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4.2 - Vol.3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지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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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57

 


사진저작권이란 무엇인가
― 사진잡지 《포토닷》 3호
 포토닷 펴냄, 2014.2.1.

 


  사진저작권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잡지 《포토닷》 3호(2014.2.)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돈으로 뭐든 가능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 문제 없이 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성동훈/77쪽).”와 같은 이야기를 돌아본다면, 저작권이란 돈 문제가 아닙니다. 저작권 사용료로 돈을 더 주기에 반갑거나 고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누리거나 즐기는 사진 한 장이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작가들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 작업을 하지만 현장에서 촬영하는 모습을 보면 그 몰입도는 정말 대단해요(윤승준/25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온힘과 온마음을 쏟을 적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온힘을 쏟지 않은 사진이란 없습니다. 온마음을 바치지 않고 태어나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은 사진이 좋고 즐거워서 사진을 찍습니다. 좋고 즐거운 마음으로 찍는 사진이기에, 이 사진을 이웃과 스스럼없이 나눕니다. 좋고 즐거운 마음으로 찍어서 나누는 사진이기에, 비싼값을 치러 사진을 팔 생각이 아닙니다. 제값을 받고 제대로 대접을 받고 싶을 뿐입니다. 곧, 좋고 즐겁게 사진을 읽을 이웃과 동무를 바랍니다. 좋고 즐겁게 사진을 마주하면서, 사진마다 깃든 이야기와 사랑을 헤아릴 이웃과 동무를 기다립니다.


  사진저작권 사용료는 0원이 될 수 있고, 1억 원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0원에 거리낌없이 사진을 내줍니다. 누군가한테는 1억 원을 받고 똑같은 사진을 팝니다.

 


.. 온빛사진상 운영위 측은 “수 년간 사비를 들여 작업해 출판 및 전시를 통해 가치를 인정받을 권리가 있는 미발표 포트폴리오를 보도의뢰용 수량 이외에 전체를 요구하거나 무료로 게재하는 것은 홍보의 수위를 넘는 것”이라며 유감과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 곽윤섭 기자는 “보도자료에만 의지하면 대동소이한 기사가 나올 뿐이며 제한된 사진만으로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며 “다른 목적이라면 당연히 사진 원고료를 지급하지만 보도용 기사에까지 원고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  (82쪽)


  사진비평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비평을 하겠지요. 그러나, 사진비평은 ‘사진을 보여주는 비평’이 아닙니다. ‘사진을 이야기하는 비평’입니다. 사진을 이야기하지 않고 보여주기만 한다면, 이때에는 비평이 아닙니다. 신문에 싣는 기사도 아닙니다. 사진을 보여주기만 하는 신문이라면, 이때에는 ‘화보’가 될 테지요. 기사나 비평이 아닌 화보로 꾸민다면, 신문사에서는 마땅히 사진저작권 사용료를 제대로 치러야 합니다. ‘보도 기사’에까지 사진저작권 사용료(원고료)를 주어야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화보’로 쓰면서 사진저작권 사용료를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기사나 비평은 ‘보도자료’를 받아서 쓰지 않습니다. 기사나 비평은 사진을 보고 사진책을 읽으면서 씁니다. 기사를 쓰는 신문기자는 사진과 사진책을 저마다 슬기롭고 찬찬히 읽어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비평을 하는 비평가(또는 전문가나 작가)는 사진과 사진책을 스스로 슬기롭고 찬찬히 읽어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 나이가 몇이요 무슨 일을 했으며 몇 해쯤 사진을 배웠고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웠느니 하는 보도자료를 읽어야 ‘사진 소개’나 ‘사진책 비평’을 할 수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 소개’는 사진을 읽고서 합니다. ‘사진책 비평’은 사진책을 읽고서 합니다. 그러니까, 한겨레신문 곽윤섭 기자가 말한 “제한된 사진만으로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같은 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사진책 한 권을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할 적에 ‘사진책에 실린 사진 모두를 지면에 실어 보여주면서 소개하지 않’습니다. 사진상을 받은 어느 작가를 소개할 적에도 ‘사진상을 받은 작가가 만든 포트폴리오에 실린 사진을 모두 보여주면서 소개해야 이 작가를 제대로 잘 소개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 한 장을 읽고 소개글이나 비평글을 쓰더라도, 제대로 쓸 수 있어야 소개글이요 비평글입니다. 기자는 기사를 쓰는 사람이고 비평가는 비평을 하는 사람입니다. 보도자료에 기대어 보도자료를 간추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도자료 아닌 사진과 사진책을 스스로 느끼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삭히고 읽어서 글을 써야 비로소 기자요 비평가입니다.


  사진잡지 《포토닷》을 더 읽습니다. “해고노동자들이 처한 엄중하고 참혹한 상황을 뉴스처럼 바로 느끼게 하기보다는 그 상황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하고 싶었다. 뉴스에서는 이야기되지 않지만 그 상황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 어떤 것들,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지켜본다(윤성희/81쪽).”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새깁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떤 매무새요 마음인가를 차근차근 짚어 봅니다.

 


  사진기자로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꾸준하게 사진을 찍는 ‘할아버지’ 사진작가가 들려주는 “일기를 쓰듯이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사진은 역사라는 생각을 항상 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다 … 빛을 많이 본다. 지금까지 못 보던 풍경, 보는 순간에 가슴을 흔드는 이미지들을 포착하고자 한다(전민조/87, 89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으로 무엇을 찍을까요. 사진으로 찍는 이야기는 우리 삶을 어떻게 비출까요.


  사진저작권이란 무엇일까요. 신문이나 매체에서 사진을 소개하는 글이나 비평하는 글이란 무엇일까요. 신문기자나 비평가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소개하고 어떤 이야기를 비평하면서 사진길을 밝히는 몫을 맡는가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라디오에서 시를 한 줄 읊으면, 한 줄 읊는 만큼 저작권사용료를 치릅니다. 라디오에서 노래 한 가락 틀으면, 노래 한 가락 튼 만큼 저작권사용료를 치릅니다. 그런데, 방송 가운데 방송국 정규직 노동자가 촬영을 할 적에는 취재원한테 흔히 출연료를 지급하는데,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가 촬영을 할 적에는 취재원한테 출연료를 지급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똑같이 피디요 방송작가요 촬영기사이고, 똑같은 방송국에 나오는 방송이지만, ‘누가 찍느냐’에 따라 취재원이 출연료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갈립니다.

 


  “때때로 광고 촬영이 끝나면 허무하다. 내가 마치 그들의 아바타가 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표현에 대한 욕구에서 사진을 시작했는데 남의 욕구를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방전이 되곤 한다(111쪽/김한준).”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비평이란 어떤 글이 되는가 돌아봅니다. 상업사진을 찍는 이들은 그때그때 사진값을 번다고 한다면, 다큐사진을 찍는 이들은 언제 사진값을 벌까요? 신문이나 잡지에서 사진책을 소개해 주거나 알리는 일은 사진작가나 사진전시회에 도움이 된다고 할 만할까요. 사진책을 알리는 일을 하니, 사진가와 출판사는 신문사에서 사진을 달라고 하면 무턱대고 주어야 할까요.


  “일백 년 전, 하와이에서 사진을 공부한 최창근은 번역서 《자택독습 최신사진술》을 이 땅에 선보였다. 이유는 하나, 누구나 집안에서 독학, 독습으로 최신 사진술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진동선/115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은 누구나 스스로 배울 수 있습니다. 사진찍기는 누구나 혼자서 배워 혼자서 즐길 수 있습니다. 대학교를 다니거나 유학을 다녀와야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이름난 스승을 좇아다녀야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고 즐거운 마음일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스스로 좋고 즐거운 마음일 때에 밥을 맛나게 짓고, 노래를 신나게 불러요. 스스로 좋고 즐거운 마음일 때에 홀가분하게 놀고, 빙그레 웃으면서 글을 씁니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나 혼자서 스스로 사진찍기를 배울 수 있듯, 누구나 혼자서 스스로 사진읽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전문가가 알려주어야 사진읽기를 하지 않습니다. 신문기자나 비평가가 알려주니까 사진읽기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찍는 사진이듯, 스스로 즐겁게 읽는 사진입니다.


  사진책 《아이스께끼 파는 여인》(안목,2013)을 비평한 글에 나오는, “사진은 잘 찍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진다울 수 있을 때에 가장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빗대어 말한다면, 노래는 노래다울 때에 가장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 학교를 다니며 글을 배우거나 교과서를 익혀야 글을 쓰지 않아요. 악보를 읽거나 기획사 연습생을 거쳐야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아요. 즐겁게 쓰는 글이고, 즐겁게 부르는 노래예요. 사진 또한 즐겁게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에요(최종규/150, 153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저작권이란 ‘즐거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빚은 이야기가 사진 하나로 태어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사진저작권 사용료가 0원이 될 수 있고 1억 원이 될 수 있는 까닭이란, ‘즐거움’은 돈값으로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즐거움도 사랑도 꿈도 돈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사진작가는 이 사람한테는 거저로 사진을 선물해 줍니다. 사진작가는 저 사람한테는 1억 원을 받아도 사진을 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작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으면서 어깨동무를 하려는 이웃한테는 구태여 돈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으면서 꿍꿍셈을 번뜩이는 이가 엄청난 돈을 내밀 적에는 고개를 홱 돌립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하지요. 다시 말하지만, 작가는 사진을 사진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사진을 온몸으로 말합니다. 사진을 웃음으로도 말하고 노래로도 말합니다. 사진을 글 한 줄이나 말 한 마디로도 들려줍니다. 사진을 꿈 한 자락으로 선보이거나 춤 한 사위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포토닷》 3호에 나오는 사진작가 최광호 님 이야기처럼, 사진을 말하고 보여주며 나누는 길은 수없이 많습니다. 사진기를 쓰면서도 사진을 말하지만, 사진기를 안 쓰면서도 사진을 말해요.


  사진소개나 사진비평 또한, ‘사진 작품을 두루 보여주면서 할 수 있’는 한편, ‘사진 작품을 하나도 안 보여주면서 할 수 있’습니다.


  논문을 쓰는 학자가 이런 책 저런 자료를 살피며 논문을 마무리지을 적에, 학자한테 ‘내 책을 살핀 사용료를 내라!’ 하고 윽박지르는 작가는 없습니다. 그러나, 논문이 아닌 화보나 전시를 하는 자리라면, ‘내 책이나 내 사진을 화보나 전시에 썼으면 마땅히 사용료를 내야지!’ 하고 외칠밖에 없습니다. 마이클 케냐 님 사진을 놓고 불거진 일도 이와 같은 흐름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솔섬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그런데, 굳이 ‘다른 이가 찍은 그 자리 그 구도’를 똑같이 하면서 ‘이름과 돈을 얻으려’ 한다면 참 쓸쓸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그렇게도 찍을 만한 사진이 없었을까요? 창작하는 상상력이 그렇게도 없어, 다른 사람 구도를 고스란히 따라해야 했을까요?


  눈을 들면 온누리 모든 곳에서 아름다우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온누리 수많은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기에도 바쁘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훔치지 마요. 애써 화보를 만들지 마요. 즐겁게 창작을 해요. 기쁘게 비평을 해요. 사진저작권이란 즐거움입니다. 다른 사람이 즐겁게 누리며 빚은 좋은 꿈과 사랑을 함부로 망가뜨리거나 다치게 하지 마요. 오직 따사로운 손길과 눈길로 사진을 바라보기를 빌어요. 4347.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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