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 50. 물이 흐른다


  어느 시골이든 샘터나 우물터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햇볕과 바람과 물과 흙과 풀이 있어야 해요. 이 다섯 가지가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다른 목숨도 이 다섯 가지가 없으면 죽습니다. 햇볕이 없으면 지구별은 꽁꽁 얼어붙으니 어떤 목숨도 살지 못해요. 바람이 없으면 아무도 숨을 쉴 수 없으니 어떤 목숨도 살 수 없습니다. 비가 오거나 냇물이 흐르거나 샘이 솟지 않으면 모든 목숨은 메말라 죽습니다. 흙이 있어야 발을 디디면서 살아가고, 흙에서 풀이 돋아 모든 목숨이 밥을 얻어요. 이 다섯 가지를 바탕으로 다른 여러 가지가 태어나요. 흙과 풀이 있는 곳에서 나무가 자라고, 나무는 우리한테 집이 되면서 열매를 줍니다. 나무는 드센 바람을 가려 줄 뿐 아니라, 나무를 잘라 배를 무어 고기잡이를 하거나 냇물을 건넙니다. 나무로 낫자루나 지게를 만들어요. 옷장을 짜고 책걸상을 만듭니다. 나무가 있은 뒤에 돌과 쇠를 얻어 낫날이나 호미날이나 쟁기날로 삼지요. 돌은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되고,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누름돌이 되며, 마루로 올라서는 섬돌이 됩니다.

  도시가 생기고 댐을 지으면서 시골이 물에 잠깁니다. 도시에서는 샘터나 우물터가 없어도 수도를 이어 수돗물을 마십니다. 도시는 햇볕이 들지 않아도 지하상가나 건물에서 전깃불을 켭니다. 도시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과 발전소 전자파와 방사능이 춤추어도 환풍기를 쓰고 정화기를 씁니다. 도시에는 흙도 풀도 나무도 없으나 시골에서 먹을거리를 사들이고, 시골에서 키운 꽃과 나무를 사다가 심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는 한 달에 두 차례쯤 마을 샘터이자 빨래터를 치웁니다. 예전에는 모든 마을사람이 이곳에서 물을 긷고 아이를 씻기며 빨래를 했으나, 이제는 집집마다 땅을 파서 골짝물을 쓰니 샘터이자 빨래터에는 물이끼가 잔뜩 낍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아무도 안 쓰는 샘터이자 빨래터는 나그네나 길손이 지나가다 들여다보면 볼썽사납대서 예전부터 마을 할매들이 틈틈이 치우셨어요.

  마을에 샘터와 빨래터가 있어도 이곳에서 물을 긷거나 빨래하는 사람이 죄 사라진 한국입니다. 한국에서는 물을 긷는 모습이나 빨래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수 없습니다. 인도나 버마나 부탄이나 베트남쯤 가면 물을 긷거나 빨래하는 수수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이제 한국에서는 도시나 시골 모두 빨래기계를 쓰니, 참말 빨래살이를 사진으로도 글로도 그림으로도 옮기지 못합니다.

  손으로 모를 내는 사람이 거의 없고 기계를 쓰니, 모내기를 사진으로 찍을 일이 없습니다. 가을걷이를 기계로 하고 나락털기도 기계로 하니, 가을빛을 사진으로 찍을 일이 없습니다. 기계와 농약과 비료가 춤추는 시골이기에 제비가 돌아올 흙집 처마 밑이 사라져 제비가 선보이는 멋진 춤과 날갯짓을 사진으로 찍을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삶을 잃거나 잊으면서 어떤 삶을 짓거나 일구는가요. 우리는 스스로 어떤 모습을 버리거나 등지면서 어떤 삶을 누리거나 가꾸는가요. 우리가 찍는 사진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읽는 사진에는 우리 삶이 어느 만큼 살갑거나 사랑스럽거나 살뜰히 깃들 수 있을까요.

  마을 샘터를 치웁니다. 물이끼를 모두 걷습니다. 다시 깨끗한 샘터요 빨래터가 되고, 우리 집 아이들은 샘터 바닥을 네 발로 척척 기듯 다니면서 놉니다. 물이 맑게 흐르고, 바람이 싱그럽게 붑니다. 햇볕은 알맞게 따스합니다. 멧새가 하늘을 가르며 예쁘게 노래합니다. 4347.4.2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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