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30. 말넋을 거스르는 네 가지 ㄴ
― ‘-的’을 떨구어야 한다
말은 그저 말이기도 하기에, 말은 말대로 쓰면서, 말에 어떤 마음을 담느냐를 살필 수 있으면, ‘수수한 말’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곱 살 어린이하고 어떤 말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느냐, 일흔 살 할머니하고 어떤 말로 이야기꽃을 피우려 하느냐, 하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웬만한 문학책과 인문책은 거의 ‘읽을 값어치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하게 쓰는 인문책이 드물고, 아이들이 배울 만한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펼치는 문학책이 드뭅니다. 일흔 살 할머니나 여든 살 할아버지가 알아듣도록 쓰는 인문책은 없다시피 하며, 아흔 살 할머니나 백 살 할아버지가 한국말을 새롭게 배우도록 북돋우는 문학책은 아예 없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항상(恒常)’이라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그림책에 이 한자말이 나오면 연필로 죽죽 그은 뒤 ‘늘’이나 ‘언제나’ 같은 한국말을 적어 넣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항상’을 찾으면 낱말풀이를 “언제나 변함없이”로 달아요. 그러니까, 한국말사전을 엮은 이들도 ‘항상 = 언제나’인 줄 안다는 뜻이고, 이 한자말은 쓸 만하지 않다고 밝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말사전은 얄궂습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언제나’를 찾으면 “때에 따라 달라짐이 없이 항상”으로 풀이해요. ‘항상 = 언제나’로 풀이하면서 ‘언제나 = 항상’으로 풀이하는 셈입니다.
이와 같은 돌림풀이를 깨닫는 한국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러한 돌림풀이가 엉터리인 줄 알아차리면서 한국말을 새롭게 가꾸거나 돌보면서 빛내야겠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람은 몇이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늘·언제나·노상’ 같은 한국말을 씁니다. 때로는 ‘한결같이’를 씁니다. 이 낱말은 저마다 뜻과 느낌이 살짝 다릅니다. 이러한 낱말을 혀에 얹어서 읊으면, 이 낱말은 어느새 가락을 입고 노래로 거듭납니다. 낱말 한 마디가 새롭게 살아나면서 환하게 타오르는 해님처럼 따스합니다.
둘레에서 이웃들이 ‘항상’ 같은 낱말을 쓰면, 내 귀로 이 낱말이 들어오며 곧바로 ‘늘’이나 ‘언제나’로 바뀝니다. 다만, 내 귀와 머리와 마음은 늘 ‘옮기기(번역)’를 하지만, 이웃한테 “그런 말을 쓰기보다 이런 말을 써야 뜻과 느낌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어요” 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웃은 이웃 나름대로 그 낱말에 이녁 뜻과 느낌을 담았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웃이 스스로 이녁 말을 다시 바라보면서 다시 가다듬고 다시 생각해서 말빛과 말숨을 살찌우려고 해야 비로소 말을 바꿉니다. 남이 바꾸어 줄 수 없습니다.
‘읽을 값어치가 있는 글’이란 무엇일까 헤아려 봅니다. 함부로 말할 대목은 아니라 할 텐데, ‘말이 왜 말이고, 우리가 말을 왜 쓰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또한 말이 말답게 설 수 있도록 해야, 비로소 이야기를 담으면서 수수한 말이 됩니다.
그러면 왜 수수한 말을 찾거나 생각해야 할까요. 햇볕과 같은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바람과 같은 말이 수수한 말입니다. 빗물과 같으며, 풀과 같은 말이 바로 수수한 말입니다. 해가 떠서 온누리를 비출 적에 ‘대단하구나!’ 하고 느낄 사람도 틀림없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날마다 아침에 해가 뜨는 일을 아주 마땅히 받아들입니다. 아니, 굳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바람을 마시는데, 바람을 마시면서 ‘아 내가 숨을 쉬지’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초라도 새 바람을 안 마시면 모두 죽는 몸이지만, 1초라도 숨을 쉬는 줄 생각하지 않아요. 바람은 그만큼 수수하면서 마땅한 빛입니다. 빗물과 풀과 나무와 숲도 이와 같아요. 이들은 모두 아주 대단하고 대수롭지만, 우리가 따로 더 깊거나 넓게 생각하거나 따지지 않아요. 그야말로 수수하면서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해와 같고 바람과 같이 수수하다 싶은 말을 제대로 보면서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가슴에 담아 제대로 입으로 꺼내거나 제대로 손으로 옮길 수 있을 때에, 말빛이 환합니다. 풀이나 나무와 같이 수수하면서 늘 우리와 함께 있는 말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깨달아 마음에 씨앗으로 심을 때에, 말숨이 싱그럽습니다.
심우성 님이 한국말로 옮긴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1996)라는 책을 읽는데 첫머리에 “일제의 식민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간접으로 동조한 것이라는 의견”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글에서는 ‘-적(的)’을 안 붙이고 ‘간접으로’라 적습니다. 생각해 볼까요. 이 글에서 ‘간접적으로’라 적으면 얼마나 다를까요. ‘간접으로’와 ‘간접적으로’는 서로 얼마나 다를까요. 우리는 왜 굳이 ‘-적’을 붙이려 할까요.
이 글을 더 살핀다면, “일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살며시 뜻을 같이했다는 생각”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간접으로 동조한”은 “살며시 동조한”이나 “여러모로 동조한”이나 “옆에서 동조한”으로 손볼 만합니다. 이렇게 ‘간접(間接)’을 손질할 때에는 ‘-적’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소모적(消耗的)인 논쟁”은 무엇일까요. 이런 한자말을 꼭 써야 할까요. 처음에 “부질없는 말다툼”이나 “덧없는 말씨름”이나 “쓸데없는 말싸움”처럼 글을 쓰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생각”이라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나 “낡은 생각”이나 “시대를 거스르는 생각”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적’을 붙이는 한자말은 모두 손질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적’을 붙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적’이 들러붙지 않도록 처음부터 아주 오롯하다 싶은 한국말을 제대로 살펴서 쓸 일이에요. “향토적 서정”이 아닌 “고향빛”이나 “시골 느낌”을 말하면 되고, “정적인 놀이”가 아닌 “차분한 놀이”나 “조용한 놀이”나 “얌전한 놀이”를 말하면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닌 “손꼽히는 것”이나 “뛰어난 것”을 말하면 돼요.
‘-적’을 붙일 적에 말넋을 거스르는 줄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온누리 모든 사람이 넋을 거스르거나 흐트리는 낱말이 아닌, 넋을 살찌우거나 곱게 가꾸는 낱말을 쓰기를 빌어요. 늘,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 마음을 아름답게 보살피면서 생각을 튼튼하게 북돋우는 말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4347.6.2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