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자 - 히말라야 도서관에서 유럽 헌책방까지
김미라 지음 / 호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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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56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책들
― 책 여행자
 김미라 글
 호미 펴냄, 2013.12.24.

 


  김미라 님이 쓴 《책 여행자》(호미,2013)를 읽습니다. 김미라 님은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고, 여러 나라 책방을 찬찬히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지구별을 떠도는 책을 만났고, 스스로 지구별을 누비면서 책 하나 깃드는 삶자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요.


  책은 여행을 합니다. 책이 하나 태어나기까지 숲에서 오래오래 자라다가 잘린 나무가 책이 되니, 종이에 어떤 이야기가 얹히든, 모든 책은 여행을 합니다. 기나긴 나날 새들 노랫소리를 듣고 살던 나무입니다. 오랜 나날 풀내음을 맡고 햇볕을 먹으며 빗물을 마시던 나무입니다. 온갖 짐승들 나고 자라는 삶을 지켜본 나무요, 숱한 벌레들 한살이를 바라본 나무입니다.


..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옮겨 가는 동안 어느덧 나는 키가 쑥쑥 자라나 글씨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 드넓은 바다를 건너 이 높은 히말라야까지 오게 된 이 책들은 대체 어떤 기억을 담고 있을까 … 인간은 책을 남겼다. 그리고 책은 우리에게 희망을 남겨 주었다 … 이 비극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렇게 과격하게 테러를 행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어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  (8, 12, 19, 23쪽)


  푸릇푸릇 풀이 돋습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덮인 땅이 아닌 흙으로 된 땅에서는 한겨울에도 푸릇푸릇 풀이 돋습니다. 우리 집 마당 한쪽 쪼개진 틈에서 풀이 돋고, 대문 아래쪽 시멘트 갈라진 자리에서 풀이 돋습니다. 날마다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대문 아래쪽에서 유채풀과 갓풀이 씩씩하게 잎사귀를 벌립니다. 집 둘레 흙땅에서도 갓풀은 검푸르게 잎사귀를 키웁니다.


  조물조물 올라오는 쑥풀을 바라봅니다. 뒤꼍 매화나무 가지마다 불긋불긋 조그마한 봉오리가 오릅니다. 이 봉오리마다 새봄에 고운 꽃잎을 벌리겠지요. 봄바람 따라 살랑살랑 향긋한 매화내음을 나누어 주겠지요.


  작은아이를 안고 후박나무 봉오리와 동백나무 봉오리를 만지도록 합니다. 큰아이는 키가 제법 크니 스스로 봉오리를 만져 보라고 말합니다. 두 나무 모두 겨우내 짙푸른 잎사귀를 달고, 새봄부터 천천히 봉오리를 터뜨립니다. 동백나무가 먼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후박나무는 천천히 꽃봉오리를 터뜨려요.


  동백꽃은 사람들이 곧 알아챕니다. 동백꽃을 보면서 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와 달리 후박꽃이 필 적에 알아채거나 알아보는 사람은 드뭅니다. 후박꽃이 지고 후박알 맺힐 적에 알아채거나 알아보는 사람 또한 드뭅니다. 그러나, 후박꽃이 피면서 후박알 맺힐 적에 누구보다 멧새가 곧바로 알아채요. 누구보다 멧새들은 후박알을 먹으려고 후박나무를 찾아듭니다.


..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때마다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새로움이 발견된다 … 지금까지 어떤 책을 금지한다고 해서 읽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책을 읽도록 강요한다고 해서 영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 상상력 없이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도 사람을 편협하게 만들고 만다 … 고전이 이토록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읽고 또 읽게 만드는 숨겨진 힘이 있어서가 아닐까 … 여행하는 동안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그냥 나는 걷고, 보고, 듣고, 느끼기에만 충실했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란, 그 순간들의 경험이 다였다 ..  (25, 36, 39, 59, 76쪽)


  매화꽃이 질 무렵 매화잎이 돋습니다. 매화잎이 돋고 매화꽃이 저물면서 매화알이 익어요. 처음에는 푸르딩딩한 빛이요 차츰 누르스름한 빛입니다. 매화알도 살구알처럼 노오란 빛이 맑으면서 곱지요. 다만, 매화알은 살구알처럼 달콤하지 않습니다. 살구알은 달면서 시큼한 맛이 좋아 먹지만, 매화알은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돌아요.


  사람들은 봄에 으레 벚꽃이나 매화꽃을 보며 즐거워 합니다. 벚꽃이나 매화꽃이 지면 꽃놀이는 한동안 잊습니다. 그런데, 꽃이 진 뒤에도 잎빛은 곱습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빛과 푸르게 빛나는 새잎 빛깔은 무척 잘 어울려요. 여기에, 푸른 빛에서 노르스름 익는 열매빛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립니다.


  고들빼기라든지 씀바귀라든지, 사람들은 흔히 뿌리만 캐서 먹습니다. 고들빼기잎이나 씀바귀잎을 먹는 사람은 드뭅니다. 고들빼기꽃이나 씀바귀꽃을 곱다고 들여다보는 사람도 드물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즐겨 찾아서 먹지 않으니 고들빼기잎이나 씀바귀잎이 써요. 사람들이 늘 들여다보면서 꾸준히 뜯어서 먹으면 고들빼기잎이나 씀바귀잎도 쓰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겨먹지 않으니 쓴맛만 짙어요.


  민들레잎도 즐겁게 뜯어서 먹을 적에 쓴맛이 감돌지 않으면서 싱그러워요. 토끼풀잎도, 괭이밥풀잎도 모두 똑같아요. 즐겁게 자주 먹으면 싱그러운 풀맛이지만, 눈여겨보지 않거나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쓰기만 한 맛이 되고 말아요.


.. 정말 중요한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 내가 노란 조명을 나지막이 켜 놓고 밤이 늦도록 책을 읽는 걸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어떤 빛보다도 나를 깨우는 푸른 새벽 햇살만큼 설레게 하는 건 없다 … 시간이 흘러 영어를 배우게 되고 수업도 따라가게 되면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유명한 회사에 취직할 가능성이 높아져서도 아니고 외국인한테 척척 말을 걸 수 있게 되어서도 아니었다. 세상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점이 단연 최고로 신나는 일이었다 ..  (125, 133, 176쪽)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무입니다. 나무 한 그루는 수백 해나 수천 해를 살아갑니다. 나무 한 그루가 스러져 죽어도 새로운 나무들이 뒤이어 자랍니다. 나무마다 푸른 바람을 내뿜고 푸른 열매를 내놓습니다.


  나무를 마주하는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시골에서 나무를 마주하는 사람이 있고, 도시에서 나무를 마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즐겁게 나무를 마주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무 생각 없이 나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풀입니다. 풀포기는 수천 수만 수억 포기 골고루 돋습니다.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면서, 돋고 시들고 또 돋고 시들면서, 들과 숲에 푸른 옷을 입혀요.


  풀을 먹는 사람은 다 다릅니다. 시골에서 집 둘레 풀을 그날그날 뜯어서 먹는 사람이 있고, 도시에서 가게에 찾아가 풀을 사다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수 씨앗을 뿌려 푸성귀를 얻는 사람이 있고, 풀씨 스스로 날려 돋은 풀을 고맙게 얻어서 먹는 사람이 있어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책입니다. 내가 읽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내가 읽어도 그 자리에 있어요. 내가 읽은 책은 우리 집 책꽂이에 깃들고,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새책방이나 도서관 책시렁에 깃들다가, 누군가 따사로이 내민 손길을 타고 이웃집 책꽂이에 깃듭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저마다 다릅니다. 스스로 책값을 벌어서 한 권씩 사서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책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버이한테 돈이 많아 어느 책이든 걱정없이 사서 읽는 사람이 있고, 어버이한테 돈이 없어 어느 책이든 걱정하며 구경조차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 눈을 돌려 보니 작은 책방 한쪽에서 어머니가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다. 그 이야기에 온갖 표정을 지으며 빠져드는 아이의 모습을 본다 … 골목을 돌 때마다 새로운 서점이 나타나는 이 경이로운 도시는 … 이 공간에서 만나는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난해한 철학서든 아기자기한 요리책 들은 누군가가 읽고 좋았던 기억이 담겨 있다 ..  (191, 196, 259쪽)


  책은 누가 읽을까요. 책방은 어떤 곳일까요. 책을 많이 읽은 사람 넋은 어떠할까요. 책방에는 어떤 책이 모일까요. 책을 쓰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까요. 책방을 꾸리는 사람은 이웃들한테 어떤 책을 알려주고 싶을까요.


  책은 누가 안 읽을까요. 책방이 없는 마을은 어떤 삶터일까요.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사람 얼은 어떠할까요. 책방이 없는 마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가슴에 담으면서 살아갈까요.


  《책 여행자》라는 책은 어떤 책이 될까 생각합니다. 《책 여행자》라는 책을 책꽂이에 건사하는 책방에는 어떤 이야기가 흐를까 생각합니다. 《책 여행자》라는 책을 쓴 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합니다. 《책 여행자》를 읽은 내 이웃들은 어떤 빛을 가슴에 새기면서 오늘 하루를 누릴까 생각합니다.


  박주가리 씨앗을 후후 불며 마당에서 날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그믐을 지나 보름으로 다가서는 달빛을 가만히 느끼며 생각합니다. 설을 앞두고 할머니 할아버지 뵈러 길을 나서기 앞서, 일찍 잠들려 하지 않으면서 더 놀고 더 조잘조잘 노래하려는 아이들을 다독이며 생각합니다. 방바닥에 불을 넣으며 생각합니다. 설거지를 하며 생각합니다. 빨래를 하며 생각하고, 다 마른 옷가지를 개며 생각합니다.


  책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책은 어디로 흐를까요. 책에 스민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손길을 타면서 어떤 사랑꽃으로 새로 태어날까요.


  풀씨가 날려 풀밭이 넓어집니다. 꽃씨가 날려 꽃밭이 넓어집니다. 나무씨가 퍼져 숲이 깊어집니다. 책씨가 한 사람 두 사람 손길을 거쳐 널리 퍼지면서 책숲이 이루어집니다. 4347.1.2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을 말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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