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그머니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6
조성국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65
시와 한가위 풀베기
― 슬그머니
조성국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7.3.28.
새벽 다섯 시 반에 마을방송이 퍼집니다. 한가위를 앞두고 마을청소를 하자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오늘 새벽에 마을청소를 하자는 줄 알았으면 어제 낮에 아이들과 함께 마을 빨래터와 샘터를 치웠을 텐데, 엊저녁과 오늘 새벽에 마을방송을 하니, 마을 빨래터와 샘터는 우리가 못 치웁니다. 아이들은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한가위를 앞둔 구월 첫머리 새벽은 꽤 어둑합니다. 낫을 하나 챙겨서 고샅으로 갑니다. 우리 집 대문 둘레에 돋은 여러 가지 풀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내가 아끼고 귀엽게 바라보는 풀이지만, 오늘 하루는 베기로 합니다. 석석 낫질을 할 적마다 풀은 뭉텅뭉텅 잘립니다. 오늘날 시골마을에서 하는 마을청소는 ‘풀베기’입니다.
.. 가문 마당에 / 소낙비 온 뒤 // 붉은 지렁이 한 마리 / 안간힘 써 기어가는 .. (여름 한때)
예부터 풀은 아무 때나 함부로 베지 않았습니다. 소한테 먹일 풀이 아니라면, 또 밥상에 올릴 나물이 아니라면, 풀을 섣불리 베지 않았습니다. 바구니를 엮는다든지 실을 뽑을 일이 아니라면, 함부로 풀을 베지 않았어요.
오늘날에는 소한테 풀을 베어 먹이지 않습니다. 아니, 풀을 베어 소한테 줄 아이들이 없습니다. 풀을 먹으며 지낼 만한 일소가 시골에 없기도 합니다. 게다가 시골에 젊은이가 몽땅 사라져서 도시로 가고 말았으니, 시골에서는 논둑이고 밭둑이고, 논밭이고 어디이고 온통 농약입니다. 이곳저곳에 농약을 뿌려대는 시골인 만큼, 마을 고샅길에서 자라는 풀조차 섣불리 쓸 수 없습니다. 그저 베어낼 뿐입니다.
.. 농협 마당 나락 섬에 / 불 놓던 지아비 / 약병 들고 스러지던 솔밭 새로 가네 .. (망종길)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잘 자라던 쑥포기를 그대로 두고 싶지만, 그대로 두면 안 되겠구나 싶습니다. 우리 집이 홀로 조용히 떨어진 멧골집이라면 그대로 둘 테지만, 마을 한복판에 있는 집입니다. 마지막으로 대문 앞 쑥포기를 벱니다. 내 키보다 웃자란 쑥포기를 벱니다. 이 쑥포기는 아까워 마당으로 들입니다. 잘 말려야지요.
가만히 생각하면, 시골 할매나 할배가 한가위를 앞두고 풀베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도시로 떠난 이녁 딸아들이 시골에 와서 풀을 베 주면 베 줄 노릇이지, 늙은 몸을 이끌고 풀을 베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언제부터 한가위나 설을 앞두고 풀베기를 ‘마을청소’라는 이름을 붙여서 했을까요? 아무래도 박정희 독재정권 새마을운동 때부터일 테지요. 풀로 이은 지붕을 모조리 석면 지붕으로 갈아치우도록 닦달하던 새마을운동 때부터 시골사람이 스스로 ‘풀을 미워하고 짓밟도’록 내몰았을 테지요.
.. 외상 점방이 있다 꽉 막힌 골목길이란 없다 / 막다른 끝에 누군가의 집이 있고 / 케케묵은 거기에 구뜰하게 세 들어 사는 / 헐값에도 팔 수 없는 싸구려 고물들 .. (오래된 골목)
조성국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슬그머니》(실천문학사,2007)를 읽습니다. 삶은 슬그머니 빛나고, 슬그머니 저뭅니다. 삶은 슬그머니 기지개를 켜고, 슬그머니 웃고 떠들면서 일하다가, 슬그머니 하품을 하고는 고단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한가위를 앞두고 참새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참새는 무리를 지어 슬그머니 낟알을 먹고 싶습니다. 나락내음이 훅훅 온 마을에 퍼지는걸요. 참새더러 낟알을 훑지 말라 할 수 없습니다. 잘 익는 냄새가 퍼지는데 참새가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숲정이가 있나요. 숲정이를 모조리 없앤 시골에서 참새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가을이 되어 낟알을 조금 얻어먹으려는 참새인데, 참새는 봄부터 가을까지 바지런히 벌레를 잡아먹었어요. 사람들이 아무리 농약을 써도 잡을 수 없던 벌레를 수많은 참새가 그야말로 바지런히 다니면서 애써서 잡아먹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참새도 낟알을 조금 얻어먹을 만합니다. 누군가 슬그머니 참새한테 낟알을 나누어 줄 만합니다.
.. 여느 날과 같이 잔업 마치고 늦은 밥상에서 / 코훌쩍이 아들의 이마를 향해 / 잔뜩 힘을 준 종주먹을 냅다 뻗었는데 / 그보다 훨씬 빠른 것은 / 제 이마를 팔뚝으로 가로막고 / 밥알을 잽싸게 주워 먹는 녀석의 / 날랜 동작이었다 .. (날랜 유전)
아마 오늘은 내가 가장 먼저 낫을 들고 나와서 풀을 다 베었지 싶습니다. 우리 집 앞 고샅길에서 자라던 풀이 감쪽같이 사라진 줄 이웃 할매나 할배는 나중에 알아차릴 테지요. 누가 이리 베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야말로 슬그머니 풀을 베고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볕바른 동원훈련장의 / 늙수그레한 중대장 눌변대로라면 / 그 육십년대의 중무장한 남파특수부대가 / 단박 침투해 올 것 같았다 / 요즘도 그런 사태가 발발하겠느냐는 듯 / 두엇 두엇 모인 예비군은 / 옹송그려 졸고 / 어깨에 기댄 M16 총구 위로 / 노랑나비도 쪽잠 들러 날아들었다 .. (호접점경)
차츰 동이 틉니다. 천천히 날이 밝습니다. 이웃집에서 경운기 굴리는 소리가 퍼집니다. 풀 베는 기계로 윙윙 풀을 베는 소리가 들립니다. 낫질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소리는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낫이 아닌 ‘예초기’를 쓰면서 노래를 못 부릅니다. 기계로 풀을 베면 기계에 잘린 풀이 날카롭게 튀기 때문에 긴옷을 입고 입을 꾹 다물어야 합니다. 경운기를 굴리면 아주 시끄러운 엔진 소리 때문에 말을 섞을 수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자가용과 손전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와 말을 빼앗았습니다. 시골에서는 농약과 농기계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와 노래를 앗아갔습니다. 우리한테는 이제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누리는 삶일까요. 사랑과 꿈은 언제 어떻게 다시 자랄 수 있을까요. 4347.9.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