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나무와 함께
자리공이라는 풀이 있습니다. 자리공이라는 풀은 나무처럼 쑥쑥 자랍니다. 어쩌면, 자리공은 나무라고도 할 만합니다. 유월에 만난 자리공‘풀’은 어른인 제 키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자리공‘풀’ 앞에 서면 그야말로 작습니다. 제법 자란 나무와 같은 키입니다.
자리공이라는 풀은 언제부터 이 땅에서 살았을까요. 자리공이라는 풀 가운데 ‘미국자리공’은 왜 이 나라에 들어와서 들과 숲에 퍼질까요.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이 나라가 아름답다면 자리공이라는 풀은 이 땅에서 자랄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아름답게 지으면 자리공이라는 풀은 더 퍼질 수 없습니다.
자리공을 베거나 뿌리를 뽑는다고 해서 이 풀이 안 나지 않습니다. 자리공을 불사르거나 농약을 뿌린대서 이 풀이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리공은 ‘제 힘과 빛을 잃어 망가진 흙’ 을 삶터로 삼아서 돋거든요. 제 힘을 못 내는 흙인데 자리공이 돋았대서 뽑는들 사라지지 않아요. 이를테면, 제 빛을 잃은 흙에서 돋는 달걀꽃(또는 개망초)을 아무리 뽑는들 달걀꽃이 안 돋지 않습니다. 제 힘이 사라진 메마른 흙에서 돋는 쇠비름을 아무리 걷어낸들 쇠비름이 안 돋지 않아요.
이제 우리들은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리공이 돋은 까닭은 따로 있으니, 왜 자리공이 돋는지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자리공은 흙이 망가진 곳, ‘어려운 말’로 하자면 생태계 균형이 무너진 곳에서 돋습니다. 막개발과 도시문명을 일으킨다면서 흙과 물과 풀과 나무를 더럽히거나 들쑤시기에 자리공 같은 풀이 들어와서 돋습니다. 이 나라 흙과 물과 풀과 나무가 정갈하거나 아름답다면, 제아무리 이웃나라에서 자리공 씨앗이 훨훨 날거나 새똥을 타고 들어온다 한들 뿌리조차 내리지 못해요.
풀을 제대로 보고, 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풀을 제대로 볼 때에, 풀을 제대로 압니다. 풀을 제대로 보면서 알 때에는 흙을 제대로 보면서 알 수 있어요. 풀과 흙을 제대로 보면서 안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을 어떻게 가꿀 때에 환하게 빛나는가를 스스로 깨달을 만합니다.
1970년부터 이 땅에 몰아닥친 ‘새마을운동’이 있어요. 새마을운동은 이 나라 삶터를 와장창 무너뜨렸습니다. 수천 해뿐 아니라 수만 해를 이은 아름다운 ‘풀 지붕’을 없앤 새마을운동입니다. 수천 해뿐 아니라 수만 해에 걸쳐(아마 수억 해나 수조 해에 걸쳐) 이 땅에는 쓰레기가 없었지만, 새마을운동은 고작 하루만에 쓰레기를 만들었습니다. 풀로 이은 지붕을 석면(슬레트)으로 갈아치우도록 하면서, 이 석면이 엄청난 쓰레기가 됩니다. 스스로 돋은 뒤 시들어 죽는 풀을 거름으로 삼던 시골 흙일이었으나, 시골에 농약과 비료를 쓰도록 내몰면서, 엄청난 농약병과 비료푸대를 쓰레기로 만들었고, 농약과 비료로 흙을 망가뜨렸습니다. 농기계를 시골마다 쓰도록 들볶으면서 ‘낡거나 망가진 농기계’가 시골마다 쓰레기로 남습니다. ‘박’으로 쓰던 바가지와 ‘풀잎’으로 엮던 바구니가 아닌 ‘플라스틱’으로 척척 찍은 바가지와 바구니와 온갖 그릇을 시골에서 쓰도록 들볶으면서, 시골은 온통 쓰레기밭으로 바뀝니다. 여기에다가 밭두둑마다 비닐을 덮어씌우도록 떠밀어 비닐쓰레기무덤과 비닐쓰레기언덕을 만들었어요. 새마을운동 깃발은 아직도 온 나라에서 펄럭입니다. 새마을운동을 똑바로 볼 줄 모른다면, 이 나라가 자꾸 망가지거나 무너지면서 자리공 같은 풀이 자꾸 돋는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을 뿐입니다.
로렌스 스펜서라는 분이 엮은 《외계인 인터뷰》(아이커넥,2013)라는 책을 읽으면서 새마을운동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1970년대뿐 아니라 2010년대에도 멈추지 않는 새마을운동이 한국 사회를 꽁꽁 틀어막으면서 사람들 머리를 뒤흔듭니다. 사람들은 참거짓을 옳게 바라보지 못할 뿐 아니라, 제도권 틀에서 마치 노예처럼 길들기까지 합니다. 총리 후보가 된 사람은 일제강점기를 ‘식민지 제국주의자’와 같은 눈길로 보면서 막말을 퍼붓고, 교육부장관 후보가 된 사람은 이녁 후배가 쓴 논문을 훔쳐서 목돈을 가로채기도 했답니다.
이런 일이 왜 자꾸 잇달을까요. 사람들 스스로 참거짓을 안 보기 때문이요, 참거짓 앞에서 참길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력자와 지도자와 지식인만 탓할 수 있지 않아요.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거스르면서 참삶을 지키려 했다면, 새마을운동 깃발이 나부낄 때에도 석면(슬레트) 지붕을 거스를 뿐 아니라 농약과 비료와 비닐을 거스르면서 흙이 참빛으로 밝도록 해야 맞습니다.
“나는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를 안전하게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내 임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나는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불멸의 영적 존재들의 안위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당신에게 제공할 것이고, 그것은 지구 환경과 모든 무수한 생명체의 생존을 도와줄 것입니다(96쪽).” 같은 대목을 읽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생각을 가슴에 품는가요? 지구별을 지키거나 아름답게 가꾸려는 생각을 품는가요? 돈만 많이 벌려는 생각을 품는가요? 경제개발은 지구별과 한국을 아름답게 북돋울까요? 핵발전소를 왜 아직도 안 멈추고, 밀양 같은 곳을 왜 송전탑으로 자꾸 괴롭힐까요?
“사실상 물질은 퇴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물질은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절대로 파괴되지 않습니다(111쪽).” 같은 대목을 읽습니다. 그렇지요. 물질은 없어지지 않아요. 늘 그대로 있어요. 우리가 쓰레기를 만들면 이 땅은 온통 쓰레기투성이가 돼요. 우리가 사랑을 지으면 이 땅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해요. 우리가 이 나라에 숲을 가꾸면서 돌보면,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도 푸른 바람이 불면서 새와 풀벌레가 싱그럽게 노래할 테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까르르 웃고 어깨동무하는 삶을 이룹니다.
똥을 눌 적에 잘 보셔요. 바라보셔요. 고기를 먹은 날은 똥에서 고기 냄새가 나요. 풀을 먹은 날은 똥에서 풀 냄새가 나요. 꽃을 먹으면? 꽃을 먹으면 참말 똥에서 꽃빛과 꽃내음 그득 흘러요. 밥은 늘 우리 몸을 이루는 빛이면서 숨결이에요.
“그 이전에 제작된 어떤 생명체도 외부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햇빛, 무기질, 식물성 물질만을 소비했지 음식으로 다른 동물을 먹는 일은 없었습니다(195쪽).” 같은 대목을 읽다가 책을 가만히 덮습니다. 우리가 해와 바람으로 넉넉히 우리 목숨을 건사할 수 있다면 우리 몸이 어떻게 될는지 그려 봅니다. 아, 바람을 먹고 산다면 우리는 바람이 되어 훨훨 하늘을 날겠네요. 해를 먹고 산다면 우리는 해가 되어 언제나 따스한 넋이 되겠네요. 나무와 함께 살며 나무를 닮고 나무처럼 우뚝 서는 숨결이라면, 우리는 늘 아름답고 푸르면서 사랑스러운 ‘참사람’이 되겠네요. 4347.6.1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