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 - 출간10주년 개정판 야생초 편지 1
황대권 글.그림 / 도솔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6



풀 한 포기와 나누는 사랑

― 야생초 편지

 황대권 글

 도솔 펴냄, 2002.10.1.



  어제 낮에 집부터 면소재지까지 걸어갑니다. 2킬로미터 길이니 가깝습니다. 잰걸음이라면 삼십 분이면 갈 만합니다. 그러나 굳이 서두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가을내음을 맡습니다. 아무도 들에 없기도 하지만, 들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춥니다.


  깊은 가을로 접어들기에 살그마니 꽃을 피우는 환삼덩굴을 봅니다. 환삼덩굴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새삼스레 들여다봅니다. 이제껏 나물로 신나게 뜯어먹기만 했을 뿐, 정작 환삼덩굴꽃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쑥꽃을 본 지 몇 해 안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우리 보금자리 한켠에 쑥대를 그대로 두었기에 비로소 쑥꽃을 볼 수 있었어요.


  햇볕은 알맞게 따스합니다. 바람은 알맞게 시원합니다. 시골 논둑길이 예전처럼 흙길이라면 훨씬 싱그럽겠지만, 시멘트 논둑길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시골마을이 예전처럼 농약 없는 들길이라면 한결 아름답겠지만, 비가 한 차례 지나간 들길인 터라 농약내음은 얼마 안 납니다.



.. 오늘 비디오를 보면서 영화로도 사람을 얼마든지 고문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주윤발이나 유덕화, 왕조현 등과 같은 톱스타들이 그토록 저질영화에 무분별하게 출연한다는 사실이다 … 교도소가 왜 이리 삭막해지는지 모르겠어.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해야만 잘 돌아간다고 여기는 건가? 심지어 구 척 담장 밑에 한 줄로 쪼로니 피어난 제비꽃마저 깨끗이 뽑아 버리니 말이야 ..  (27, 57쪽)



  환삼덩굴꽃을 한참 바라보는데 풀뱀 한 마리가 옆으로 슬슬 지나갑니다. 풀꽃을 보다가 풀뱀을 봅니다. 풀뱀은 나를 보았을가요. 풀뱀은 내 발자국이나 몸짓을 느꼈을까요.


  뱀은 사람을 무서워 합니다. 뱀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사람은 옛날부터 뱀을 잡아서 먹었고, 뱀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뱀을 끔찍하게 잡거나 죽입니다. 참말 뱀은 깃들 곳이 없습니다. 논밭에 하도 농약을 쳐대니 개구리나 도룡뇽뿐 아니라 작은 풀짐승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뱀은 먹이가 자꾸 사라져서 괴롭습니다. 뱀은 지구별에서 사라져야 할까요? 뱀이 지구별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논둑길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저 먼 큰길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퍽 멀리까지 울립니다. 몇 킬로미터쯤 떨어져야 자동차 소리를 안 들을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지 돌아봅니다. 자동차 바퀴소리가 우리 삶을 살찌울는지,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가 우리 삶을 북돋울는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방송과 인터넷에서 흐르는 대중노래가 우리 마음을 살찌울 만한가요. 사람들은 저마다 이녁 삶에 맞추어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부를 수 없는가요. 먼먼 옛날 누구나 일을 하며 노래를 불렀듯이, 놀이를 하며 노래를 즐겼듯이, 일노래와 놀이노래는 이제 어디로 갔을까요. 삶을 가꾸는 삶노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 우리는 이미 박통 시절에 이런 생태적 재앙을 겪었다. 바로 통일벼에 의한 싹쓸이 경작이 그것이지. 이 통일벼 심기는 새마을 운동과 결합되어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우리 농촌에 문화적 재앙까지 몰고 왔다 … 우리 산야에 자라나는 풀꽃들의 이름은 참으로 예쁘고 친근한 것들이 많다. 그 많은 풀들에 일일이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 준 우리 민중들의 슬기에 감사드리고 싶다 ..  (106, 114쪽)



  황대권 님이 교도소에 갇혀서 지내야 하던 때에 쓴 짤막한 글을 모아서 엮은 《야생초 편지》(도솔,2002)를 읽습니다. 2002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2012년에 새롭게 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은 책에 붙은 띠종이를 보면, “야생초는 단순한 풀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여는 상징입니다”와 같은 글월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단순한 풀”은 무엇이고 “새로운 문명을 여는 야생초”는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펼칩니다. ‘야생초(野生草)’는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이라 합니다. ‘야초(野草)’는 “들에 저절로 나는 풀”이라 합니다. ‘산초(山草)’는 “산에 나는 풀”이라 합니다. ‘잡초(雜草)’는 “= 잡풀”이라 합니다. 그러면 ‘풀’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은 ‘풀’을 “초본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풀이합니다.


  요즈음 사회에서는 이런저런 한자말을 쓰는데, 이런저런 한자말이 이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시골에서 ‘야생초·야초·산초·잡초’ 같은 말을 썼을까요? 1900년대 시골이나 1800년대 시골이나 1500년대 시골이나 1000년대 시골이나 500년대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기원전 시골이나 단군 무렵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턱없는 소리입니다. 고작 쉰 해 즈음 앞서만 해도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지난날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들풀·멧풀·김(지심)’이라는 한국말을 썼어요. 여기에 ‘풀·나물·남새·푸성귀’라는 한국말을 썼습니다.


  2012년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오는 《야생초 편지》라 한다면, “풀 편지”나 “들풀 편지”처럼 제대로 된 이름으로 고쳐서 제대로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글쓴이와 출판사 모두 풀이름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 이담에 내가 살 집의 마당은 아마도 야생초 전시관이 될 거다. 어디 갔다 올 때마다 하나씩은 파올 테니까. 그러자면 마당을 아주 넓게 잡아야 하겠지, 그렇게 십여 년 가꾸다 보면 아마 자식놈은 꽃만 보고도 책 한 권 분량의 야생초 이름 정도는 줄줄 외워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집안엔 늘 야생초차 향기가 가득할 것이구 … 안동교도소 청소부는 야생초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천적과 같은 존재이다. 도대체가 풀이 좀 자라서 뜯어먹을 만하면 어느샌가 와서 엎어 버리니 ..  (155, 166쪽)



  풀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풀이 없으니 사람이 미칩니다. 풀이 없기에 사람이 싸우거나 다툽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란, 쌀알이고, 쌀알이란, 벼이며, 벼란, 풀이요, 쌀알이란, 풀알, 곧 풀 열매입니다. 풀 열매인 풀알이 없으면 사람은 모두 굶을 뿐 아니라 죽습니다. 밥으로도 풀알을 먹지만, 사람이 먹는 돼지이든 소이든 닭이든 풀을 밥이나 모이로 삼아서 먹고 자라요. 예부터 한겨레가 먹은 고기란, 그냥 살점이나 살덩이가 아니라 ‘풀을 먹고 자란 고기’입니다. 고깃덩이를 먹어도 고기가 아닌 ‘풀로 이룬 살점’을 먹은 셈입니다.


  풀이 있기에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나무가 있기에 둘레에서 풀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숲은 풀과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우거진 곳입니다.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숲이 될 때에,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얻어 집을 짓고 장작을 패며 다리를 놓습니다. 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짓습니다. 풀이 없으면 밥도 못 먹지만 옷도 못 입습니다. 풀이 있기에 싱그럽게 바람이 붑니다. 나무뿐 아니라 풀이 지구별 온누리에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누리에 돋는 풀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썼어요. 첫째, 먹는 풀입니다. 둘째, 옷을 짓는 풀입니다. 셋째, 지붕이나 울타리로 삼는 풀입니다. 넷째, 약으로 쓰는 풀입니다. 다섯째, 그대로 지켜보면서 푸른 바람을 얻도록 해 주는 풀입니다.



.. 문명이란 그 풀 냄새를 점차로 지워 없앤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야채가 그것이지. 야생의 풀 냄새를 제거하고 인간의 미각에 맞추어 특정한 맛만을 선택하여 육종,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야채이다 … 어제 이감을 오는데 대구 시내에 들어서서 다시 화원읍으로 빠지는 길이 마침 퇴근 시간과 겹쳐서 어찌나 밀리던지. 호송차의 창 틈 사이로 간신히 보는 풍경이었지만, 저 엄청난 차와 매연과 시멘트덩이 속에서 어찌들 살아가고 있는지. 참으로 나로서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저런 환경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다 ..  (176, 194쪽)



  《야생초 편지》라는 책에 나오듯이 “풀내음을 자꾸 지워서 없애는 오늘날 사회요 정치이고 문화이며 교육이자 과학”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풀을 끔찍하게 미워할 뿐 아니라, 없애느라 바쁩니다. 왜 풀밭에 농약을 칠까요? 곡식이나 남새를 망가뜨리는 풀일까요? 아니에요. 나물을 뜯을 줄 모르고 약풀을 건사할 줄 모르니 함부로 농약을 칩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모시풀을 함부로 베어 없애거나 태워 없애는 까닭은, 지난날처럼 모시에서 실을 얻어 모시옷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모시풀이 많이 돋는 까닭은 지난날 어느 시골에서나 모시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풀을 모른다면 시골에서 살 수 없습니다. 풀을 아끼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풀을 알려 하지 않는다면 인문학 지식이 아무리 넘쳐도 바보스러운 삶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풀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채식도 육식도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구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풀 한 포기에서 평화가 자랍니다. 모든 꽃은 풀줄기에 달립니다. 풀씨에서 풀뿌리가 내리고, 풀씨에서 풀줄기가 오르며, 풀씨에서 풀잎이 돋아야, 비로소 꽃망울이 맺히고 꽃봉오리가 터져서 꽃잎이 벌어집니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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