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와 흑산도 빛깔있는책들 - 한국의 자연 217
고동률 / 대원사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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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빛나는 삶과 꿈
― 홍도와 흑산도 (빛깔있는 책들 301-35)

 고동률 글

 박보하 사진

 대원사 펴냄, 1998.7.25.

 

 

  전라남도에 신안군이 있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 알던 신안은 신안 바닷가에서 옛배를 길어올려 지난날 유물과 유적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어릴 적에는 흑산도라든지 홍도가 신안군에 있는 섬인 줄 몰랐습니다. 그 먼 바다까지 배를 타고 찾아갈 일이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해 보곤 했습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내 삶이라,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여덟아홉 시간을 간다는 백령도를 헤아리면서, 흑산도나 홍도는 얼마나 뭍에서 먼 섬일까 하고 그려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인천 앞바다에 있는 장봉섬에서 여러 해 일했습니다. 장봉섬 한쪽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옹암분교에서 분교장을 맡으셨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1988년부터 섬학교 교사로 계셨고, 세 해였지 싶은데, 섬학교 일곱 아이와 지내다가 분교가 문을 닫아야 하면서 다시 뭍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어머니와 형과 함께 배를 타고 장봉섬에 갈라치면 두 시간이나 두 시간 반쯤 걸렸습니다. 물결이 높게 치는 날에도 배를 탔고, 출렁출렁 흔들리는 배에서 어머니는 곧잘 멀미를 하셨습니다.

 

  인천항을 떠난 배는 장봉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섬에서 통통배가 마중을 나옵니다. 섬에서 내릴 사람은 통통배로 갈아탔습니다. 섬에 있는 포구는 아주 작거든요. 큰 배가 닿을 수 없어요. 포구에서 내려 여러 짐을 짊어진 채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용케 경운기를 만나면 짐칸에 얻어 탑니다. 하염없이 걸어야 할 적에는 흙먼지 날리는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도라지꽃을 보았습니다. 섬에서 자라는 도라지는 어린 내 키를 훌쩍 넘도록 크게 자랐고, 호미로 도라지를 캐서 뿌리를 잘 씻은 뒤 벗기면 날로 먹어도 맛있고 무쳐도 맛있는 나물이 되었습니다.

 

 

.. 홍도와 흑산도의 아름다운 자연미와 특이한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느끼려면 많이 걷고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  (109쪽)

 

 

  국민학교를 갓 마친 나는 옹암분교 아이들을 만나서 함께 놀 수 있었으나, 어쩐지 수줍고 부끄러웠습니다. 섬아이는 살갗이 아주 까맸고, 도시인 인천에서 온 내 살갗은 허얬습니다. 허연 살갗 때문에 더 섬아이하고 마주하지 못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섬에서 한 달쯤 지내면 내 허연 살갗도 제법 까무잡잡 타곤 했어요.

 

  섬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섬에서 어떤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요. 섬에서 읽는 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섬에서 보는 하늘과 섬에서 걷는 길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여름방학을 맞이하면 으레 섬에서 지내는데, 우리 식구는 아버지와 함께 지내려 찾아오지만, 다른 이들은 섬에서 놀려고 찾아옵니다. 작은 분교가 있는 작은 숙소에서 네 식구가 지내는데, 그때에는 잘 몰랐지만, 여름방학 때 아버지가 인천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까닭을 요즈막에 새삼스레 돌아보곤 합니다. 방학이라고 인천으로 돌아가면, 여름철에 섬으로 놀러오는 이들이 분교 건물에 함부로 들어와서 어지럽히거나 유리창을 깨거나 쓰레기를 운동장에 버리거나 해요. 운동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놀이꾼이 있기도 하고, 병을 아무 데나 던져서 깨뜨리기까지 해요. 그러고 보니, 섬에서 머무는 동안 쓰레기를 줍거나 빈병을 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 유람선 선장의 홍도와 바다 사랑은 끔찍하다 못하여 처절하기까지 하다. 관광객이 무심코 담배나 휴지를 바다에 던졌다가는 망신도 보통 망신을 당하는 게 아니다. 목청 큰 선장은 집 방바닥에 침을 뱉을지언정 바다에는 먼지 하나 털어내지 말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  (15∼16쪽)

 

 

  그리 크지 않은 섬에 있던 아주 조그마한 분교는 곧 문을 닫습니다. 분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섬에서 가장 큰 학교로 먼길을 다녀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중학교를 다니려고 인천으로 하숙을 나왔을까요. 아니면 그대로 섬에 남아 섬사람으로 지낼까요.

 

  이제는 장봉섬 옹암분교 마지막 분교장이던 우리 아버지를 떠올릴 마을 어른은 아무도 없지 싶어요. 분교가 문을 닫고 몇 해 뒤 장봉섬을 찾아와서 부러 분교까지 혼자 걸어온 적 있는데, 그사이 분교는 모든 유리창이 깨지고 모든 물건이 사라졌으며 모든 것들이 어지럽게 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운동장 축구골대마저 쓰러지고, 국기게양대는 넘어졌으며, 운동장 곳곳은 빈 술병과 고기 구워 먹은 시꺼먼 잿더미가 춤추고 이곳저곳에서 오줌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나중에 다시 열기를 바라며 학용품도 공책도 교과서도 그 교실에 그대로 두었는데 어느 하나 남아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지내던 관사도 아주 엉망진창이 되었어요. 관사 지붕에 고추를 널어 말리면서 바다를 하염없이 내다보던 일이 아스라히 떠오릅니다.

 

 

.. 삼층석탑과 석등을 가림은 물론 뿌리가 굵어지면서 석탑을 기울게 한 것이다. 팽나무뿐만 아니라 인간도 훼손에 일조를 하였다. 나름대로 보존하려는 의도였겠지만 바닥을 온통 시멘트로 바르고 주변에 돌담을 쌓아 석등과 석등 주변은 원형을 거의 잃었다 ..  (61쪽)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피서란 무엇일까요. 관광이란 무엇일까요. 도시 손님은 누구인가요. 모두들 맑고 깨끗하며 싱그러운 시골로 찾아가서 맑은 바람과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을 텐데, 시골에 온갖 쓰레기를 잔뜩 버리고 도시로 돌아가면, 시골은 어떡해야 할까요. 도시에서 가져온 것들을 지져 먹든 구워 먹든 즐겁게 누릴 노릇이지만, 빈병도 쓰레기도 과자봉지도 귤껍질도 몽땅 도시로 가져가서 치워야 옳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시골사람은 도시사람 뒷자리를 치우는 일꾼이 아니거든요. 시골사람은 시골마을을 돌보고 가꾸면서 사랑하는 숲지기인걸요.

 

  고동률 님 글과 박보하 님 사진으로 빚은 예쁘고 작은 책 《홍도와 흑산도》(대원사)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1998년에 처음 나온 책인데, 요즈음에 새로운 판이 나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014년 눈길로 바라보자면 1998년에 나온 책에 실린 이야기는 참 오래되고 아스라한 옛모습으로 여길 만합니다. 참말 이 책에 나온 이야기와 다르게, 그동안 아주 많이 달라졌거든요. 뱃길은 더 빨라졌고, 온갖 위락시설은 더 늘었으며, 집도 건물도 길도 아주 많이 바뀌었습니다.

 

 

.. 예전에 비하여 지금의 생활은 많이 윤택해졌다. 자식들 대학 보내고 목포 등지에 집을 장만하여 두기도 한다. 생활이 어느 정도 윤택해지면서 어부의 자식들은 고기 잡는 일을 대물림하지 않고 있다. 지긋지긋하기만 한 섬을 떠나 육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  (90쪽)

 

 

  이런저런 추억에 잠길 생각으로 《홍도와 흑산도》를 읽지는 않습니다. 이웃들한테 이 작고 예쁜 책을 아스라한 옛생각에 잠기라는 뜻으로 읽으라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을 찬찬히 펼치면서 넘기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가꾸는 삶이란 무엇인지 천천히 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곰곰이 새기며 읽고 사진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저마다 꿈꾸는 사랑이 어떻게 빛나는가 하고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삶이란 어디에서 아름다울까요. 삶은 누가 가꿀까요. 삶을 이루는 사랑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삶을 밝히는 꿈은 누가 곱다시 보듬을까요. 책을 살살 쓰다듬으면서 덮습니다. 4347.4.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사람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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