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이야기’



  요즈음 곳곳에서 ‘소통’이라는 한자말을 곧잘 쓴다. 그러나, 이 한자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疏通’은 “(1)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2)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가리킨다. 먼저, 첫째 뜻으로 ‘소통’을 살핀다. 막히지 않고 잘 뚫리는 일이란 무엇일까? 좋을까? 안 좋을까? 막히지 않은 모습으로만도 나쁘지 않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막히지는 않으나 그저 뚫리기만 한다면? 둘째 뜻은 무엇을 말할까? 서로 이어져서 ‘잘못 아는 일이 없다’고 하는 소통은 무엇일까?


  잘못 알지 않으려면 서로서로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내 눈길과 눈높이로 맞은편(남)을 재거나 따지는 일은 ‘소통’이 아니다. 이때에는 ‘일방통행’이다.


  잘 알아야 한다. 맞은편(남)이 나한테 어떤 말을 줄기차게 들려준다고 한다고 해서 일방통행이 아니다. 맞은편(남)이 나한테 하는 말이 어떤 뜻인가를 내가 귀여겨들으면서 알아차리려 한다면 ‘소통’이 된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맞은편(남)이 들려주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언제나 ‘소통’이다. 왜 그렇겠는가? 서로 ‘잘못 아는 일이 없다’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인터넷 공간이라는 데에서 글이 하나 있고 덧글이나 댓글이 있다. 자, 보자. 덧글이나 댓글을 달아야 ‘소통’일까? 아니다. 덧글이나 댓글은 소통이 아니다. 아니, 한자말 뜻풀이 (1)로 보는 소통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통’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1)가 아닌 (2)을 말하겠지. 아닌가? 그저 (1)로만 소통을 말하려나?


  그런데 (1)와 같은 소통이 되려 하더라도, 맞은편(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소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댓글을 붙이는 일은 ‘댓글놀이’이다. 댓글놀이를 두고 소통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댓글놀이는 그저 댓글로 노는 삶이다. 다만, 알아야 하는데, 댓글놀이라 해서 더 좋거나 더 나쁘지 않다. 그저 댓글놀이일 뿐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다.


  댓글이 있거나 없거나, 또는 댓글을 달거나 말거나, 무엇이 대수로울까. 마음으로 서로 사귀는 사람은 말이 없어도 서로 따사롭게 바라보면서 껴안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왜 말 한 마디 없이 서로 따뜻하게 품에 안겠는가? 이것이 바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지켜보지 않으면서 ‘소통’을 말하려 한다면, 아무런 소통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찬찬히 귀여겨듣지 않고서는 소통을 이룰 수 없다.


  그러면, 이야기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한국말사전에서는 한국말 ‘이야기’를 제대로 풀이하지 못한다. 한국말 ‘이야기’ 참뜻은 “생각이나 마음을 말하고 듣는 일”이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생각이나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속삭인다. 우리는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꿈을 키운다.


  토론이나 논의나 논쟁이 아니다. ‘이야기’이다. 찬반토론이나 찬반논쟁이 아니다. ‘이야기’이다. 이쪽에 있는 사람은 이쪽에서 살아온 긴 나날에 걸쳐 얻은 슬기와 생각을 들려준다. 저쪽에 있는 사람은 저쪽에서 살아온 긴 나날에 걸쳐 느낀 슬기와 생각을 알려준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따지는 일이 되면 논쟁이나 토론이다. 이야기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 이야기는 실마리를 찾는 일이다. 실마리를 찾고 느끼고 나누고 밝히고 가꾸면서 삶을 짓는 일이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부터 ‘이야기꽃·이야기잔치·이야기마당’ 과 같이 말했다. 이야기는 노래가 된다. 이야기는 사랑이 된다. 이야기는 삶이 된다.


  여기에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면 서로 눈길과 눈높이가 맞아야 한다. 어느 한쪽에서 어떤 말을 한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기까지 무엇을 보고 배우고 익히고 맞아들여서 삭혔는가 하고 돌아보면서, 스스로 새롭게 보고 배우고 익히고 맞아들여서 삭히는 몸가짐으로 새로운 말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서로 새롭게 배우면서 나누는 말이 ‘이야기’이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으로 내뱉는 말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언제나 새로 배우고 다시 배우는 말이 이야기이다. 고정된 지식으로 내 주의주장을 외친다면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고 하는, 토론이나 논쟁이나 찬반싸움에서 늘 맴돌기만 한다.


  잘 생각해 보라. 소통은 삶이 되지 않는다. 소통은 그저 소통이다. 우리가 할 일은, 막히지 않게 하거나 서로 잘못 알도록 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이야기를 주고받아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생각을 살찌우고 가꾸어야 한다고 느낀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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