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28) 존재 128 : 사진가의 존재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의 존재

《이자와 고타로/고성미 옮김-사진을 즐기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2009) 41쪽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의 존재

→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자리

→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얼굴

→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모습

 …


  이 짧은 보기글을 살피면 한자말 ‘존재’를 넣으며 “사진가의 존재”라고 적지만, 첫 대목은 “사진 뒤에 있는”으로 적습니다. “사진 이면(裏面)에 위치(位置)하는”이나 “사진 배후(背後)를 점(占)하는”처럼 적지 않았습니다.


  짧은 글월 앞뒤를 모두 얄궂게 적바림하지 않았으니 반갑다고 해야 할는지, 또는 짧은 글월 한켠을 얄궂게 적바림했으니 안타깝다고 해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마음을 기울였으면 알차고 싱그럽고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었으리라 느낍니다만, 살짝이나마 마음을 쏟아서 한쪽은 알맞고 반갑고 고맙다고 느낍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이 짧은 보기글 앞에서는 ‘있는’을 말하고 뒤에서는 ‘존재’를 말합니다.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을 앞뒤에 잇달아 넣은 셈입니다.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의 있음”이나 “사진 뒤에 존재하는 사진가의 존재”인 꼴입니다. 이 글을 적은 이는 뒤쪽에 ‘존재’를 넣었으나, 일본말을 한국말로 옮길 때에는 ‘존재’가 아닌 ‘자리’나 ‘얼굴’이나 ‘모습’이어야 잘 어울립니다. 아니면, ‘이야기’나 ‘삶’이나 ‘발자국’이나 ‘발자취’나 ‘그림자’나 ‘그늘’을 넣어야 알맞습니다.


  어쩌면, “사진 뒤에 선 사진가”처럼 더 단출하게 끊어야 옳은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사진 뒤에 숨은 사진가”나 “사진 뒤에서 기다리는 사진가”나 “사진 뒤에 웅크리는 사진가”나 “사진 뒤에서 빙긋 웃는 사진가”처럼 느낌을 풀어내거나 알맞춤한 꾸밈말을 넣어야 바른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이야기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발자국

 사진 뒤에 있는 사진가 그림자

 …


  한자말 ‘존재’를 쓴 발자국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어느 낱말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동안 쓴 발자국이 짧다 하여도 사람들이 널리 쓰면 두루 받아들여 즐거이 쓰는 일이 나쁘지 않습니다. 이 낱말이 토박이말이든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딱히 금을 그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이요 생각있는 사람이라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두루두루 쓰는 낱말이라 할지라도 ‘나한테까지 이 낱말이 두루두루 쓸 만한가’를 살피는 눈길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루고루 쓴다고 해서 나까지 쓸 까닭이 없다’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씀씀이와 내 말매무새에 걸맞는가’를 짚어야 합니다.


  모든 말은 알맞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어설프거나 엉터리로 써야 할 말이 아닙니다. 모든 글은 슬기롭고 아름답게 써야 합니다. 얼렁뚱땅 쓰거나 짓궂게 쓸 글이 아닙니다.


  삶이 아름답고 알맞고 알차면서 생각이 아름답고 알맞고 알찬 길로 접어듭니다. 좋은 일도 싫은 일도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모두 삶입니다. 어느 하나 삶이 아닌 적이 없으며, 어떠한 좋은 일과 궂은 일도 내 삶자리에서 안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아름다움이요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아름다움입니다. 어떻게 보면 얄딱구리하게 적바림하고 마는 말마디조차 ‘내 깜냥껏 아름다이 쓴 말’이라 둘러댈 수 있을 텐데, 참말 이렇게 둘러대어야 하는지 조용히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힘과 마음과 슬기와 깜냥을 빛내며 우리 삶을 일구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온갖 넋과 기운과 솜씨와 땀을 바치며 우리 생각을 가꾸는지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깊은 얼과 뜻과 사랑과 손길을 담아 우리 말글을 이루어 가는지 톺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만큼 애쓰는가요요. 우리는 얼마나 힘쓰는가요. 우리는 어찌어찌 마음쓰는지요.


 사진 뒤에 드리운 사진가 모습

 사진 뒤에 숨은 사진가 얼굴

 사진 뒤에 놓인 사진가 자리

 사진 뒤에 남긴 사진가 발자국

 사진 뒤에 묻힌 사진가 이야기

 …


  정치를 하는 사람은 옳게 정치를 해야 합니다. 골목동네 구멍가게 할배는 구멍가게 살림을 옳게 꾸려야 합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옳게 문학을 해야 합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은 버스를 옳게 몰아야 합니다. 지식을 다루는 교사나 교수나 기자나 지식인은 지식을 옳게 다루어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아이를 옳게 키워야 합니다.


  저마다 제자리에서 제길을 아름답게 걸어야 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나한테 주어진 한 번 있는 삶은 아름답게 걸어야 아름답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누가 밀어붙여서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모든 얼굴과 매무새와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이 모두 아름답고, 곯아떨어진 몸뚱이와 땀흘리는 몸뚱이가 모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말은 삶입니다. 삶을 어지럽히는 얄딱구리한 걸림돌에 가로막히면 내 말 또한 얄딱구리한 걸림돌한테 늘 가로막히면서 내 뜻과 사랑을 내 말마디로 풀어내지 못할밖에 없습니다. 4342.1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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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뒤에 있는 사진가 모습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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