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랑 놀자 53] 흙빛
흙은 흙빛입니다. 흙은 흙이기에 흙빛입니다. 그런데, 흙빛을 두고 ‘황토색(黃土色)’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고, ‘황갈색(黃褐色)’이나 ‘갈색(褐色)’이나 ‘황색(黃色)’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어릴 적에는 ‘황색’이나 ‘갈색’이란 낱말을 자주 썼어요. 크레파스나 물감에는 이런 낱말만 적혔거든요. 그림을 그리면서 나뭇줄기에 빛깔을 입힐 때에는 으레 ‘갈색’을 쓰라 했고, 흙에 빛깔을 입힐 적에도 ‘갈색’이나 ‘황색’을 쓰라 했어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흙을 흙빛으로 마주한 일이 드물었기에,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나는 이제 마흔 살이 넘는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낳고 시골에서 지냅니다. 시골집에서 지내며 우리 집 흙을 바라보고, 숲이나 멧골에 있는 흙을 바라보며, 농약과 비료를 듬뿍 치는 이웃 논밭에 있는 흙을 바라봅니다. 흙은 자리마다 빛깔이 다릅니다. 농약과 비료를 듬뿍 치는 논밭에 있는 흙은 허여멀건 기운이 감도는 옅누른 빛깔입니다. 풀이 우거진 밭이나 숲에 있는 흙은 까무잡잡한 빛깔입니다. 거칠거나 메마른 흙은 누런 빛깔이지만, 풀이 잘 돋고 나무가 우거지는 데에 있는 흙은 차츰 거무스름한 빛깔로 달라집니다. 시골에서 살며 바라보니, 나뭇줄기라든지 가랑잎 빛깔은 꼭 흙빛을 닮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밟거나 만지며 살아가는 사람은 낯이나 손발이나 살갗이 흙빛을 닮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그림을 가르치는 어른들은 한겨레 살빛을 ‘살구알 빛깔’로 그리라고 하는데, 오랜 나날 우리 겨레뿐 아니라 이웃 겨레는 모두 흙빛 살갗이요 얼굴로 시골빛을 가꾸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7.7.3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