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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 사흘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65
사진은 모두 다르게 읽는다
― 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글
한유주 옮김
사흘 펴냄, 2013.1.28.
사진 한 장을 놓고 똑같이 읽는 법은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사진 한 장을 놓고도 오늘과 모레에 읽으면 다른 느낌이 샘솟습니다. 올해와 다음해에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 납니다. 열 해가 지나거나 서른 해가 지난 뒤에 읽으면 새로운 느낌이 다르게 피어납니다.
사진비평은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 한 장을 놓고 백이면 백 사람이 모두 다르게 읽을 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읽을 사진인 터라, 비평가 한 사람이 굳이 사진을 이야기할 까닭이 없을 만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비평은 어느 자리에서든 부질없습니다. 문학을 비평할 까닭이 없고 영화를 비평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인 느낌을 이야기로 살려내어 나누면 됩니다. 문학비평이나 사진비평이나 예술비평이 아닌, ‘문학 이야기꽃’과 ‘사진 이야기잔치’와 ‘예술 이야기놀이’를 함께할 때에 즐겁습니다.
제프 다이어 님이 쓴 《지속의 순간들》(사흘,2013)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제프 다이어 님은 참말 제프 다이어 님 나름대로 사진을 읽습니다. 어쩜 이렇게 읽느냐 싶기도 하고, 아하 이렇게 읽어도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나는 제프 다이어 님이 읽은 대로 이런 작가와 저런 작가 사진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제프 다이어 님은 480쪽에 이르는 도톰한 책에서 유럽과 미국에서 사진길 걸어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나는 사진가들 뒷이야기에 그리 눈길이 안 갑니다. 굳이 뒷이야기를 할 까닭은 없어요. ‘앞이야기’를 하면 돼요.
“어떤 사진은 그 사진을 처음 찍은 사진가의 눈길을 끈 바로 그 방식대로 나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19쪽).”는 말마따나,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 느끼는 대로 느끼면 됩니다. 스스로 느끼는 대로 읽고, 스스로 느껴서 읽은 대로 말하면 됩니다.
사진비평에는 마땅히 ‘정답’이 없습니다. 이렇게 읽어야 대단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저렇게 읽으니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지 않습니다. 이 사진은 이렇게만 읽어야 할까요? 이 사진을 저렇게 읽으면 안 될까요? 이 사진은 꼭 마루에 걸어야 할까요? 이 사진을 길가에 걸거나 대문에 붙이면 안 될까요?
“사진가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몇몇 사진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작업에 고의로 연출한 요소들을 담기 시작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대신, 그들은 사진이 구성되는 방식을 강조하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39쪽).”와 같은 말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합니다. 일부러 꾸며서 찍든, 꾸밈없이 수수하게 찍든, 모든 사진에는 사진가 넋이 깃듭니다. 어떻게 찍는 사진이든 사진가 삶이 드러납니다.
연출사진이면 어떻고 안 연출사진이면 어떻겠어요. 졸업식이나 생일잔치에서 찍는 사진은 어떤 사진일까 궁금합니다. 연출사진일까요? 스냅사진일까요? 기자회견을 하는 정치꾼을 찍는 사진은 어떤 사진일는지 궁금합니다. 딱딱하고 메마른 낯빛으로 말하는 정치꾼 모습은 연출사진이 될까요, 아니면 스냅사진이 될까요, 아니면 보도사진이 될까요?
“그림에 비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손을 묘사할 수 있는 사진의 능력은 사진이 지닌 대단한 매력들 중 하나다(103쪽).”와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은 글로도 그림으로도 노래로도 얼마든지 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사진이기에 손을 더 수월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사진이기에 더 잘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록’하려는 마음일 때에 기록합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안 쓰더라도, 머릿속에 아로새긴다면, 그 어느 것보다 훨씬 또렷하고 수월하게 ‘기록’합니다.
온누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 느낄 만한데, “어떤 도시나 마을은 때때로 수천 마일 떨어진 다른 나라의 도시나 마을과 ‘쌍둥이처럼’ 꼭 닮아서(118쪽).”, 사진 작품을 볼 적에도 어쩜 이리 똑같은 작품이 태어날 수 있을까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표절일까, 도용일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작품을 빚은 두 사람은 서로 동떨어진 곳에서 서로 모르는 채 살아왔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꼭 닮은 작품을 찍을 수 있어요.
“늙고, 매우 지친 남자를, 우리가 사진가에 대해서나 피사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 우리는 이 사진들을 손녀딸이 찍은 할아버지의 사진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161쪽).”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손녀딸이 찍은 할아버지 사진이면 어떤가요? 나이가 쉰 살쯤 벌어진 짝꿍 사이가 찍은 사진이면 어떤가요?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제프 다이어 님은 이 사진에서는 사진을 읽기보다는 뒷이야기를 읽습니다. 아하 그렇지요. 뒷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은 뒷이야기를 읽으면 됩니다. 앞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은 앞이야기를 읽으면 됩니다. 사진을 읽고 싶은 사람은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삶을 읽고 싶은 사람은 삶을 읽으면 됩니다. 사랑을 읽고 싶은 사람은 사랑을 읽으면 됩니다.
‘모나리자’ 그림은 어떤 그림일까요? 모나리자 그림은 누가 그렸고, 왜 그렸을까요? 무엇을 그렸을까요? 아마, 모나리자 그림을 놓고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읽겠지요? 비평가마다 다 다른 소리를 줄줄이 읊겠지요?
“예전에 존재한 시간이, 한 세기를 지나, 바로 지금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282쪽).”는 말처럼, 예전에 흐르던 하루가 오늘도 흐릅니다. 오늘 흐르던 하루가 먼 앞날에도 흐릅니다. 왜냐하면 삶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아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내 사랑을 물려받아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 아이들도 앞으로 저희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줄 테지요. 그러니, 한 세기 아닌 천 해나 만 해가 흐른 뒤에도 똑같은 삶이 이어지곤 합니다.
제프 다이어 님은 “차 안에서 찍은 사진들은 너무나 명백하게 건성으로 찍은 것처럼 보여서, 사진의 가치를 발견하기 힘들 때가 있다(309쪽).” 하고도 말합니다. 그래요, 이렇게 읽어도 됩니다. 이렇게 읽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참말 너무도 뚜렷하게 건성으로 찍었을까요? 너무도 뚜렷하게 눈물을 흘리며 찍지는 않았을까요? 너무도 뚜렷하게 마음이 아파서 찍지는 않았을까요?
건성으로 찍은 사진이 한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땀흘린 사진이 한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 모두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둘 모두 서로서로 이녁 나름대로 사진을 읽습니다.
이리하여, “문맹의 세계에도 시가 존재한다면, 천박한 것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351쪽).” 같은 말은 살짝 뜬금없습니다. 어느 사진을 놓고는 건성이라 말하면서, 어쭙잖은 것에도 아름다움이 깃든다고 말한다면, 한 사람한테서 느끼는 두 얼굴일는지요? 뭔가 좀 뒤죽박죽입니다. 건성으로 찍은 사진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뜻이 될는지요? 아니면, 건성으로 찍은 사진이라 참 볼꼴사납다는 소리일는지요? 건성으로 찍어서 제프 다이어 님은 “사진의 가치를 발견하기 힘들”다고 말하는데, 로버트 프랭크 님이 사진을 건성으로 찍었는지 건성으로 안 찍었는지 어떻게 알까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꾹꾹 눌러서 ‘바로 이렇다구!’ 하고 외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뒤죽박죽으로 읽어도 사진입니다. 뒤죽박죽으로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뒤죽박죽으로 읽든 말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제프 다이어는 제프 다이어대로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스티글리츠는 스티글리츠대로 사진을 찍고 읽으면 되고, 스미스는 스미스대로 삶을 읽어서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아버스는 아버스대로 사랑을 노래하면서 사진을 찍으면 돼요.
우리는 ‘정론’을 세우거나 ‘역사를 기록’하려고 사진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즐기고 싶기 때문에 사진을 읽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듯이 사진을 읽습니다. 기쁘게 춤추듯이 사진을 읽습니다.
누군가는 토라진 얼굴로 사진을 읽고, 누군가는 싸우듯이 또는 술을 마시듯이 또는 잠꼬대를 하듯이 사진을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기에 저마다 다른 눈길로 저마다 다른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고 읽으며 나눕니다.
“위노그랜드는 ‘누구라도 내가 찍은 사진을 인화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에게 암실에서 보내는 시간이란 곧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시간을 의미했다(448쪽).”와 같은 말마따나, 누군가는 인화와 현상에 품을 많이 들입니다. 누군가는 인화와 현상보다는 사진찍기에 품을 많이 들입니다. 누군가는 스스로 사진찍기를 즐기려고 애쓰고, 누군가는 스스로 사진읽기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디지털사진이 나오는 오늘날, 굳이 인화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포토샵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즐겁게 찍고 보여주고 나누고 얘기하고 웃고 떠들고 노래하면 됩니다. 오늘날에도 인화에 엄청나게 품을 들일 수 있습니다. 저마다 하고픈 대로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사진답지’ 않습니다. 저렇게 하기에 ‘사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프 다이어 님은 “아버스가 헤밍웨이와 먼로에 대해 한 말들을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게드니의 사진에 나타난 아버스를 보고 그녀의 자살을 예감할 수 있는가(9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럼요. 미리 느낄 수 있어요. 그러나, 미리 못 느낄 수 있어요. 읽는 사람은 읽고, 못 읽는 사람은 못 읽습니다. 읽는 사람은 말을 안 하더라도 눈빛과 낌새만으로도 알아요. 눈빛과 낌새만으로도 삶과 사랑과 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빛도 낌새도 못 읽는 사람이 있어요. 말로 찬찬히 알려주어도 못 알아채거나 못 느끼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즐겁게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즐겁게 사진을 읽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고스란히 이어지고, 모레와 글피도 차근차근 이어집니다. 너는 나이고 나는 너입니다. 우리는 하나이면서 다 다릅니다. 지구별은 온누리 가운데 작은 빛이면서 고스란히 온누리입니다. 사진은 자그마한 모래알이면서 커다란 하늘입니다. 노래하는 사람한테서는 노래하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꿈꾸는 사람한테서는 꿈꾸는 사진이 자랍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서는 어떤 사진이 피어날까요? 사진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스스로 곱게 가꿉니다. 4347.4.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