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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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60



시와 껍질

―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김혜순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5.9.1.



  아이들이 날마다 껍질을 깨고 일어납니다. 참말 아이들은 날마다 새로 깨어납니다. 이와 달리 어른들은 좀처럼 날마다 껍질을 못 깨기 일쑤이고, 못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날마다 새로 깨어나려는 생각을 안 품기도 합니다.


  삶이 따분할까요. 삶이 지겨울까요. 고단하거나 괴로워서 생각하기 싫을까요. 사회에 길든 탓에 마음속에 아무런 느낌도 빛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어른은 누구나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아기로 태어난 목숨은 천천히 자라 아이가 되고, 다시 천천히 크면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을 보면, 나이만 먹은 어른이 있고, 나이가 아닌 슬기를 키우는 어른이 있습니다. 나이만 먹는 어른은 삶을 재미없다 여기며, 슬기를 키우는 어른은 삶을 재미있게 나눕니다.


  아이들을 볼 적에도 이와 같습니다. 날마다 늘 재미나게 노는 아이들이 있으나, 새로운 날을 맞이했어도 좀처럼 놀 생각을 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놀 생각이 가득한 아이가 있고,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집에서나 공부 생각에 사로잡혀 아예 놀이를 잊는 아이가 있습니다.



.. 너는 보지 않지 / 나무들 어우러진 산봉우리들과 / 그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폭포들을 / 보지 않지 / 그것들을 보지 않고, 너는 / 나무뿌리 곁에 엎드리고 / 흘러가는 물 아래 엎드린 / 땅을 보지 / 수천 년 전부터 거기 살아온 / 흙을 보지 / 춤추고 일어서고 움직이는 / 대평원을 내려다보지 / 그것도 저 보름달쯤에서 보듯 / 바라만 보지 ..  (흙만 보는 사람)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흐릅니다. 구름이 흘러 그늘이 생깁니다. 칠월 무더위에 구름이 빚는 그늘은 더없이 시원하고 싱그럽습니다. 구름이 없더라도 나무가 있으면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이 몹시 상큼하면서 아름답습니다. 건물이 만드는 그림자로는 시원하다는 느낌이 안 들지만, 구름이나 나무가 빚는 그늘은 그야말로 시원합니다.


  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서 풀과 나무는 한결 짙푸릅니다. 그런데 비가 열흘 내리 들이붓다가, 또 열흘 잇달아 퍼붓습니다. 끊이지 않는 비에는 풀도 나무도 수그러듭니다. 넘치는 빗물에 풀포기가 눕고 나무가 기운을 잃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풀과 나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물을 잘 준다 하더라도 풀과 나무는 빗물을 바랍니다. 감옥이 아무리 시설이 좋다 한들, 집과 마을이 사람한테 가장 포근하면서 아름다웁듯이, 풀과 나무한테는 ‘사람이 주는 물’이 아닌 ‘하늘이 내리는 빗물’이 가장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풀과 나무는 빗물로만 살지 않아요. 빗물만 준대서 살 수 없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풀과 나무한테는 빗물 말고 또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바로 해입니다. 햇볕과 햇살과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흙입니다. 비료나 농약이 아닌 흙입니다.



..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신다, / 넓고 넓은 가을 들판에 / 아버지가 허수아빌 세우시고 / 넝마들에게 준엄하게 이르신다 /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삽니다. 밥을 먹었으면 똥오줌을 누어야 삽니다. 밥을 먹고 일하면서 잠을 자야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밥만 먹거나 잠만 잔대서 살 수 있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감옥에 갇힌 채 밥만 잘 먹고 잠만 잘 잘 수 있다면, 사람으로서 즐거운 삶이 될까요? 아이들이 값진 옷을 입고 맛난 밥을 먹으며 자가용을 타면서 학교를 오간다면, 이러한 삶이 아이들한테 즐거울까요? 오직 시험공부만 해야 하면서 지내야 한다면 아이들은 삶이 즐거울까요?


  김혜순 님이 빚은 시집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문학과지성사,1985)를 읽습니다. 스스로 껍질을 깨면서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싶은 노래를 부르는 시를 읽습니다. 사랑을 꿈꾸고 싶은 노래와 같은 시를 읽습니다. 꿈을 펼치고 싶은 노래와 같은 시를 읽습니다.



.. 나는 엄마다 / 딸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 내가 또 세끼를 근엄하게 훈계하고 / 먹여서 기르니 / 나는 엄마다 / 엄마이기 때문에 / 나는 엄마 행세를 한다 / 그건 안 돼! / 하지 마! / 때릴 거야! ..  (엄마)



  우리는 대학교에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사원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국민연금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료보험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국민투표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나 군수를 뽑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문을 읽거나 방송을 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면서 하루하루 웃음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숲을 누리고, 바다를 껴안으며 멧골에서 나물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줄 것이 없어 나는 자식에게 별명을 선물로 준다. / ― 가시야, 실파리야, 거머리야 / 자식은 그런 가녀린 장난감은 갖고 놀 수 없다고 투덜거린다. // 그 다음 나는 좀 더 예술적인 선물을 준다. / ― 피아노를 울려라, 딩동댕. 풀피리를 불어라, 삘릴리. 작은북을 울려라 통통통 / 자식은 나는 당신의 악기가 아니라고 투덜거린다. / 그래서 나는 좀 더 딱딱하고 교훈적인 별명을 내 자식에게 수여한다. / ― 뭇솔리니! 흐루시쵸프! 마오쪄뚱! ..  (나의 詩의 발전사)



  아름답게 살 때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돈을 잘 벌기에 아름다운 삶이 아닙니다. 이름을 드날리기에 아름다운 삶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삶이 되자면, 스스로 ‘아름다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스럽게 어깨동무할 때에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교수가 되거나 작가가 된대서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넓은 아파트를 내 것으로 삼거나 큰 자가용을 내 것으로 몬대서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삶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옵니다. 삶은 날마다 껍질을 깨고 일어섭니다. 삶은 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삶을 읽으면서 노래가 흐릅니다. 노래가 흐르면서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이야기가 샘솟으니 시 한 줄을 쓸 수 있습니다. 4347.7.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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