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말을 읽는 책읽기



  시골에서는 이제 너나없이 농약과 비료를 듬뿍 쓴다. 시골에서는 이제 너도나도 텔레비전으로 날씨를 살핀다. 시골에서는 이제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 여기고, 시골에서 흙을 만지고 살아가면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오는 사람을 보면, 시골에서는 이제 돈 좀 번 사람으로 보거나 어디 아픈 사람으로 보거나 어디 머리가 돈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오는 사람이 농약하고 비료를 안 쓴다고 하면, 그야말로 미친 놈이 시골을 망가뜨리려고 뻘짓을 한다고 여긴다.


  시골에서는 이제 슬기로운 사람을 만나기 몹시 어렵다. 농약과 비료를 쓰는 시골 할배와 할매는 이제 풀을 모른다. 풀이름을 모르고, 풀마다 어느 때와 곳에 알맞게 쓰는가를 모른다. 이런 흐름은 새마을운동 무렵부터 퍼졌다. 새마을운동을 일으킨 독재자는 시골사람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도록 해서 공장 일꾼으로 값싸게 부리려 했다. 깊은 두멧자락마다 학교를 빽빽하게 지은 까닭은, 시골내기한테 ‘도시에서 살아갈 기초 소양교육’을 시키면서 ‘시골은 나쁘고 도시는 좋다’는 제도권교육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하루 빨리 도시로 가도록 부추기려는 뜻이었다. 국민학교만 마치면 공장에 집어넣거나 버스 차장을 시키거나 애보개나 밥어미를 시키려는 뜻이었다.


  지난날에는 책도 방송도 신문도 모를 뿐 아니라 글조차 모르던 시골내기가 하늘과 바람과 흙과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를 살피면서 날씨를 읽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스스로 물때를 살폈고 물고기 흐름을 읽었다. 지난날 사람들은 전파탐지기가 아니라 마음으로 물고기를 알았다. 지난날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슬기로운 길을 스스로 깨우쳤고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았으며 동무하고 나누었다.


  지난날에는 밥과 집과 옷을 누구나 스스로 지었다. 지난날 사람은 도면을 그리지 않았고 설계를 하지 않았다.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흘렀다. 줄을 긋지 않고도 어긋나지 않게 톱질을 했고, 치수를 따지지 않아도 기둥과 들보를 척척 맞추면서 뼈대를 이루었다.


  예부터 시골내기는 대통령 이름이든 임금 이름이든 학자 이름이든 하나도 알지 않았다. 알 까닭이 없으며 알아야 할 보람이 없다. 예부터 시골내기는 풀과 꽃과 나무한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예부터 시골내기는 물고기와 벌레와 새한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곰한테 곰이라는 이름, 여우한테 여우라는 이름, 범한테 범이라는 이름, 토끼한테 토끼라는 이름, 이런 이름을 모두 시골내기가 붙였다. 꾀꼬리는 왜 꾀꼬리이고 소쩍새는 왜 소쩍새이며 참새는 왜 참새일까. 시골에서 살면 스스로 알 수 있다. 다만, 생각 없이 살면서 방송과 책과 신문에 기댄다든지, 생각을 길어올리지 않고 농약과 비료에 얽매인다면, 제비가 왜 제비인가를 알 길이 없다.


  빼어난 지식인이나 사회운동가 몇 사람이 있어야 참모습을 꿰뚫어보지 않는다. 훌륭한 방송인이나 기자 몇 사람이 있어야 거짓모습을 알아채지 않는다. 참모습을 알아보려는 마음이라면 누구나 참모습을 알아본다. 거짓모습에 휘둘리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짓모습에 휘둘린다.


  오늘날 시골에서, 작은 마을을 돌며 유세를 하는 군수 후보나 군의원 후보는 참말 얼굴만 봐도 이이가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잘 알 만하다. 억지로 굽신거리는지 참말 허리를 숙이며 이야기를 귀여겨들으려 하는지 환히 드러난다.


  몇 가지 방송이나 신문이나 책에 참모습이 깃들지 않는다. 참모습을 살짝 건드릴 뿐이다. 참모습은 언제나 우리 가슴에 있다. 참모습은 햇볕과 빗물과 바람과 흙과 풀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가슴에 있다. 참모습을 알고 싶으면 눈을 뜨고 해를 마주할 노릇이다. 거짓모습에 사로잡히고 싶다면 눈을 감고 해와 등지면 된다.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끄고, 책도 신문도 덮을 때에, 시나브로 참빛이 우리 가슴으로 곱다라니 스며들 수 있다. 4347.4.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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