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손길을 타며 환한 꽃


  시골에서 살아간다고 언제나 새와 벌레와 개구리한테 둘러싸여 아름다운 노래를 듣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텔레비전을 켜거나 라디오를 틀면 새노래도 벌레노래도 개구리노래도 못 듣습니다. 시골에서 산다지만 으레 자가용이나 짐차나 경운기를 몰면 들과 숲에서 들려주는 노래를 못 듣습니다.

  시골에서 일할 적에 농약을 뿌리느라 부산할 적에도 노래를 못 듣습니다. 농약을 뿌리려고 경운기나 기계를 돌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퍼집니다. 촤아아 농약 흩날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퍼집니다. 농약을 맨몸으로 뿌리는 시골 할매와 할배도 있지만, 농약을 뿌릴 적에는 으레 수건과 긴옷으로 친친 감쌉니다. 둘레에서 흐르는 소리를 모두 닫습니다. 게다가 농약을 치면 이 둘레로 어떤 새도 벌레도 개구리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레이철 카슨 님이 “조용한 봄”을 부르짖은 지 예순 해가 훨씬 지났습니다. 곧 일흔 해가 되는군요. 참말 오늘날 시골은 “조용한 봄”입니다. 아니, “고요한 봄”입니다. 아니, “쥐 죽은 봄”입니다. 아니, “소리와 노래가 사라진 무섭고 끔찍한 봄”입니다.

  요즈음은 숲정이가 남지 않습니다. ‘숲정이’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숲을 가리킵니다. 이제 이런 낱말은 쓰임새를 잃습니다. 참말 마을 가까이에 숲이 사라지니까요. 마을 가까이 빈터나 수풀을 그대로 두지 않으니까요. 마을 할배는 마을과 맞닿거나 가까운 빈터나 수풀에 신나게 농약을 뿌립니다. 풀씨가 날린다며 몹시 싫어합니다.

  그런데 말입지요, 끝겨울과 첫봄이 되면 다들 나물을 캐러 들로 숲으로 가요. 이제 시골 할매도 예전처럼 나물캐기를 안 하지만, 냉이와 쑥을 캐러 들로 숲으로 갑니다. 생각해 보셔요. 여느 때에는 엄청나게 농약을 뿌려대고서 냉이랑 쑥은 캐려고 들과 숲으로 간단 말이에요. 우리는 이 땅에 대고 무슨 짓을 하는 셈일까요. 우리는 이 땅에다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셈인가요.

  학교에서 숲을 가르치는 일이 없습니다. 시골학교에서조차 숲을 안 가르칩니다. 어제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를 다녀오는데, 면소재지 고등학교 머스마 넷이 빈 깡통을 아무 데나 휙 던집디다. 너무 어이없어서 자전거를 세우고 네 아이를 불렀습니다. 깡통 주으라고 했습니다. 어른이 보는 앞이니 깡통을 줍더군요. 그러나, 내가 다시 자전거를 몰고 옆을 지나가니 곧바로 깡통을 길에다가, 아니 시골 면소재지 작은 밭뙈기에다 버립니다. 나는 자전거를 다시 멈추어 이 아이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네가 깡통 버린 데는 ‘바로 네 마을이요 네 고향’이라고 얘기하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조차 안 합니다.

  송민혜 님이 쓴 《처음 손바느질》(겨리,2014)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마음이 아파 책을 읽습니다. “제 쓰임이 있는 소품들이라면 아이가 늘 곁에 두고 쓰면서 엄마 사랑을 담뿍 받을 수 있어요(12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저밉니다. 시골 면소재지 고등학교 아이는 어머니 사랑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을까요. 저희 집 마당에다가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릴까요. 저희 집 밭이나 논에다 빈 깡통이나 병을 함부로 던질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쓰레기 버리지 마라’ 하고 가르치거나 얘기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쓰레기를 왜 버리지 말아야 하고, 쓰레기가 무엇이며, 쓰레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거나 얘기하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더 나아가, 시골에서조차 시골아이가 흙을 느끼거나 알도록 가르치거나 얘기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도시에서는 무엇을 할까요? 요즈음 몇몇 학교에서는 ‘학교 텃밭’을 일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몇몇 학교일 뿐입니다. 모든 학교가 텃밭을 일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학교도 모내기로 바쁜 철에 모내기를 거들지 않습니다. 피사리나 가을걷이로 바쁜 철에 피사리나 가을걷이를 거들지 않습니다.

  “느리게 / 한 땀 두 땀 // 빛깔 고르고 / 바늘땀 더하는 재미 // 손꽃 핀다(17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쓸쓸합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손으로 풀을 뽑으며 손으로 낫을 들어 나락을 베지 않고서야 흙도 풀도 나무도 숲도 들도 알 수 없습니다. 뙤약볕을 받으며 밭에서 땀을 흘리지 않고서야 햇볕이 얼마나 고마우면서 대단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비를 맞으며 나물을 뜯지 않고서야 비와 풀이 얼마나 고마우면서 대단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이 땅 아이들은 가을에 대입시험을 치러야 하니 너무 바쁜가요. 이 땅 대학생은 가을에 학교잔치를 하거나 취직시험을 치러야 하니 너무 벅찬가요. 가을에 가을빛을 누리면서 흙내음 맡을 줄 아는 어른(교사·부모)과 아이(학생)가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봄에 봄빛을 즐기면서 풀내음 맡을 줄 아는 사람이 늘면 좋겠습니다.

  손바느질 이야기를 들려주는 송민혜 님은 “청 자투리를 밑으로 덧대고 위쪽으로는 해진 올을 그대로 살려 수를 놓았더니 꽃 한 송이 곱게 피었답니다(31쪽).” 하고 손꽃을 노래합니다. “아이는 자르고 엄마는 바느질, 사이좋게 뚝딱. 안 입는 옷과 자투리 천으로 만든 장식줄(70쪽).” 하면서 손빛으로 춤춥니다. 말 그대로 손길을 타면서 환한 꽃입니다. 꽃 한 송이는 우리 손길을 따사롭게 받으면서 사랑스럽게 피어납니다. 풀 한 포기는 우리 손길을 넉넉하게 받으면서 푸르게 자랍니다. 나무 한 그루는 우리 손길을 살가이 받으면서 싱그러이 큽니다.

  손으로 밥을 짓습니다. 손으로 빨래를 합니다. 손으로 걸레질을 하고, 손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손으로 쓰다듬고, 손으로 머리를 감기며, 손으로 아이들 발을 씻깁니다. 손으로 집을 짓지요. 손으로 옷을 깁지요. 손으로 물레를 잣고, 손으로 절구를 빻아요. 손으로 부침개를 부치고, 손으로 닭둥지에서 달걀을 주으며, 손으로 제비한테 인사합니다.

  “작은 종이 하나에도 내 이야기 곱다시 담고 싶다(113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우리 삶은 작은 눈빛 하나로 밝습니다. 우리 사랑은 작은 손빛 하나로 포근합니다. 우리 꿈은 작은 말빛 하나로 그윽합니다.

  면소재지 머스마는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면소재지 초등학교 아이한테도 과자봉지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 얘기할 적에도 이와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어른이 알려주어도 코앞에서만 줍는 척하고 이내 손을 뒤로 가져가서 슬쩍 떨어뜨리더니 모른 척하더군요. 우리 손은 서로 사랑하려는 손이요, 우리 손은 아름다운 꿈을 지으려는 손입니다. 4347.4.2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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