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못 쓴 시

 


  설날에 아이들과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시를 쓰려 했지만, 시를 한 줄도 못 썼다.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작은아버지하고 작은어머니하고 사촌동생한테 시를 하나씩 써서 선물하고 싶었는데, 연필을 쥐고 공책을 펼치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고흥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시를 못 쓴다. 신나게 놀다가 잠든 아이들을 품에 안아 다독이며 재울 뿐, 공책을 펼칠 겨를을 내지 못했다.


  설날 언저리에 왜 시를 못 썼을까. 아무래도, 작은댁 식구들이 아무도 안 왔기 때문이리라. 작은댁 식구는 긴 설 연휴에 외국여행을 떠났다. 우리 아버지는 동생(작은아버지)들한테 몹시 부아가 나셨다. (아버지한테는) 전화 한 통 없이 외국여행을 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부아를 삭히며 새해인사라도 하려고 동생들한테 전화를 거는데 아무도 안 받는다. 더 부아가 나신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낳아서 돌본 아버지와 어머니(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삿날에마저 다른 일로 바빠서 안 오는 동생들을 놓고 여느 때에도 몹시 부아가 나셨으니, 설에는 더더욱 부아가 나셨으리라. 나도 설에 안 찾아온 작은댁 식구들한테 써서 줄 시가 없다. 아니, 떠오르지 않는다. 막상 쓰더라도 건넬 길이 없기도 하다.


  고운 종이에 정갈하게 옮겨적은 시노래를 선물하고 싶어도, 받을 사람이 없다면 쓸 수 없다. 누군가한테 읽히려고 쓰는 글은 아니다만, 받을 사람이 없다면 선물도 못 하지 않는가. 받을 사람이 있기에 선물을 하지 않는가. 읽을 사람이 있어서 쓰는 글이라기보다, 사랑받을 사람이 있기에 사랑을 담아 쓰는 글이라고 느낀다.


  글을 쓰는 사람이란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란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책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다.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다. 4347.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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