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독자·비평가, 여기에 사람 (《설희》 표절과 아울러)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를 표절했다고 하는 연속극이 막을 내렸다. 이 연속극이 막을 내릴 즈음 여러 가지 이야기가 하나둘 불거진다. 연속극 작가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 밝히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 연속극에서 나오는 여러 상황과 설정이 만화책 《설희》뿐 아니라 다른 영화와 연속극하고 크게 닮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한편, 강경옥 님 다른 만화책 《별빛속에》하고도 닮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나는 어느 쪽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고 따질 마음이 없다. 네 가지로 생각해 보고 싶을 뿐이다. 작가, 독자, 비평가, 사람, 이렇게 돌아보련다.

 


  ㄱ. 작가


  사람들한테 말밥에 오를 만한 작품이라면 ‘창작’으로 내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지구별에 ‘창작이라 할 수 있는 창작은 없다’는 말을 퍽 많은 사람이 내놓는데, 말이 될 수 없다. 맨 처음 창작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목민심서》는 창작인가 아닌가. 《구운몽》은 창작인가 아닌가. 《홍길동전》은 창작인가 아닌가. 《황조가》는 창작인가 아닌가. 시골마을마다 다 다르게 부르던 〈시집살이 노래〉라든지 〈방아타령〉이라든지 〈모심기 노래〉는 창작인가 아닌가.


  여러 작품을 뒤섞는 일도 창작이라 한다면 창작일 테고, 이러한 예술 갈래도 있을 텐데, 창작이라 한다면 스스로 지어서 나누는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이녁이 낳은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놀리고 가르치고 하면서 새로운 기쁨을 누린다. 그런데, 모든 아이는 뒤집고 서고 걷고 달리면서 자란다. ‘흐름은 똑같다’ 할 테지. 그렇지만, 아이는 모든 어버이마다 다 다른 아이요, 내 아이는 이웃 아이하고 다르다. 그래서 육아일기를 쓰더라도 ‘똑같은 흐름을 다루’지만 모두 다른 육아일기가 태어난다.


  다만, 모든 아이가 똑같은 흐름으로 자란다 할 수 있으니, 다 다른 사람이 쓴 육아일기가 아주 똑같다 싶도록 이야기가 흐를는지 모르리라. 이때에는 표절이니 도용을 따질 수 없을 텐데, 이와 달리 뻔히 알려진 온갖 작품과 자료를 살펴서 만들었다는 연속극은 어떻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이 작품을 표절했다는 소리를 듣도록 ‘창작’을 했는지 궁금하다. 다른 무엇보다 작가라는 사람으로서 이만 한 작품을 내놓는 일이 몹시 부끄럽다고 느낀다.

 


  ㄴ. 독자


  내가 아주 좋아하는 어떤 작가가 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니, 이녁이 쓴 작품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찾아서 읽으리라.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뜻밖에도 얄궂은 짓을 일삼았다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이녁 스스로 창작하지 않고 다른 이 작품을 베끼거나 훔쳤다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니, ‘작품만 재미있고 좋으면 그만’이라 여겨도 될까.


  작가는 누구보다 스스로한테 가장 똑부러져야 하고 올발라야 하며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 독자는 작가 못지않게 작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턱대고 작가 편에 서서 감싸는 일을 한대서 독자가 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언제나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착하고 참답게 창작을 하여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설 수 있도록 이끌어야 비로소 독자다운 독자라고 느낀다.

 


  ㄷ. 비평가


  비평가는 비평을 하는 사람이다. 비평가는 어느 자리에도 서지 않는 사람이다. 비평가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며, 비평가는 참과 거짓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비평가는 스스로 느끼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느끼는 대로 말하되, 어느 자리에 기울어지지 않는 넋으로 말해야 비평가이다. 표절을 했으니 저 사람이 잘못이라고 나무라는 사람은 비평가가 아니다. 누군가를 잘못이라고 가르는 사람이라면 법관이 되겠지. 두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느낌을 꾸미지 않고 밝힐 때에 비평가가 된다.


  그러면 누가 비평가인가?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작가이면서 비평가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면 작가나 비평가이면서도 독자이다. 매체에 글을 쓰는 기자는 누구나 비평가인 셈이다.


  오늘날 기자는 표절이나 도용 같은 일을 놓고 얼마나 비평가답게 글을 써서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궁금하다. 시청율과 돈벌이와 광고에 얽매인 채 거짓스러운 허울을 앞세우는 짓을 일삼는 기자나 비평가가 너무 판치는 우리 사회가 아닌지 궁금하다.

 


  ㄹ. 사람


  우리 집 일곱 살 큰아이와 네 살 작은아이는 성탄절이 지났어도 “산타 할아버니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아이고 나쁜 앤지.” 하는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뻔히 나오지만, ‘하늘은 다 안다’. 하늘에 앞서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잘 안다.


  배구 경기를 보면 맞은편 선수가 때린 공이 내 손끝에 맞았는지 스쳤는지 서로서로 다 안다. 서로서로 다 알지만 심판이 모여 합의판정을 할 때까지 낯빛을 숨기거나 모르는 척한다. 비디오로 느린그림을 보여주어도 안 맞았다고 발뺌을 하기 일쑤이다. 심판이 손을 들어 ‘네 손에 맞았잖아.’ 하고 가리키는 데에도 안 맞았다고 발뺌을 하는 선수마저 있다. 이러면서, 제가 때린 공이 맞은편 선수 손끝에 안 맞았는데에도 끝까지 맞았다면서 골을 내거나 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런 운동경기를 보면서 생각해 보곤 한다. 참말 저 선수는 아무것도 모르나? 모르는 척하나?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볼 적에 부끄럽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 못 알아채는 반칙을 해도 괜찮은가? 심판이 안 보는 자리에서 선수들이 팔꿈치로 찍거나 무릎으로 눌러도 괜찮은가?


  표절 말썽을 일으키는 분은 스스로 돌아보기를 바랄 뿐이다. 이녁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바라기를 할 적에 얼마나 떳떳하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 * *


  만화책 《설희》를 표절했다는 연속극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모른다. 나는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은 지 스무 해가 넘었고, 연속극이 나오건 말건 볼 일이 없다. 그저 한 가지 궁금할 뿐이다. 작가와 독자와 비평가와 사람이라는 테두리에서, 여러 작품을 짜깁기했다는 소리를 온갖 곳 사람들한테서 수없이 듣는 방송작가는 ‘창작하는 즐거움’과 ‘글을 쓰는 기쁨’을 얼마나 아름답게 누리는지 궁금하다. 연속극 판권을 팔거나 광고수입을 많이 얻거나 원고료를 많이 받으면서 ‘닥본사 독자’를 많이 얻으면 이 모든 회오리바람 한복판에서도 새로운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닥본사 독자’는 어차피 한두 해쯤 지나면, 이번 일쯤 아무것도 아닌 듯 까맣게 잊어버리리라 생각하지는 않나 궁금하다. 4347.3.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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