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물결 책읽기
억새가 물결친다. 억새물결이 한들거린다. 억새가 춤추는 옆으로 논배미가 펼쳐진다. 이 논임자는 이 억새를 왜 그대로 둘까. 오늘날 같은 시골에서는 억새를 베어 지붕을 삼거나 바구니를 짤 일도 없는데. 성가시니까 그대로 둘까. 가을걷이 마친 뒤에는 굳이 건드릴 까닭 없으니 내버려 둘까. 오며 가며 마음을 포근하게 건드리면서 살랑이니 사랑스럽다 여겨 곱게 돌볼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올 무렵, 온 시골마을에 농약내음이 번진다. 기계를 들고 풀 목아지를 치는 분들도 있으나, 으레 논둑과 밭둑에 농약을 죽죽 뿌린다. 논일과 밭일을 앞두고 바야흐로 시골은 농약물결이다. 옛날 같으면 논둑과 밭둑에서 풀을 뜯느라 부산했을 테고, 논둑과 밭둑에서 자라는 억새를 낫으로 잘라 정갈하게 건사하려고 애썼으리라.
도시에 있는 공장에서 플라스틱 그릇과 바구니를 쏟아낸다. 도시에 있는 공장에서 화학섬유 옷을 뽑아낸다. 시골사람은 이제 시골에서 억새를 벨 일도, 모시를 벨 일도 없다. 억새도 모시도 그저 잡스러운 풀 가운데 하나로 여길 뿐이다. 요즈음 삼베옷은 몹시 비싼 값에 사고팔리지만, 삼씨를 심어 삼풀을 거두는 일손이 없을 뿐더러, 물레도 베틀도 없다. 박하풀이 어느 시골 어느 밭둑에서 자랄까. 질경이가 어느 시골 어느 밭둑에서 고이 살아남을까.
억새물결을 바라본다. 억새춤을 맞이한다. 억새는 물결치듯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다. 사그락사그락 사락사락 싸싸 쏴라락쏴라락 온갖 소리를 들려주고 갖은 노래를 베푼다. 억새밭 곁을 지나면서 억새내음을 맡는다. 억새가 흩뿌리는 숨결을 받아먹는다. 4347.1.1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꽃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