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읽고 다시 읽으며 또 읽는다

 


  지난해 한글날에 나왔어야 하는 책이 있다. 해를 넘겨 이월 끝무렵에 나오기로 하고는, 새삼스레 교정과 교열을 다시 본다. 지난해 한글날에 그대로 나와도 되었지만, 넉 달을 뒤로 미룬 바람에 새삼스레 손질할 대목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내가 쓴 글을 나 스스로 열 차례쯤 차근차근 되읽으면서, 또 이 글을 출판사 편집자가 나와 똑같이 열 차례쯤 차근차근 되읽어 주면서, 서로서로 생각을 주고받는 동안 글을 한결 곱고 정갈하게 가다듬을 수 있다고 배운다.


  누가 쓰는 글이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하룻밤 자고 나면서 새로 보고 들으며 배우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달에 새롭게 선보일 책에 넣는 글을 자꾸자꾸 되읽고 다시 읽으며 또 읽어 손질하고 가다듬으면서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나로서는 딱히 생각한 대목이 아닌데, 내가 글을 쓰며 ‘토씨를 잘 안 넣는다’는 대목을 누군가 짚어 주었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다시 살피니, 참말 그렇다. 나는 글에 토씨를 굳이 안 붙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골사람이 시골집에서 시골흙 살며시 만지며 시골노래 즐겁게 부릅니다”처럼 글을 쓴다. ‘시골흙을’이나 ‘시골노래를’처럼 잘 안 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글을 쓰는 줄 나 스스로도 몰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글을 썼을까?


  올해로 일곱 살과 네 살이 되는 두 아이하고 하루 스물네 시간을 늘 붙어 지내며 말을 듣고 들려주며 가르친다. 두 아이한테 어버이 말을 물려주면서 ‘지식이 되는 말’이 아니라, ‘넋이 깃든 시골사람들 사랑스러운 말씨’를 늘 듣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 오랫동안 어린이책을 읽고 아이들 말씨를 배웠다. 아이들이 쓴 글을 퍽 많이 읽었으며, 시골에서 시골사람 말을 늘 듣는다.


  가만히 돌아본다. 아이들 말씨를 살피면, 아이들은 토씨를 잘 안 붙인다. 아직 토씨를 마음대로 붙일 줄 모르기도 한다. 말이 좀 더딘 네 살 작은아이는 거의 모든 말에 토씨가 없다. 이름씨만 죽죽 늘어놓는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모두 알아챈다. 그렇다고 작은아이한테 토씨 없이 이름씨만 늘어뜨린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지만,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토씨 없이 말하곤 한다.


  꼭 시골사람만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여느 사람들은 으레 “밥 먹었소?” 하고 묻는다. “밥을 먹었소?” 하고는 잘 안 묻는다. “어디 가나?” 하고 묻지 “어디로 가나?”나 “어디를 가나?”처럼 잘 안 묻는다. “나, 읍내 가지.”라든지 “자전거 타고 저기 간다.”처럼 말한다. “읍내를 가지”라든지 “자전거를 타고”라든지 “저기로 간다”처럼 말하지 않아 버릇한다. “앞밭 김 매러 가자.”라든지 “버스 지나간다.”처럼 말한다. “앞밭에”라든지 “버스가”처럼 토씨를 붙이지 않는 마을 어르신들이다.


  어느새 아이들 말씨대로 글을 쓴다. 어느덧 마을 어르신 말투대로 글을 쓴다. 나는 글을 글로만 쓰지 않고, 언제나 입으로 말하면서 쓴다. 그러다 보니, 아이한테 말하는 대로, 또 아이들이 말하는 대로, 또 시골마을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나 또한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는 대로 글을 쓴다.


  책으로 나올 글에 토씨를 새롭게 하나하나 챙겨 붙이면서 생각한다. 굳이 이렇게 하나하나 토씨를 붙여야 할까? 토씨 안 붙이는 글이 익숙하지 않다는 사람이라면, 아마 아이들 말씨나 시골사람 말씨가 익숙하지 않으리라 느낀다. 아무래도, 책 좀 읽은 사람이나 이래저래 배운 사람은 교과서 같은 말씨나 신문이나 인문책에 나오는 말씨가 익숙하리라 본다. 나 같은 사람들이 쓰는 글투가 익숙하기는 어렵겠구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 글은 혼자만 읽는 글이 아니라 여럿이 읽는 글이니, 다른 사람들이 익숙하다고 하는 틀대로 내 글을 고쳐야 할까. 글 읽는 사람이 ‘익숙한 글투’에만 젖어들지 않도록, 다시 말하자면 ‘제도권 글투’와 ‘교과서 글투’에만 빠져들지 않도록, 시골사람 말투와 아이들 말투로 씩씩하게 글을 써도 될까.


  밤바람 소리를 들으며 다시 헤아려 본다. 나는 앞으로도 나대로 글을 쓰리라. 그러니까, 새로 맞이할 아침에 아이들한테 “얘들아, 우리 밥 먹고 버스 타고 바다 보러 가자.” 하고 말하듯이 글을 쓰리라 생각한다. 4347.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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