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와 방송작가 (강경옥 님 《설희》 표절을 생각한다)
만화가 강경옥 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설희》와 얽힌 말썽거리를 이야기하면, 내 이야기를 듣는 이웃이 으레 한 마디를 한다. ‘방송작가를 낮추어 보느냐?’ 하고.
그럴 까닭이 있나. 방송작가를 낮추어 보아야 할 까닭이 없다. 다만, 나는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고 살아왔다. 스무 살에 제금내어 마흔 살에 이른 오늘까지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텔레비전이 없으니 연속극이나 이런저런 방송을 하나도 안 본다. 방송에 나오는 배우나 연예인이나 가수 이름을 거의 다 모른다. 서태지와 정태춘과 안치환을 끝으로 음반을 더는 사지 않았고, 군대에서 S.E.S를 처음 보았고, 전역하고서 핑클을 보았다. 방송에서 흐르는 노래는 늘 모르는 채 살아간다.
텔레비전이 없고 방송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으니, 방송작가라는 사람을 하나도 모르는 채 살아왔을 뿐이다. 방송작가가 어떤 글을 쓰고 어떻게 글을 쓰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방송작가도 똑같이 ‘글꾼’이요 ‘글쟁이’이며 ‘글빛’을 가꾸는 사람인 줄 안다.
만화를 좋아하거나 즐겨읽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만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만화책을 손수 장만해서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만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사진을 좋아하는 분이라 하더라도 사진 이야기를 잘 나누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진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사진책을 사지 않는 사람’하고는 사진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친다. ‘사진을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찍는 사진만 좋아한다’인가, 아니면 ‘내가 찍는 사진뿐 아니라 이웃들이 찍는 사진을 함께 좋아한다’인가 궁금하다.
‘책을 좋아한다’는 말도 그렇지. ‘책을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읽는 책만 좋아한다’인가, 아니면 ‘내가 읽는 책뿐 아니라 이웃들이 읽는 책을 함께 좋아한다’인가 궁금하다. 곧, 만화책을 안 읽더라도 만화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함께 읽고 느끼면서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 가운데 아이한테 만화책을 사서 읽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한국에서는 ‘대입시험을 바라며 입시교육 지식을 집어넣어 주는 학습만화’라고 하는 ‘만화라 할 수 없는 학습지’를 만화인 듯 잘못 알고 ‘학습만화’만 사 주는 어버이는 대단히 많다. 학습만화는 책마을에서 되게 크다. 돈벌이가 무척 쏠쏠하다. 지난날,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 밑이던 푸름이와 어린이일 적에는 학습만화가 거의 없었고, 그무렵에는 ‘그냥 만화’만 있었다. 이리하여, 그무렵 아이들은 ‘만화’를 즐겼고, 그무렵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만화를 그려서 베풀어 주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만화를 그려서 베풀지 않고 ‘학습만화’를 그려서 돈벌이를 하는 한편,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모는 몫을 맡기까지 한다.
한국 사회에서 만화 한길을 서른 해쯤 걷기란 참 팍팍하고 고달프다 할 만하다. 학습만화를 안 그리면서 만화로 밥벌이를 하기란 얼마나 벅찰는지 돌아볼 만하다. 게다가, 만화가로 이름을 제법 얻은 뒤 대학교수 노릇을 안 한다면, 만화 한길을 서른 해 씩씩하게 걸어가며 예나 이제나 즐겁게 ‘창작’을 한다면, 이러한 만화가는 만화가일 뿐 아니라 ‘장인’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리라 생각한다.
만화책 《설희》와 얽힌 일을 지켜보면서 생각한다. 이번 일은 ‘만화책 표절’로 그치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 나라에서 만화가 문화요 예술이며 삶이고 사랑이 되도록 아름답게 한길을 걸어온 사람 뒷통수를 후려치는 일이라고 느낀다. 방송작가를 낮추어 보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만화가가 《설희》를 표절했어도 나는 똑같이 말하리라. 다른 소설가가 《설희》를 표절했어도 나는 똑같이 말하리라.
만화 작품을 함부로 표절해서 연속극을 찍는 일이란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만화를 우습게 여기면서 만화 작품을 표절하는 짓이란 얼마나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인가. 그네들이 우습게 여기는 만화이면서, 왜 만화를 표절하지?
우습게 여기니까 만화를 표절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네들 스스로 우스운 사람이기 때문에 만화를 함부로 표절하는구나 싶다.
사진가 마이클 케냐 님은 이녁 사진을 표절한 한국 사진작가를 보며 ‘무척 슬프다’고 말했다. 이녁 사진을 보면서 솔섬을 아름답게 찍으려고 애쓴 수많은 ‘사진 즐김이’를 볼 적에는 ‘무척 기쁘다’고 말했지만, 표절한 사진작가한테는 ‘무척 슬프다’고 말한다.
나도 이런 마음이다. 표절한 사람을 볼 적에는 무척 슬프다. 나 또한 사진작가로 일하기에 느끼는데, 내 사진을 표절한 누군가를 보면 참 슬프다. 내 사진을 보면서 헌책방이라는 곳에서 아름다운 빛을 담아내는 사진을 찍는 이웃을 만나면 무척 기쁘다. 배움과 표절은 똑같거나 다르다. 배움과 표절은 똑같이 바라보면서도 다른 마음이다. 배움이란 즐거우면서 고맙게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표절이란 이웃을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거나 들볶거나 짓밟으면서 스스로 바보가 되는 마음이다.
방송작가들이 만화가들을 괴롭히는 일이란, 방송작가 스스로 바보스러운 길로 접어드는 일이 될 뿐이다. 왜 손을 내밀어 어깨동무를 하지 못하는가? 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얼싸안으려 하지 못하는가?
나는 〈겨울왕국〉이라는 만화영화를 보지 못했지만(시골에는 극장이 없으니까), 이 영화를 본 어느 분이 말하기를, 영화 끝자락에 《눈의 여왕》에서 ‘모티브’를 얻어 새롭게 만든 작품이라고 밝히는 자막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 만화책 《설희》에서 ‘클리셰’를 얻어 만든 연속극이라고 밝히는 일이 부끄러울까? 하나도 안 부끄럽다. 자랑이 되면 자랑이 되지, 부끄러울 까닭이 없다. 우리는 모두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면 부끄러운가? 안 부끄럽다. 스스로 새로운 작품으로 창조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된다.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작품은 ‘배움’으로 태어난다. 배우면서 새로운 작품을 빚을 수 있다. 배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훔친다면, 이는 ‘표절’이 될 뿐이고, 표절이란 도둑질이다. 표절을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새롭게 ‘내 작품 만들기’를 하지 못한다.
만화가도 방송작가도 모두 즐겁게 창작할 수 있기를 빈다. 만화가도 방송작가도 서로를 아끼고 섬길 뿐 아니라 사랑하고 보살피면서 새로운 작품을 아름답게 창작할 수 있기를 빈다.
배우는 사람은 늘 ‘고맙다’고 말한다. 배운 사람은 늘 ‘사랑한다’고 말한다. 훔치는 사람은 언제나 아무 말이 없다. 훔친 사람은 언제나 아무 소리가 없다. 4347.2.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