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29] 빨래읽기
― 살림은 어떻게 가꾸는가
회사라는 곳에 다니려는 어른들은 흔히 잊곤 합니다. 회사를 다녀야 이녁 ‘발자취(이력)’가 좋아지거나 나아지지 않습니다. 회사를 다녀야 이녁이 그동안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이룬 보람을 살리지 않습니다. 대학교를 다녔고 회사에서 제법 경력을 쌓은 사람이 아이를 낳아 돌봐야 한대서 ‘아까울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회사원이 되려고 대학교까지 다니지 않았어요. 우리 솜씨와 재주는 회사에서만 빛나지 않습니다. 빼어난 솜씨와 훌륭한 재주는 바로 ‘아이한테 물려주려’고 키웠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어머니 몸에서 열 달 동안 자라는 아기입니다. 아기가 어머니 몸에서 열 달 동안 자라면서 어머니가 누리는 기쁨과 사랑은 바로 이때에 한껏 누립니다. 아기를 낳고 난 뒤에는 몸에 품은 고운 씨앗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뒤에는 아기가 날마다 새롭게 자라는 빛을 마주합니다. 아기가 스스로 뒤집고 서고 걸으며 달릴 수 있는 모습을 꾸준히 지켜보면서, 언제나 새로운 빛을 만납니다. 씩씩하게 달릴 줄 아는 어린이는 무럭무럭 큽니다. 하루하루 새삼스럽습니다. 모든 어버이는 모든 아이들 천천히 자라는 흐름을 지켜보면서 이녁 삶을 되돌아봅니다. 어린이를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덥석 맡길 일이 아닙니다. 어린이가 크는 결과 무늬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스스로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손빨래를 즐깁니다. 빨래기계 없이 스무 해를 살다가 몇 해 앞서 비로소 빨래기계를 들였습니다. 빨래기계를 집안에 들이기는 했으나 이 기계를 쓰는 일은 드뭅니다. 언제나 거의 모든 빨래는 두 손으로 복복 비비고 헹구어서 합니다.
내가 손빨래를 하는 까닭은 손빨래가 즐겁기 때문입니다. 늘 만지고 마시는 물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옷가지를 조물조물 비비고 헹구면서 이 아이들이 자라는 결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이 작은 옷을 입고 저 작은 몸뚱이가 신나게 뛰놀았구나 하고 헤아립니다.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어버이한테 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빛을 누리는 일이란, 회사를 다니며 경력을 쌓거나 돈을 벌어들이는 보람과는 사뭇 견줄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회사는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다시 다닐 수 있습니다. 장사는 언제라도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이 나이 이 모습은 바로 이때가 아니면 나중에는 느낄 수도 찾을 수도 없어요.
아이들 한두 해 자라는 때는 곧 지나가요. 아이가 여섯 살일 적은 바로 오늘입니다. 아이가 여덟 살이고 열 살일 적은 바로 오늘입니다. 큰아이가 열두 살일 적은 꼭 한 해일 뿐이요, 작은아이가 다섯 살일 적도 언제나 한 해일 뿐입니다. 아이들 이 나이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보여주는 싱그러운 빛을 얼마나 즐겁게 누리려는 삶인가를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빨래기계는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쓰면 됩니다. 자그마한 아이들 옷가지를 조물조물 주므르면서 비비고 헹굴 수 있는 즐거움은 바로 오늘 누릴 수 있습니다. 함께 뒹굴고 함께 노래합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나들이를 합니다. 아이를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내어 무언가 가르쳐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아이와 함께 집에서 지내면서 ‘유치원 교사’나 ‘어린이집 교사’가 가르칠 것을 ‘어버이가 스스로 아이한테 가르칠’ 적에 훨씬 즐거우며 아름다우리라 느낍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배울 만한 것도 어버이가 스스로 아이한테 가르친다면 훨씬 빛나면서 사랑스러우리라 느낍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돈으로 사지 못합니다.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늘 사랑으로 나눕니다. 살림은 돈으로 가꾸지 않습니다. 돈이 넉넉하기에 살림을 잘 가꾸지 않습니다. 살림은 언제나 사랑으로 가꿉니다. 살림은 늘 꿈으로 가꿉니다. 즐겁게 웃고 노래하는 사랑과 꿈이 있을 때에 날마다 새롭게 웃고 노래하는 삶이 됩니다. 4347.3.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