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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에너지 ㅣ 아나스타시아 7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12년 8월
평점 :
환경책 읽기 59
생각, 삶, 사랑
― 삶의 에너지, 아나스타시아 7
블라지미르 메그레 글
한병석 옮김
한글샘 펴냄, 2012.8.15.
개구리가 노래하는 사이사이 휘파람새 소리가 섞입니다. 유월에서 칠월로 접어들었습니다. 개구리 노랫소리는 봄부터 듣고 가을에 끊어집니다. 가을부터는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소리에 섞이는 멧새 노랫소리를 들어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풀숲에서 목숨을 잇는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개구리 노랫소리를 한참 듣다가도 비닐봉지를 부시럭거리면 개구리 노랫소리는 까맣게 사라집니다. 물을 한 잔 마신다든지, 개수대에서 물꼭지를 튼다든지, 문을 여닫는다든지 할 적에도 개구리 노랫소리는 내 귀에서 사라집니다. 이 소리는 어디로 갈까요.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사이에 누워 잠을 부르면, 개구리 노랫소리는 차츰 흐려집니다. 어느새 잊혀지면서 새로운 곳에서 빛도 소리도 없는 꿈을 그립니다. 내 넋은 개구리 노랫소리를 안 듣지만, 내 몸은 밤새 개구리 노랫소리를 들을까요.
생각을 기울이면 소리를 듣습니다. 생각을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를 안 듣습니다. 생각을 할 적에 소리가 스며들고, 생각을 안 할 적에 소리를 못 느낍니다.
..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선생은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했나요 … 그런데 까쨔는 소망했어요. 고집이 있거든요 … 생각한테는 예상치 못할 상황이란 없다. 그런데 온갖 사고, 혼란이 일어난다. 왜일까? 생각이 설계를 마칠 시간을 안 준 채, 물화에 서둘렀기 때문이다 … 자신의 삶을 포함한 일상의 모든 상황이 절대적으로 우선은 생각에서 지어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연, 사람도 태초에 하느님의 생각이 지은 것이다. 사람도 하느님처럼 스스로의 생각으로 새로운 물건, 자신의 삶을 지을 수 있다 … 장인은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단식을 하여 몸에서 필요없는 것을 청소하였고, 그로써 생각의 힘을 돋웠던 것이지 … 사람들은 항상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들만을 본다는 거야 .. (10, 16, 22, 28쪽)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니, 코앞에 누가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코앞에 하느님이 있어도 못 알아보아요. 왜냐하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바삐 어디론가 가야 할 뿐입니다. 코앞에 하느님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보기보다는 바쁜 다른 일을 하러 가야 합니다.
우화가 아닌 우화라고 할 텐데, 참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를 붙잡고 이야기를 걸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손사래를 칩니다. 그러고는 예배당에 가야 한다고, 절에 가야 한다고, 예배당과 절에서 비손을 올려야 한다고, 너무 바쁘다고, 이녁(하느님이나 부처님)한테 붙들려서 이야기를 들을 겨를이 없다고, 이렇게 손사래를 칩니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불러도 나는 바쁜 일을 하러 가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불러도 나는 바쁜 일 때문에 가야 한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곁님이 불러도, 곁님이 저기를 보라면서 불러도, 곁님이 저기에 나비가 예쁘게 날갯짓을 하니까 함께 보자고 불러도, 나는 더없이 바쁜 어떤 일이 있다면서 모두 손사래를 칠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어떤 일이 바쁠까요. 우리는 어떤 일부터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일로 삶을 지을 때에 즐거울까요. 우리는 어떤 즐거움부터 찾아나서야 할까요.
.. 네가 기억할 것이 있다. 네가 여신과 살고 싶다면 너의 삶도 여신의 격에 맞아야 하느니라 … 새 세상을 짓거나 이미 지어진 세상을 더 좋게 하려면 사람의 생각의 속도가 하느님의 그것에 버금가야 한다 … 태초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생각의 속도와 대등했다. 그렇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은 다른 어떤 부모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식을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짓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 사람의 생각 에너지를 방향을 바꾸거나 노예화할 수 있는 건 사람의 생각뿐이다 … 규명은 절대 이성이 아닌 느낌의 차원에서 스스로 자유로이 태어나야 해 … 당신은 아무것도 고칠 게 없어요. 모두는 애초부터 당신에 의해 완벽하게 지어졌어요 .. (30, 36, 46, 51쪽)
돈을 벌어야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해야 밥을 먹습니다. 밥은 돈으로 사들여서 먹지 않습니다. 때로는 돈을 써서 어떤 밥집에서 사다가 먹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봐요. 밥집에서는 쌀이든 푸성귀이든 열매이든 어디에서 가져올까요? 돈을 주고 사오겠지요. 그러면 어디에서 사올까요? 시골에서 사올 테지요.
우리가 시골에서 살며 스스로 흙을 일구면, 굳이 돈을 벌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도시에서 살더라도 스스로 흙을 일구면, 애써 돈을 벌어야 하지 않습니다.
이때에 아주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집이 있어야 해요, 하고. 그래, 그러면 어떤 집이 있어야 할까요? 백억 원짜리 집이 있어야 할까요? 십억 원짜리 집이 있어야 할까요? 오억 원쯤은 되는 집이 있어야 할까요?
어떤 집에 있을 때에 이 집을 ‘보금자리’로 여기겠습니까. 어떤 집에서 먹고 자며 잠들 적에 즐겁게 노래하겠습니까. 어떤 집에서 아이들과 꿈을 키우겠습니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삶을 가꾸고, 어떻게 일과 놀이를 누리며, 어떻게 사랑과 꿈을 지피려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을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열고 생각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름난 강사한테서 실마리를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쏟아서 생각을 바쳐야 합니다.
.. 하느님은 자신의 작품인 사람이 자기와 닮길 바랐어 … 그를 보지 않고 느끼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거든 … 하느님의 작품을 부수고 자기 아버지가 지으신 세상에서 멀리 수도원의 돌담 뒤로 숨거든. 수천의 성스러운 경전을 생각해 내고 써냈지. 어디나 다 똑같아. 성경은 말하지. 하느님을 숭배해야 한다고. 절을 하긴 하는데 누구한테 하는 건지는 몰라 … 자기 자식들의 무기력한 탄식보다 부모에게 더 큰 고통이 무엇일까 … 사람의 생각의 속도가 하느님의 것에 이른다면, 사람은 다른 별에서도 생명으로 넘치는 조화로운 세상을 지을 수도 있을 거야 .. (55, 56, 57, 61쪽)
생각을 짓는 사람이 삶을 짓습니다. 생각을 짓지 않는 사람은 삶을 짓지 않습니다. 생각을 지을 수 있기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생각을 지으며 즐겁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생각은 늘 삶으로 이어집니다. 생각으로 삶을 보살핍니다. 생각이 있으니 삶이 언제나 따사로우면서 넉넉합니다.
생각이 없기에 전쟁무기를 만들어 군대를 내세워 평화를 무너뜨립니다. 전쟁무기로는 평화를 이루지 않아요. 전쟁무기로는 전쟁을 하지요. 전쟁무기가 무엇인가요? 전쟁을 하려고 만든 무기입니다. 군대는 어떤 곳인가요? 전쟁을 하려고 만든 모임이에요. 그러니, 전쟁무기와 군대가 있으면 평화하고는 동떨어집니다.
평화를 바라면 평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평화를 바라면 땅을 일구어야 합니다. 땅에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와 기계를 대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먹을 밥을 내 손으로 내 땅에서 얻을 수 있어야 평화입니다. 내가 먹을 밥을 내 손으로 가꾸는 내 땅에서 얻으면서 이웃하고 오순도순 밥잔치를 마련할 때에 평화입니다. 내 밥을 너하고 나누고, 네 밥을 내가 나눌 적에 평화예요.
밥을 나눌 적에 평화입니다만, 어떤 밥을 나누려 하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가꾸고 사랑하는 흙에서 얻는 밥을 나눌 때에 평화입니다. 나와 너는 서로서로 제 삶자리에서 제 흙을 가꾸고 사랑하면서 삶을 지어야 평화를 이룹니다.
.. 당신 손녀의 생각은 우리보다 빠르오. 그 애는 일 년에 천 년을 지으오 … 어린아이한테 질문을 주면 그 애의 생각은 답을 찾기 시작하고 그것으로 점점 더 빨라지지 … 어린아이를 위해 딸랑이나 인형을 만든 사람의 생각의 속도와 다람쥐를 지은 그의 속도에 어떤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보자고 … 사람들은 아이한테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되는지 지적을 하지. 이때 아이들은 사실상 세뇌를 당하는 거야. 자기 스스로는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를 대신해서 이미 모든 게 결정되어 있다고 … “그래, 어미 늑대보다 영리해. 하지만 사람은 항상 더 현명해야 해. 나는 어린 아이를 괴롭히지 않아. 난 그 애한테 제안을 한 거야. 생각을 좀 해 보고 늑대의 생각을 고려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라고 .. (60, 64, 65, 70쪽)
블라지미르 메그레 님이 글로 갈무리한 《삶의 에너지, 아나스타시아 7》(한글샘,2012)을 읽습니다. 여러 차례 읽습니다. 곰곰이 되새기면서 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리거나 나누는 기운은 어디에서 샘솟는가를 가만히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2012년 8월에 나온 책을 곧 다 읽었으나 이태 가까이 책상맡에 둡니다. 《아나스타시아》 첫째 권부터 일곱째 권까지 책상맡에 나란히 꽂아 두고 날마다 쳐다봅니다.
책이름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일곱째 권을 “삶의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옮겼으니, 삶의 에너지란, 삶을 가꾸면서 얻거나 누리거나 빚는 기운입니다. ‘삶기운’이라고 할까요, ‘삶힘’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삶빛’이라고 할까요.
기운이나 힘은 빛에서 나오니 ‘삶빛’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일곱째 권에서는 삶빛을 노래한다고 하겠습니다. 삶을 밝히는 빛이 어디에서 나오고, 삶을 밝히는 빛은 누가 어떻게 가꿀 수 있는가를 들려준다고 하겠어요.
.. 시스템은, 어린이는 물론이고 지금 사는 어른들한테도 온갖 정보를 쏟아부으며 중요한 것처럼 전하지만, 정작, 모든 소식을 전하는 보도의 목적은 사람들이 정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야 … 주목해 봐, 온 세계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정보는 인류의 발전 방향에 대한 주제인 것이야 … 가장 완벽한 인공의 컴퓨터라 할지라도 매일 매시간 온갖 정보로 채운다면 컴퓨터는 결국 더 느리게 작동할 거야 …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생각을 하겠지. 하지만 우리가 고안해낸 조각상 주위에 모여 감사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면 허비할수록 하느님이 지으신 조물과 어울릴 시간은 줄어들 거야. 하느님한테서 직접 나오는 정보로부터 사람들은 점점 더 멀어질 거야 … 의학이란 학문이 완벽하게 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결과가 스스로 답하지. 의학이 완벽하게 하는 건 병이야. 나의 이런 결론이 이상한 것 같지? 스스로 생각해 봐. 수많은 동물이 자연의 상태에서 병이 들지 않는데, 자신을 고등한 존재라 여기는 사람이 왜 자신의 질병 하나 해결하지 못하지? … 현대 삶의 여건에서는 의사들한테 환자가 필요하지 .. (72, 73, 75, 84, 87쪽)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는 사람은 개구리 노랫소리를 생각합니다. 덜컹거리는 전철 소리를 듣는 사람은 전철 소리를 생각합니다. 컴퓨터 웅웅거리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컴퓨터 웅웅거리는 소리를 생각합니다. 바람 따라 볏포기가 눕고 서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볏포기가 바람을 맞으며 눕고 서는 소리를 생각합니다.
다만, 좋고 나쁨은 없습니다. 어느 쪽이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소리일 뿐입니다.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결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잘 알아야 해요. 멸나물을 먹는대서 아픈 데를 고치지 않습니다. 어려운 한자말로 다시 말하자면, 어성초를 먹기에 질병을 고치지 않습니다. 영지버섯을 먹어야 아픈 데가 사라질까요. 산삼을 먹어야 몸이 튼튼할까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빛을 먹어야 몸이 튼튼합니다. 빛을 먹어야 아픈 데가 없습니다.
빛이란 그냥 빛이 아닙니다. 형광등 불빛이 아닙니다. 전기로 밝히는 불빛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밝히는 빛을 먹을 때에 몸이 튼튼합니다. 사랑으로 다스린 빛을 맞아들일 때에 아픈 데가 없습니다.
곧, 삶은 사랑으로 가꾸는 빛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삶은 사랑으로 일구는 빛이 있어서 즐겁습니다.
.. 상상해 봐, 블라지미르. 아침이야. 해가 퍼지기 시작할 무렵 잠에서 깨어 가원의 동산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어. 그곳엔 삼백 가지 이상의 그에게 필요한 식물이 자라고 있어 … 신선한 음식을 먹어야 유익하다고 자네 세상에선 말하지. 그렇담 신선한 음식이란 게 뭐지? … 자연에는 육신의 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식물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왜 우리 곁에 없나? … 가원이란 오아시스를 짓는 데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가원에 에워싸여 있어야 한다. 내 가원의 살아 있는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이웃에 날린 것이고 그곳으로부터 살아 있는 공기가 또 다른 바람을 타고 내 가원으로 날릴 것이다 …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깨어나시오, 생각해 보오 … “아버지, 이거 보세요.” 에직이 말했다. “우리는 헥타르 절반에 궁전이며 온갖 건축물을 지었어요. 그런데 쏘냐의 가원에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 공기가 우리한텐 없어요. 절반을 헐어버려야 해요.” .. (92, 95, 98, 105, 170, 257쪽)
개똥을 약으로 쓰는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개똥이라 하더라도 아픈 사람한테 ‘자, 여기에 가장 놀라운 약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면, 아픈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생각해요. 참말 내 아픈 몸을 낫게 해 주겠구나 하고 생각해요. 생각으로 믿음을 만들지요. 생각으로 만든 믿음을 몸에 심지요. 그러면 몸이 낫습니다.
어떤 것을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풀을 골라서 먹어야 몸이 튼튼해지거나 좋아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생각을 날마다 새롭게 지어서 스스로 빛을 씨앗으로 심을 때에 몸이 튼튼해지거나 좋아집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생각을 짓지 않으면 무슨 씨앗을 심겠어요. 아무 씨앗도 못 심어요.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생각을 지어야 삶이 늘 새롭지요.
새롭게 맞이하는 하루가 고스란히 새로우면서 즐거워요. 새로우면서 즐거운 하루일 때에 언제나 웃으면서 노래해요. 언제나 웃으면서 노래하는 사람은 웃음과 노래로 삶을 가득 채워요. ‘아픔’이나 ‘슬픔’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웃고 노래하는 사람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습니다. 웃지 않고 노래하지 않기에, 겉치레로 웃거나 겉발림으로 노래하기에 자꾸 아프거나 슬픕니다.
.. 서두르면 해가 돼. 우선은 반드시 생각으로 자신의 공간을 지어야 해 … 종교란 특정 유형의 사람을 형성하고 사람이 특정 행동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 끊임없이 싸우는 건 다른 민족들이 아니고, 다른 이데올로기가 민족들을 이용하여 싸우는 것이다 … 기독교가 도래하면서 융성한 국가가 지구상에 하나라도 있었는지 그 이름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로마 제국의 슬픈 운명을 맞은 국가는 여럿 댈 수 있을 것이다 … 온갖 별 볼일 없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도록 권한다. 그런데 정치인이나 기자 혹은 작가 중 누군가가 중요한 테마를 건드리기만 했다가는, 잠시 반짝였다가는 이내 묻혀버린다 … 진실로 신성한 삶이란 지상이 아닌, 어딘가 다른 차원에 있다는 이 교리는 그들이 고안해낸 것이다 … 지난 수천 년간 우리의 관심을 온갖 여러 가지 사건에 집중시켰다.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어디에 멋진 건축물이 지어졌는지, 공후나 황제 중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누가 어떤 권력을 쟁취했는지 얘기해 준다.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 부모들의 문화에 비하면 이것들은 그리 중요할 게 없다 … 나의 멀고도 먼 할머니의 할머니는 토속신앙인이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이해했다. 우주를 알았고 떠오르는 햇빛의 의미를 알았다 .. (124, 132, 133, 142, 151, 157, 168쪽)
개구리가 노래하는 시골자락을 마음에 담기에, 참말 스스로 ‘개구리가 노래하는 시골자락’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살아갑니다. 전쟁무기로 이루는 평화를 마음에 담기에, 참말 스스로 ‘전쟁무기가 가득한 나라에서 거짓스러운 평화 껍데기가 있는 굴레’에 갇힌 채 살아갑니다. 이웃과 오순도순 나누는 사랑을 마음에 담기에, 참말 스스로 ‘어디에서나 이웃과 살가이 만나서 오순도순 나누는 사랑’을 누립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마주해야 합니다. 꾸밈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수수하게 보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모기한테 자꾸 물린다고 생각하기에 자꾸 모기에 물릴 뿐 아니라, 모기한테 물린 자리가 가려워요. 가려우니 긁어요. 긁으니 덧나요. 덧나니 붓고, 붓기가 빠지지 않으니 약을 발라야겠다고 생각해요. 생각이 생각을 낳습니다.
모기가 있건 말건 모기를 쳐다보지 않으면 모기한테 물리지 않아요. 더러 모기가 문다 하더라도 살짝 붓다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모기한테 수없이 물렸다지만 이런 모습을 쳐다보지 않아서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모기한테 물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랑받는 즐거움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기쁨을 생각할 적에, 삶이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꿈을 생각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하루를 생각할 적에, 삶이 환하게 빛납니다.
..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사주가 아니라 우리의 지혜와 가슴의 명에 따르는 우리는 할 수 있다 … 노예제나 멍청한 통치자가 없으니까 국가가 없고 비문명적이란 말인가? … 그 당시 루시에는 베다의 삶의 양식, 문화가 여전히 대세였어. 그때까지 베드루시 사람들한테선 도시가 생겨나지 않았어. 좋은 음식과 기쁨 그리고 가원에 사는 밝은 사람들로 가득한 수많은 마을이 루시를 이루었어 … 알아야 해, 블라지미르, 사랑으로 키운 열매는 자신에게 사랑을 불어넣어 준 사람 그리고 키운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준 사람에게만 복을 줄 수 있어 … 죽음의 공포 아래선 죽음을 부르는 것만이 자랄 수 있다네. 그 모양이 좋아 보인다 해도 말이야 … “그거 타고 나면 그곳 땅에선 오랫동안 아무것도 못 자라.” “왜 안 자라는데?” “온갖 이로운 지렁이며 벌레들이 다 타 죽으니까. 이거 봐, 내가 천막 옆에 모닥불을 피웠는데 이곳에선 아무것도 안 자랐잖아.” .. (185, 187, 189, 191, 193, 248쪽)
누구한테나 스스로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라고 느낍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마을에서 살아가는데, 다 다른 삶이지만 모두 한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느낍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 삶을 지으면, 삶에 빛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이 짓는 삶은, 스스로 웃음과 노래와 춤하고 동떨어집니다. 사랑을 담아 삶을 지으면, 삶에 빛이 있어요. 사랑을 가득 담아 짓는 삶은, 스스로 웃음과 노래와 춤을 누릴 뿐 아니라, 이웃한테 손을 내밀어 함께 웃고 노래하며 춤추는 나날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학교는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책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어른과 아이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신문과 방송이란 무엇이고, 우리들은 신문과 방송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서울 한복판에 주저앉은 채 권력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신문과 방송을 멍하니 쳐다보아야 할까요.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서, 내 삶에서 듣거나 생각할 이야기는 언제나 스스로 풀고 맺어야 할까요.
비가 올 때에는 비를 느낍니다. 눈이 올 때에는 눈을 느낍니다. 바람이 불 때에는 바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스스로 움직여 비와 눈과 바람이 나한테 찾아오도록 삶을 짓습니다. 사랑이 나한테 오기만을 바라지 말고, 사랑을 스스로 지어서, 이 사랑으로 내 삶을 스스로 가꿉니다.
.. 베디즘 시대, 그에 이은 토속신앙 시대에는 망자에 대한 슬픔, 비탄의 축제란 없었다. 축제는 모두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충전해 주고 젊은 세대에게 선조의 지식을 전했다 … 할아버지는 손자를 사과나무에 데려가서 손수 사과나무를 만져도 보고 손자도 사과나무를 쓰다듬었다 … 이 문명에서는 하느님을 믿을 필요가 없었다. 이 문명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았다. 이 문명의 사람들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창조주의 생각을 이해했다. 이 문명의 사람들은 풀, 벌레, 별들의 소명을 알았다 … 일본인들 다수가 시를 쓰고 자연을 소중히 대한다. 일본의 꽃꽂이에 온 세계가 심취한다. 그런데 이 우아한 예술은 일본의 전문 꽃꽂이 예술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본 가정 어디에서나 꽃꽂이를 볼 수 있다. 아이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독특하다. 어린이에게 온전한 자유를 주기 위해 어른들은 최선을 다한다 .. (208, 209, 210, 210쪽)
《아나스타시아》는 이야기책입니다.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꾸민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라,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는 뜻입니다. 삶은 늘 이야기입니다. 삶이기에 언제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삶을 담지 못하면 이야기가 아니고, 삶을 담지 못한 책은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삶을 담지 않고 지식만 담아도 책은 되어요. 이런 책이 이른바 ‘인문책’입니다. ‘역사책’과 ‘문학책’과 ‘종교책’과 ‘학술책’과 ‘과학책’은 이야기를 담지 않고 지식과 정보만 담아서 나오기 일쑤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를 살피려고 인문책을 손에 쥐어요.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녁 스스로 바라거나 뜻한 대로 인문책에서 지식과 정보를 얻습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책에서 ‘이야기를 얻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를 생각하지’도 않고 ‘이야기를 찾지’도 않아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초·중·고등학교 모두 이야기가 없이 입시지옥만 있습니다. 교과서만 있고 졸업장만 있는 학교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학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야기가 없기에 삶이 없고 사랑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없으니 노래나 춤이 없습니다.
예부터 어느 겨레나 이야기로 살았습니다. 논밭에서 일하며 늘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바다에서 일하든 숲에서 나무를 하든 노상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그런데, 문명 사회로 바뀌면서 이야기를 스스로 버립니다. 정치권력이 문명 사회를 앞세우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보금자리를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어 이야기를 스스로 걷어찹니다.
.. 그러니까 당신이 자기 나라 대중의 과거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당신은 더 아름답게 꾸며진 사람의 주거를 볼 수 있지 … 집을 온통 그리고 울타리까지 나무에 레이스 모양의 조각을 사랑으로 장식했어. 집안의 모든 생활용품에 그림을 그려 넣었고 옷을 뜨개질했지 … 온 백성이 창작활동을 했어. 이것이 또한 말해 주는 것은, 온 백성이 풍요 속에 살았다는 거야 … 똑같은 내용의 수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게 아니라, 자신의 분석 능력을 잃고 마는 것이야 …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세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고 그 문제를 풀면 자네가 직접 책을 써 보게 .. (212∼213, 218. 222쪽)
도시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도시에는 문화와 예술이 있을는지 모르나,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노래를 짓고, 스스로 춤을 춥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웃습니다. 텔레비전을 켜고 코미디 방송이나 영화를 보아야 웃지 않아요. 이야기가 있으니 스스로 웃어요. 그리고, 스스로 웁니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 이웃과 나누었고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어요.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지었으니, 이야기도 저절로 지었으며, 사랑을 언제나 스스로 지었지요.
오늘날 사람들을 헤아려 보셔요. 스스로 삶을 짓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사랑을 짓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짓는 사람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하는가요? 우리들은 돈만 벌지 않나요? 우리들은 졸업장이랑 자격증만 거머쥐지 않나요? 우리들은 자가용 손잡이만 붙잡지 않나요? 우리들은 텔레비전과 스마트폰만 바라보지 않나요? 우리들은 시멘트로 지은 아파트에 머물기만 하지 않나요?
아무것도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해와 바람과 비와 흙과 숲을 우리가 스스로 지어야 합니다. 해가 저절로 뜨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아침이 되면 해가 기쁘게 떠오르도록 삶을 지어야 합니다. 바람이 저절로 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바람이 알맞게 불면서 지구별을 포근하게 감싸도록 삶을 지어야 합니다. 비가 아무렇게나 오도록 내팽개치면 안 됩니다. 철마다 비가 알맞게 내려 온 들과 숲과 골짝을 적셔서 내와 가람이 맑게 흐르도록 삶을 지어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푸성귀를 얻지 않아요. 씨앗을 스스로 심어야지요. 그리고 숲을 우리 스스로 가꾸고 흙을 우리 스스로 살찌워야지요. 돈만 벌어서 사다가 먹는 푸성귀나 곡식이나 열매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삶을 지어서 즐기는 밥이 되어야 합니다.
..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어느 한 수형인이 9년을 살다 자유의 몸이 된다 칩시다. 친구가 없습니다. 그의 친구들이란 다 교도소 감방에 있습니다. 그는 가족에 필요치 않습니다. 사회에도 필요없는 존재입니다. 누가 좋은 일에 전과자를 고용하겠습니까? 여러 전문 직종의 실업자들이 넘쳐납니다.” … 교도소장은 자신의 피보호인들이 열광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마음과 흙의 마음 사이에는 분명 무언가 우주적 관계가 존재해. 이 관계가 있으면 사람은 지구별과 조화 속에 있게 되고, 이 관계가 없으면 조화가 없는 거야. 변태가 시작되고 범죄가 증가해.” … “중위, 범죄자들이 이 교도소에서 탈옥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무장한 군인들이 들어 있는 저 감시탑들은 무엇하러 있는 것이오?” “교도소를 외부세계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 위원회 위원들이 놀란 건 녹색의 여러 가지 꽃담장뿐도 아니었다. 여름 풀과 꽃들의 섬세한 향기가 도시의 도로와 사무실 냄새에 찌든 사람들을 행복으로 감쌌던 것이다 .. (265, 284, 289, 290쪽)
삶이 있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이름을 드날리건 안 드날리건 삶이 있는 사람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랑스럽지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스러울 수 없어요. 생각이 있는 사람이 착합니다. 생각을 스스로 세워서 하루를 새롭게 지을 때에 착한 빛이 흐릅니다. 착한 빛은 나부터 살리면서 이웃 모두를 살립니다. 내가 나부터 착한 빛이 되어 서로를 살리듯, 모든 사람이 저마다 이녁부터 착한 빛이 되어 다 같이 살릴 때에, 비로소 지구별이 환하게 빛납니다. 지구별은 환하게 빛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요. 울퉁불퉁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 지구별인데, 이렇게 아파 하는 지구별은 지구사람 모두 슬기로운 빛으로 거듭나서 아름다운 삶을 스스로 지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휘둘리는 노예 얼거리가 아닌, 남이 가는 대로 넋 없이 따라가는 쳇바퀴 틀거리가 아닌, 나 스스로 삶을 짓는 몸짓일 때에 즐겁습니다. 스스로 삶을 짓는 하루일 때에 노래합니다.
.. 지금 의원들은 백성들로부터 유리된 채, 자기의 집무실 그리고 회의에서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어. 지금은 좋은 법을 만든다고 고마움을, 나쁜 법을 만든다고 욕을 먹지 않아 … 위대한 철학자의 머리에서 위대한 사상이 태동한 건, 홀로 떨어진 상황에서지 공개석상의 발표 순간이 아니야 .. (308, 309쪽)
생각과 삶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생각과 삶과 사랑은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책과 빛과 숲은 하나입니다. 책과 빛과 숲은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과 바람과 넋은 하나입니다. 사람과 바람과 넋은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서울 한복판 시끌벅적한 곳에서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노랫가락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스스로 ‘바라볼’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서울 한복판 자동차가 넘치는 그곳에서 무엇을 짓습니까. 무엇을 짓는 사람들입니까.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는 인문학은 무엇입니까.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는 동화와 동시와 어른문학은 무엇입니까.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는 문화와 예술과 교육과 정치는 무엇입니까.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는 언론과 경제와 과학은 무엇입니까.
한 가지 보기만 든다면, 다산 정약용 같은 사람은 서울 한복판에서 ‘빛을 바라본 뒤 빛을 삶으로 담아 빛을 이야기로 엮지’ 않았습니다.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졌다고 할 만한 시골자락에 깃든 뒤에 비로소 ‘빛을 바라보고 빛을 삶으로 담으며 빛을 이야기로 엮는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산 정약용 같은 ‘슬기사람’이 나타나지 못하는 까닭을 사람들이 스스로 바라보아 느끼고 깨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서울에서도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어요. 스스로 하루 내내 온마음을 쏟아 가장 아름다운 숨결로 가장 사랑스러운 삶을 짓는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늘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 생각할 때에 삶이 되고, 삶을 지을 때에 사랑이 되며, 사랑을 나눌 때에 생각이 자랍니다. 4347.7.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