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귀 책읽기



  ‘사마귀’라 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숲과 풀에서 살아가는 목숨인 사마귀가 있어요. 둘째, 사람 몸에 돋는 사마귀가 있어요. 나는 어릴 적부터 나도 잘 모르게 사마귀를 늘 떠올렸고 마음에 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모릅니다. 다만, 느낌과 마음으로 늘 사마귀가 함께였어요.


  내 동무들은 개미를 쳐다보며 몇 시간이고 쪼그려앉아서 노는데, 그러니까 서너 살 적이든 예닐곱 살이든 아홉 살이나 열 살이든 이러했는데, 나는 사마귀를 볼 적에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보냅니다. 사마귀를 찍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나한테 사마귀가 아주 대단하게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스물다섯 살 즈음이지 싶은데, 내 오른손등에 ‘사마귀’가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였는데, 왜 내 손등에 사마귀가 생겼나 하고 자주 들여다보니 어느새 둘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셋이 되었고, 한 해쯤 지날 무렵 일곱이 되고, 서른이 되며, 삼백이 되었어요.


  내 오른손등에 돋은 사마귀는 자꾸 번집니다. 내가 자꾸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들여다보다가 간지럽다고 여겨 긁어서 떼어내려 하니, 이튿날 곱배기로 늘어나고, 어느 날에는 아침에 긁어낸 사마귀가 두 시간쯤 뒤에 짠 하고 다시 태어납니다.


  나는 이태 반을 오른손등과 왼손등에 달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이 사마귀는 왼어깨와 오른어깨로도 퍼졌고, 왼발등과 오른발등으로까지 뻗었어요. 이러다가 얼굴까지 사마귀가 번질까 하고 걱정하니, 참말 얼굴에도 사마귀가 하나 돋았어요.


  이때에 나는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할까요?


  사마귀로 이태 반을 애먹던 어느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내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고는 옷을 모두 벗었습니다. 팔을 벌리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온몸에 퍼지는 가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숫자를 세었어요. 하나 둘 셋 넷, 처음에는 1초만, 다음에는 10초만, 그런 뒤에 60초만, 이렇게 숫자를 세었어요.


  벌거벗은 몸으로 한 시간쯤 사마귀 간지러움을 참으니, 어느새 사마귀가 더 퍼지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발등에 돋은 사마귀가 사라졌어요. 그 다음 날에는 어깨에 돋은 사마귀가 사라졌어요. 이레째 되니 왼손등 사마귀가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오른손등을 가득 채우고 손톱 밑까지 퍼졌던 사마귀까지 눈에 띄게 사라졌고, 아침과 낮과 저녁 사이에도 줄어드는 모습을 보았어요. 다시 말하자면, ‘사마귀가 줄어든다’고 느끼고 보고 받아들이는 동안 사마귀는 아주 빠르게 사라져서, 꼭 이레를 지나 여드레를 맞이한 때에 오른손등에는 사마귀가 일곱 남았고, 다음날 셋이 되었어요.


  오른손등에 남은 사마귀 셋은 여러 달 남았습니다. 거의 다 사라졌으나, 마지막 세 톨을 놓고, ‘아쉬움’을 생각했어요. 여러 달 뒤 비로소 ‘아쉬움’을 내려놓았고, 내가 볼 것은 내 손등에 돋음 사마귀가 아니라 내 삶인 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 손등에 사마귀가 돋는 줄 쳐다보면서 삶을 아파하거나 괴롭게 여겨야 할 노릇이 아니라, 내 삶을 바라보면서 내 사랑을 찾아야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놀랄 사람은 놀라겠지만, 안 놀랄 사람은 안 놀라리라 느껴요. 내 오른손등에서 사마귀가 모두 사라진 이튿날에, 두 아이를 함께 낳고 돌보며 살아가는 곁님이 나한테 왔습니다. 그리고, 내 곁님이 나한테 온 뒤, 나는 ‘내 삶’을 살짝 엿보기만 할 뿐, ‘보기’로 좀처럼 가지 못했는데, 이제 차근차근 ‘엿보기’가 아닌 ‘보기’로, 내 삶을 스스로 엿보는 마음이 아닌, 내 삶을 그대로 보는 마음으로 갈 때에 내가 나답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요.


  여드름을 없애는 길은 하나예요. 여드름 약이나 수술이 아니에요. 여드름을 안 보아야 여드름이 사라져요. 여드름을 안 보고 안 생각하며 안 건드려야 여드름이 사라져요. 독재정권이 어떻게 사라질까요? 독재정권을 안 보고 안 생각하고 안 건드리면 독재정권은 스스로 사라져요.


  못 믿겠으면 생각해 보면 돼요. 시골에는 ㅈㅈㄷ이라는 신문이 없어요. 왜 없을까요? 시골사람 어느 누구도 ㅈㅈㄷ을 안 보고 안 생각하고 안 건드리기 때문에 ㅈㅈㄷ은 시골에 없어요. 시골에서는 참말 아무도 ㅈㅈㄷ을 말하지 않아요. 시골에서는 ㅈㅈㄷ을 칭찬하지도 않고 비판하지도 않아요. 시골에서는 ㅈㅈㄷ은 이 지구별에 ‘아예 없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ㅈㅈㄷ은 쓰레기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ㅈㅈㄷ은 커다란 도시에서만, 그리고 서울이나 부산 같은 곳에서만 크게 힘을 떨쳐요. ㅈㅈㄷ이라는 신문이 전남 고흥 같은 시골에서 힘을 떨칠까요? 웃기지 말라고 하셔요. 참말 웃기지도 않지요. ㅈㅈㄷ 가운데 전남 고흥이나 장흥이나 벌교에서 힘을 떨치는 일이 있겠습니까? 아예 없어요. ㅈㅈㄷ은 시골에서 힘도 없지만, ㅈㅈㄷ 기자가 시골에 온들 어떠한 힘도 못 써요. ㅈㅈㄷ 기자들은 시골에 취재하러 와도 늘 ‘문전박대’가 아닌 ‘안 쳐다보는 무시’를 받으니, ‘없는 사람 대접’을 받으니, 아예 시골에는 갈 생각을 안 해요. ㅈㅈㄷ은 오로지 도시에서만 온갖 불춤을 추려고 하지요.


  더 생각해 보셔요. 삼성이든 에스케이이든 엘지이든, 전기를 안 쓰고 조용히 흙을 일구는 시골사람한테 영향을 끼칠 수 없어요. 어떠한 대재벌이나 권력자나 군인이나 정치가라 하더라도, 전기도 책도 가까이 않는 시골사람을 건드리지 못해요. 전기도 책도 가까이 않는 시골사람은 재벌 우두머리이건 대통령이건 군인이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도 이와 같은 눈길과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어요.


  함께 하면 돼요. 함께 ‘볼 것’을 보면서 살면 모두 돼요. 그러나, 스스로 볼 것을 보려 하지 않으면 늘 뒤틀리기 마련이에요.


  내 손등에 돋은 사마귀가 모두 사라지고 나서, 나는 곁님과 두 아이하고 시골에서 살림을 가꾸며, 언제나 풀밭 사마귀를 봅니다. 풀사마귀를 보고, 풀사마귀를 노래하며, 풀사마귀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삶을 사랑하려는 길을 꿈으로 품습니다. 4347.6.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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