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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하루 ㅣ 빛깔있는책들 - 불교문화 123
돈연 지음 / 대원사 / 1992년 6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171
나물 뜯는 절집 스님
― 산사의 하루
돈연 글
김대벽·안장헌 사진
대원사 펴냄, 1992.6.30.
돈연 스님이 쓴 《산사의 하루》(대원사,1992)를 읽으면, 절집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보내는가를 찬찬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얼거리로 ‘수녀원 하루’도 생각해 볼 만한데, ‘시골 할머니 하루’라든지 ‘열 살 어린이 하루’도 돌아볼 수 있어요. 문화란 멀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누리는 삶이 모두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도시나 시골이나 거의 엇비슷하달 수 있고, 서울이나 부산이나 대구 같은 큰도시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는 작은도시에서도 하루살이가 거의 비슷하다 할 만해요. ‘서울 어린이 하루’나 ‘해남 어린이 하루’를 따로 그릴 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닷가 어린이와 멧골 어린이와 섬 어린이 하루를 ‘섬사람 하루’로 돌아보는 이야기를 그릴 수 있어요. 오늘날 시골 어린이는 시골일을 그리 안 하면서 산다면, 지난날 시골은 어떠했는가를 헤아리면서 그릴 수 있습니다. 지난날 시골살이를 떠올릴 수 있는 어른들이 아직 튼튼할 적에 우리 여느 삶을 담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지 싶어요.
.. 종소리는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위해 울린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하늘, 수라에 이르고 다시 곤충이나 새들에게까지 자비의 감로 법문을 들려주기 위해 울린다 … 넓은 의미에서 수행자의 하루 스물네 시간은 모두가 부처님께 예배하는 생활이다 .. (15, 22쪽)
절집 스님들은 무슨 일을 할까요. 절집 스님들은 절집에서 어떤 일을 하며 마음닦이를 할까요.
《산사의 하루》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으면, 하루 스물네 시간 언제나 마음닦이라 할 만합니다. 무엇을 하든 늘 마음닦이로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꽤 긴 자리를 빌어 ‘행자가 수련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다른 대목도 볼 만하지만, 나는 다른 어느 대목보다 이 이야기에 눈길이 갑니다.
.. 행자의 수련 기간은 대개 일 년 정도이다. 이 기간에는 봄이면 나물을 캐서 국거리를 장만하거나 채소를 뿌리고 가꾸는 일, 여름이면 푸성귀 무침이나 떨어진 김장을 대신하여 미역 냉채나 깻잎, 콩잎, 장아찌로 밑반찬을 해 놓는 일, 가을이면 김장하고 메주 만들어 말리고 띄우는 일, 채소 일변도의 식탁을 꾸며 대중들의 정진에 틈이 없도록 보살필 줄 아는 여력을 키워야 한다 … 잡채에 쓰는 표고버섯 불려 알맞게 찢어야지, 시금치 적당히 데쳐 물 빼 놔야지, 우엉 썰어 쪼갠 뒤 으깨지지 않게 칼등으로 두드려 양념해서 구워야지, 두부 썰어 기름에 노릇노릇 튀겨야지, 콩나물 다듬아 삶아 물 빼야지, 기름 발라 소금을 뿌려 재워 놓은 김도 얕은 불에 구워야 한다. 어디 거긋뿐인가. 겨울에는 무 썰어 생채를 만들고 .. (48, 53쪽)
절집에 들어가기 앞서 봄나물을 캐거나 밥을 짓거나 나물무침을 하거나 김치를 담근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스님이 되려면 밥짓기를 알뜰살뜰 할 수 있어야 하는 줄 얼마나 생각했을까요.
물을 길어서 밥을 짓습니다. 풀을 뜯어 반찬을 삼습니다. 된장을 풀어 국을 끓입니다. 수수한 밥차림입니다만, 함께 먹을 밥을 날마다 살펴서 차립니다. 밥도 날마다 차리지만, 나물은 끼니마다 뜯어야 해요. 비가 오건 날이 덥건 늘 풀을 뜯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절집에서 밥짓기부터 익히면서 마음을 닦는다면, 일흔 해나 아흔 해에 걸쳐 날마다 밥을 지은 할머니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일군 셈일까요. 하느님도 부처님도 모르는 채 늘 밥을 지어 한집 사람들을 먹여살린 할머니와 어머니는 저마다 어떤 삶을 가꾸면서 어떤 길을 걸은 셈일까요.
절집에 들어가서 밥짓기를 익히면서 마음을 닦는다면, 우리들 살림집에서도 날마다 즐겁게 밥을 지으면서 마음을 닦을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청소를 하는 동안 얼마든지 마음을 닦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걸레질도 마음닦이입니다. 설거지도 마음닦이입니다. 아이들과 노는 하루도 마음닦이입니다. 집 둘레에 돋는 풀을 살펴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손길도 마음닦이입니다. 지난날에는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는 일도 마음닦이예요. 절구질을 하고 방아를 찧는 일도 마음닦이입니다.
.. 대중 울력은 보통 한나절 정도로 잡혀 정진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이 상례지만 모내기와 수확 그리고 김장 등의 일은 며칠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 … 바위가 많은 협소한 곳에 지어진 사찰은 흙이 부족한 관계로 낙엽을 위쪽으로 쓸어 모은다. 비질에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 수행자는 신발 뒤끝의 어느 한쪽만 닳게 신어서는 안 된다. 앞뒤가 고르게 닳아야만 수행자에 맞는 걸음걸이가 된다 .. (73, 77쪽)
절집 스님들이 씨앗을 뿌립니다. 절집 스님들이 낫을 들어 나락을 벱니다. 씨를 뿌려 돌본 뒤 거두어 갈무리하는 삶이 절집 스님들 마음닦이입니다. 이러한 일을 으레 할 줄 모른다면 스님이 못 되는 셈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교회 목사가 되든 성당 신부가 되든, 성직자가 되는 길에 이처럼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논밭을 일구는 삶을 함께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을 때에, 푸르게 눈빛을 밝혀 사랑스러운 숨결을 길어올릴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성직자가 익힐 삶이란 바로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입니다. 성직자가 만나는 사람이란 바로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에요.
다른 학문에서도 이와 같으리라 느낍니다. 교수가 되건 교사가 되건, 반드시 집일과 흙일을 배우도록 해야지 싶어요. 유치원 교사가 되건 시장이나 군수가 되건, 누구나 반드시 집일과 흙일을 익히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어도 날마다 집일을 다스리고 흙일을 돌볼 수 있도록 해야지 싶어요.
.. 향기 좋게 피는 야생화 사잇길의 여름 산보며,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갈대숲 사이의 가을 산보며, 토끼가 힘들여 뛰는 눈길의 겨울 산보, 밟히는 작은 이끼의 망울져 터져 나가는 생명의 신비를 바라보는 일들. 짧은 산행이라 차림 그대로여서 좋고, 목적이 없으니 바쁠 것 없어 홀가분하다 .. (92쪽)
아름답게 살 때에 즐겁습니다. 흙을 만지고 흙길을 거닐면서 숲바람을 쐬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자가용을 몰아 놀러다녀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두 다리로 풀밭을 밟으면서 나무그늘에서 쉴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놀이시설이 있어야 하는 공원이 아닙니다. 우람한 나무가 하늘로 뻗고, 들짐승이 함께 노니는 풀밭에서 뒹굴 수 있어야 공원입니다.
절집에만 있어야 할 스님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스님이면서 살림꾼이요 오롯한 사람이어야지 싶습니다. 예배당에 있어야 할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하느님이면서 삶지기요 오롯한 사랑지기여야지 싶습니다. 부처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숲에서 태어났고, 숲에서 살림을 수수하게 가꾸던 살림꾼 손길에서 깨어났으며, 숲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맑은 눈망울에서 비롯했으리라 느낍니다. 4347.9.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