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도 봉숭아물 들이기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봉숭아’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봉선화(鳳仙花)’라는 한자말을 쓴 일은 없다. 그런데 국민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교사들은 으레 ‘봉선화’라는 한자말만 쓰고 ‘봉숭아’라는 한국말은 거의 안 썼다. 중학교에서 배운 “울 밑에 선 봉선화야” 같은 노래가 있는데, 언젠가 “울 밑에 선 봉숭아야” 하고 낱말을 고쳐서 부르니, 음악 교사가 길다랗고 굵직한 몽둥이로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나로서는 그 옛날 ‘조선 여느 백성’이 고운 꽃송이를 한자말로 가리켰으리라고는 느낄 수 없어 한국말로 고쳐서 부르지만, 음악 교사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만 윽박질렀다. 겨레말을 빼앗기며 슬픔에 젖었다는 사람들이 ‘봉숭아’라는 꽃이름을 안 쓰고 ‘봉선화’라는 한자말을 썼을까? 나로서는 믿기지 않는다.


  졸린 작은아이 낮잠을 재우는 동안 할머니가 큰아이 손가락마다 봉숭아물을 들여 주신다. 봉숭아잎을 미리 빻아서 봉지에 싸고는 얼려 두셨다고 한다. 그래, 봉숭아물을 꼭 봉숭아꽃이 필 무렵 들여야 하지는 않아. 한겨울에도, 설에도, 봄에도 얼마든지 물들일 만하지. 봉숭아잎을 빻아 얼려 놓을 수 있다면, 언제라도 꺼내서 곱게 물을 들일 만하지.


  나는 우리 어머니 아이일 뿐 아니라, 어여쁜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인 줄 새삼스레 돌아본다. 우리 시골집에는 아직 봉숭아가 피어나지 않지만, 올해에는 길가에서 자라는 봉숭아를 잘 살펴서 잎을 알뜰히 그러모아 틈틈이 빻아 놓아야겠다. 4347.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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