도 하고, 뒹굴면서 놀기도 합니다. 까르르 노래하면서 놀기도 하고, 장난감을 잔뜩 어지르면서 놀기도 합니다. 놀다가 꽈당 넘어지기도 하고 쿵 부딪히기도 합니다. 놀다가 물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물을 튀기기도 합니다.


  노는 아이들은 저마다 놀고 싶은 대로 놉니다. 한 시간을 놀기도 하고, 두 시간을 놀기도 하며, 서너 시간이나 대여섯 시간을 잇달아 놀기도 합니다. 하루 내내 놀기도 하고, 잠을 잊은 채 놀다가 어느새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얼마만큼 놀아야 즐거울까요. 아마, 놀고 싶은 대로 놀아서 아쉬움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놀아야 즐겁겠지요. 참말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쏟아서 더는 놀 기운이 없어야 비로소 아이들은 놀이를 그칩니다.



.. 점심도 굶고 열심히 그 애를 따라다니는 나를 엄마는 걱정하셨지만, 놀이에 열중했던 우리는 배고픈 줄도 몰랐네. 무언가를 우리는 끊임없이 찾아 먹었으니까. 띠뿌리, 메싹뿌리, 진달래, 찔레순, 아카시아꽃, 버찌, 삘기, 까마중, 산딸기, 머루, 다래, 으름, 알밤, 산고욤, 홍시, 까치밥 ..  (준식이)



  함께 꾸리는 삶입니다. 두 어버이가 함께 꾸리는 삶입니다. 함께 걷는 길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걷는 길입니다. 함께 사랑하는 하루입니다.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아끼는 하루입니다.


  여름에는 해가 떨어지면 비로소 시원하고, 가을에는 해가 떨어지면 서늘하며, 겨울에는 해가 떨어지면 춥습니다. 봄에는 해가 떨어지면 어떤 기운이 될까요. 아무래도 봄이 되어야 이 기운을 알 테지요.


  가을에 익는 나락은 갓 벤 뒤에는 겨까지 함께 먹어도 고소합니다. 아니, 갓 벤 나락은 알맹이와 겨가 모두 맛납니다. 따사로운 볕을 듬뿍 받아들인 냄새와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을나락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벼알일 때에는 이듬해에 볍씨로 씁니다. 사람들은 벼알을 먹을 적에 겨를 빻아서 벗깁니다. 겨를 벗긴 벼알을 심어서 싹을 틔우기는 어렵습니다. 벼알이 싹을 트려면 껍데기인 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씨앗은 껍데기가 있어야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모든 씨앗은 겉씨와 속씨로 이루어진다고 할 만합니다. 둘은 늘 함께 한몸을 이룹니다.



.. 청소시간, 교무실에서, 나는, 너무나 잘난 척하는 부유하고 집안 좋은 아이들이 청소는 전혀 하지 않고, 비단결 같은 희고 통통한 두 손가락 끝으로 무슨 징그러운 벌레나 잡듯이 마지못해 더러운 걸레 한 귀퉁이를 집어 흔드는 것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네 ..  (사춘기 - 청개구리)



  양정자 님이 빚은 시집 《내가 읽은 삶》(실천문학사,2004)을 읽습니다. 시집 《내가 읽은 삶》은 산문시를 담은 책이라 할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산문시라기보다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할머니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할머니가 이녁 삶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스스로한테 스스로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집 살림이 어떻게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쥐꼬리만한 월급날 사오시는, 좁은 방을 가득 채웠던 책들. 사상계, 니체와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각종 철학책과 역사책들, 늘 바쁘고 피곤했던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읽었던 책들 ..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2 - 아버지의 꿈)



  ‘노래’가 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지어서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이런 노래를 두고 ‘민요’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지난날에는 누구나 그저 노래를 스스로 지어서 불렀습니다.


  지난날에 사람들이 스스로 지어서 부른 노래는 그예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꾸리는 삶을 스스로 가락을 입혀서 불렀습니다. 절구를 빻다가, 장작을 패다가, 나무를 하다가, 바느질을 하다가, 물레를 잣다가, 베틀을 밟다가, 바구니를 엮다가, 짚신을 삼다가, 콩을 삶다가, 메주를 띄우다가, 아이들을 재우다가,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다가, 참말 언제 어디에서나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날마다 이야기잔치이면서 노래잔치였습니다.


  이야기는 늘 삶에서 태어납니다. 하루하루 꾸리는 삶을 고스란히 노래로 부릅니다. 날마다 일구는 삶을 낱낱이 노래로 부릅니다.


  즐거움이 노래가 됩니다. 서운함이 노래가 됩니다. 웃음과 눈물이 모두 노래가 됩니다. 꿈과 사랑이 노래가 됩니다. 미움과 아픔과 생채기가 노래가 됩니다. 무엇이든 노래가 되고, 무엇이든 즐거운 이야기로 뿌리를 내립니다.



.. 어려울 때 이렇게 서로 돕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것이 삶을 사는 방식이었네. 그 훌륭한 방식을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싫었던 그 방식이 어린 나의 끔찍한 고민이었네 ..  (집 5 - 충남 합숙소)



  노래하는 아이 곁에는 노래하는 어른이 있습니다. 우는 아이 곁에는 우는 어른이 있습니다. 놀이하는 아이 곁에는 놀이와 일을 함께 누리는 어른이 있습니다.


  어른이 웃으면서 아이한테 웃음을 물려줍니다. 아이가 웃으면서 어른한테 웃음을 일깨웁니다. 어른이 노래하면서 아이한테 노래를 들려줍니다. 아이가 노래하면서 어른한테 노래를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하루도 아름답게 이야기 한 타래가 노랫가락처럼 포근하게 흐릅니다. 4347.10.1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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