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시에서 펴내는 <책이 열리는 마을>에 싣는 글입니다.

올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차례

우리 말 이야기를 싣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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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27. 이웃과 나누는 글내음

― 봄꽃이 봄바람을 부르듯이



  한국은 예부터 ⅔에 이르는 땅이 멧골이나 멧자락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⅓은 들이었겠지요. 멧골에 집을 마련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을 테고, 들에 집을 장만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을 터입니다. 멧골에 마련하면 멧골집인데, 멧골집 둘레는 숲이기 마련입니다. 숲에 깃든 집, 그러니까 숲집에서 살아야 땔감을 얻습니다. 숲집에서는 멧나물을 캐거나 뜯어서 먹고, 멧자락에 밭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합니다. 들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나무가 우거진 곳에 집을 짓습니다. 들에 짓는 집이면 들집이 될 텐데, 나무가 가까이 있어야 땔감으로 삼습니다. 여러 가지 연장도 나무를 깎아서 만드니, 나무는 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냇물이 흐르고 숲으로 둘러싼 들이 사람이 살기에 알맞다 할 만한 터인 셈입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들’과 얽힌 낱말을 퍽 많이 썼어요. 이를테면, ‘붉은닥세리’라든지 ‘노해’라든지 ‘펀더기’라든지 ‘푸서리’ 같은 낱말을 썼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낱말을 쓰는 분이 없고, 이런 낱말을 소설이나 수필이나 시에 넣으면, 거의 모든 사람이 못 알아들으리라 느껴요. 모두 ‘들’을 가리키는 낱말이지만, 옛날처럼 들집을 지어 들밥을 먹고 들일을 하는 ‘들사람’이 아니라, 도시를 이루어 도시사람으로 살기에, ‘들말’은 잊히거나 사라집니다.


  낱말뜻을 살피자면, 붉은닥세리는 “풀이나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거친 땅”이고, ‘펀더기’는 “펀펀하면서 너른 들”이며, ‘노해’는 “바닷가에서 들을 이룬 곳”입니다. ‘푸서리’는 “거칠면서 풀이 우거진 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자말로 ‘불모지(→ 붉은닥세리)’와 ‘광야(→ 펀더기)’와 ‘황야(→ 푸서리)’를 쓰곤 해요. 들살이와 멀어지면서 들빛을 잃지만, 들말을 써야 할 자리가 곧잘 있습니다.


  이러한 들말과 함께 ‘들녘·들판·벌·벌판’ 같은 낱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도 어느새 쓰임새를 잃으면서 차츰 우리 마음에서 잊힙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시골에서 들을 가꾸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새로운 도시를 ‘신도시’나 ‘뉴타운’으로 넓히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면서 삶도 나란히 달라집니다.


  봄을 맞이해 어디에서나 봄꽃이 피어납니다. 시골숲에서는 할미꽃과 진달래와 복수초 같은 꽃이 고개를 내밉니다. 시골마을에서는 냉이꽃과 봄까지꽃과 별꽃과 코딱지나물꽃 들이 방긋 웃습니다. 삼월에는 산수유나무나 동백나무나 매화나무나 닥나무에서 마알간 꽃송이를 터뜨립니다. 사월에는 앵두꽃이랑 딸기꽃이 하얗고, 오월에는 찔레꽃과 탱자꽃이 하얗습니다. 삼월부터 오월까지 유채꽃이 노랗게 물결을 칩니다. 사이사이 냉이꽃이랑 꽃다지꽃이랑 민들레꽃이랑 콩꽃이 빙그레 웃어요.


  온갖 봄꽃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월 첫무렵에 피는 현호색을 바라볼 적에 ‘현호색빛’이라는 말 아니고는 현호색 꽃빛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딸기꽃은 ‘딸기꽃빛’입니다. 탱자꽃은 ‘탱자꽃빛’이요, 동백꽃은 ‘동백꽃빛’입니다. 사월에 느티나무도 새 잎사귀를 내면서 조물조물 조그마한 꽃을 줄줄이 매달며 옅푸른 빛이 감돌아요. 느티나무 느티꽃은 풀빛이면서도 풀빛이라는 말로는 모자라 ‘느티꽃빛’이라고 가리켜야 비로소 제대로 나타낸다 할 만합니다.


  풀빛과 얽혀 일본 한자말 ‘녹색’이라든지 중국 한자말 ‘초록’이 있어요. 영어로는 ‘그린’입니다. 나라와 겨레마다 가리키는 말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은 좀처럼 한국말을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 나라 여러 겨레가 저희 삶터에 맞게 지어서 쓰는 낱말을 몽땅 받아들여 뒤죽박죽으로 써요. 한국말 ‘빨강’과 ‘붉음’이 있으나 구태여 ‘적색’과 ‘레드’를 끌어들입니다. 서로 헤어지는 자리에서 ‘잘 가’나 ‘살펴 가셔요’라 말하기보다는 한자말로 ‘안녕’이나 ‘조심히 가셔요’라 말한다든지, 영어로 ‘바이바이’를 쓰곤 합니다.


  봄꽃은 봄바람을 부릅니다. 봄꽃이 퍼뜨리는 꽃내음은 봄바람에 살포시 실려 온 집안과 마을을 감돕니다. 멧새 날갯짓에도 봄꽃내음이 묻어 골골샅샅 퍼집니다. 일찌감치 깨어난 벌과 나비한테도 봄꽃가루와 봄꽃내음이 깃들어 이곳저곳으로 번집니다.


  도시에서는 어떤 빛이 될까요. 도시에서는 어떤 내음이 퍼질까요. 자동차가 그득그득 넘치기에 자동차 배기가스가 골골샅샅 퍼지겠지요. 공장 곁에서 공장 매연이 두루 번지겠지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바람은 무엇이고, 우리가 먹는 밥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맑은 바람을 마셔야 몸이 튼튼해요.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이나 정갈한 밥을 먹어야 몸에 새 기운이 솟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한 마디가 거칠거나 메마르다면 우리 마음은 어떤 빛이 될까 궁금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글 한 줄에 사랑스러움이나 살가움이 깃들지 못하면 우리 넋은 어떤 모습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기에 한국말을 배우고 씁니다. 한국에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니 이웃과 오순도순 주고받을 아름다운 한국말을 살핍니다. 우리는 어떤 보금자리와 마을을 가꾸면서 어떤 말빛을 밝힐 때에 즐거울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어떤 글내음을 퍼뜨리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에 사랑스러울는지 생각합니다.


  말 한 마디는 천 냥 빚을 갚을 뿐 아니라, 말 한 마디가 씨앗이 되어 고운 빛으로 거듭납니다. 콩을 심은 곳에서 콩이 나듯이, 따뜻한 말 한 마디 심은 자리에서 따뜻한 말이 사랑스럽게 태어납니다. 새봄에 새롭게 눈부신 봄빛을 마음속으로 그려요. 내 마음을 살찌울 ‘봄말’ 한 마디 그려요. 스스로 마음밭에 씨앗 한 톨 심듯이 말빛을 북돋우면, 이 말빛이 이웃한테 살그마니 퍼지면서 좋은 기운으로 깃들어요. 스스로 마음자리에 나무 한 그루 돌보듯이 글내음을 보듬으면, 이 글내음이 이웃한테 시나브로 스미면서 기쁜 웃음으로 샘솟아요.


  온누리를 촉촉히 적시는 빗물을 머금으며 흐르는 구름과 같은 넋으로 말빛을 가다듬습니다. 온누리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햇볕과 같은 마음씨로 글내음을 다스립니다. 4347.3.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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