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 일기 - 청계천 40년 전 한국의 마을 어제와 오늘 2
최협 지음 / 눈빛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8

 


이웃 관찰일기와 내 삶글
― 판자촌 일기, 청계천 40년 전
 최협 엮음
 눈빛 펴냄, 2012.2.18.

 


  최협 님이 엮은 인문책 《판자촌 일기, 청계천 40년 전》(눈빛,2012)을 읽습니다. 마흔 해 앞서 최협 님이 대학생이던 때에 서울 청계천 둘레 쪽방에서 지내면서 이곳 사람들을 지켜보고 만난 이야기를 갈무리하여 엮은 책입니다. 이 책에는 최협 님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청계천 둘레에서 판자촌 사람들과 어깨동무하던 발자취를 살필 수 있습니다. 다만, 최협 님이나 다른 조사자들은 ‘주민’은 아닙니다. ‘조사자’일 뿐입니다. 마을사람과 섞이기는 하되 마을사람처럼 일하지는 않습니다. 마을사람과 한 곳에서 먹고 자지만, 마을사람처럼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는 않습니다.


.. 1960년대에 10여 년 남짓 마장교 아래 청계천변에 머물며 생활을 꾸려 갔던 사람들의 삶과 그 모습은 우리의 기억에서 갑작스레 잘려져 나갔다. 그 결과 조국 근대화의 찬가가 울려퍼지던 당시 한국 사회의 그늘진 구석에서 힘겹게 살아갔던 이들의 자취나 흔적을 우리는 영영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 오늘날 판자촌 주민에게 의욕을 불어넣는 새 이상의 모델은 자수성가로 성공한 비즈니스맨이다. 바꿔 말하면 판자촌민은 새 개인주의적 물질주의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 도약적으로 전진하는 것 같으며, 적어도 전통의 쇠사슬을 벗어 버리는 데는 여타의 도시 주민보다 빠른 것 같다 ..  (19, 174쪽)


  《판자촌 일기》는 판자촌에서 함께 지내며 지켜본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웃들 삶을 지켜본 이야기도 ‘살아가는 이야기’라 할 테지만, 스스로 이곳에서 생계를 꾸리지는 않는 만큼 ‘내 이야기’는 없습니다. 모두 ‘다른 사람 이야기’입니다. 이곳으로 들어와서 이곳에서 생계와 살림을 꾸려야 하는 사람들 하루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적바림한 이야기입니다.


  요즈음에도 골목동네에서 방 한 칸 얻어, 골목동네 사람들 삶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이야기를 적바림하는 대학생이나 조사자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새는 중앙정부에서 ‘생활문화유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새로운 인문지리학을 갈무리해서 책으로 선보이기도 합니다. 아파트로 바꾸려는 골목동네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지내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거나 이들이 남긴 살림살이를 몇 가지 건사해서 전시회도 마련하고 박물관을 짓기도 해요.


  여러모로 뜻이 있다고 느끼지만, 어느 모로 보면 아쉽습니다. 재개발을 해서 아파트를 짓더라도, 골목동네 한쪽을 그대로 두면 굳이 박물관 새 건물을 안 지어도 됩니다. 골목집 몇 채를 그대로 두면 고스란히 박물관입니다. 골목집을 손질해서 ‘민박’이나 ‘여행자 숙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골목집을 고쳐서 ‘마을도서관’으로 꾸밀 수 있습니다.


.. 장씨의 부인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둑방의 마장동 판자촌은 서울에 있지만 실제로는 서울이 아니다. 시골보다 좋은 점이 하나도 없고, 만일 시골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사람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자동차가 많아 좋은 점도 있지만 교통사고의 위험도 더 많고, 공기가 너무 나쁘다. 그래서 서울이 싫다.” 그녀는 또한 “나는 아직까지 창경원도 가 보지 못했다. 나는 서울의 중심가도 한번 가 보고 싶고, 좋은 곳을 다니며 구경을 하고 싶은데 아직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돈이 없으니 구경을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하고, 그저 한숨만 나온다.” … 할머니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농사에 비하면 쉽고 재미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농촌에서는 일은 힘든데 임금은 너무 낮다. 그래서인지 서울에 와 보니 모든 사람들이 농촌에서 올라와 있더라”는 말을 했다 ..  (52, 67쪽)


  풀로 지붕을 삼는 시골집을 몇 채 놓고서 ‘민속촌’을 꾸미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골집을 고스란히 살리는 민속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시골집을 모조리 없애고 나서 한참 뒤에야 ‘사진이나 자료 몇 가지를 바탕’으로 새롭게 짓기 일쑤입니다. 무엇보다, 풀로 지붕을 삼는 시골집이 예쁘게 있는 동안에 이 시골집이 ‘문화’이거나 ‘역사’이거나 ‘예술’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골목집도 이와 같아요. 가난한 사람이 모인 동네이건 아니건, 골목집을 문화나 역사나 예술로 제대로 느낀 이들이 거의 없어요. 예나 이제나 ‘철거 대상’으로 삼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도시 미관’을 망가뜨린다고 여깁니다.


  민속촌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시골집이 ‘민속마을’이요 ‘전통마을’이니까요. 박물관을 따로 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골목집이 ‘박물관’입니다.


  한국사람이 즐겁게 마실을 하는 유럽 나라를 떠올립니다. 따로 으리으리하게 지어야 박물관이 아니에요. 여느 사람이 살아가는 여느 집이 바로 박물관 구실을 합니다. 수수한 집들이 쉰 해, 백 해, 이백 해, 오백 해를 흐릅니다. 고치거나 손질하거나 새로 지으면서 아기자기한 마을을 이룹니다.


.. 서울시에 속한 이곳이지만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는 집이 있다. 시내에서는 몇 년 동안 살아도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이사 온 사람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오는 풍습이 있어 쉽게 사귈 수 있다. 서로 협력하는 일은 시골처럼 잘되지는 않으나 서울 깍쟁이처럼 인색하지도 않다 … 주민들 중에는 장씨와 이공엽 씨의 반대파가 몇몇 있는 것 같다. 제일 반대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시 당국과 손을 잡고 일을 하고 있는 각 동의 통장과 반장들일 것이다 … 이곳 주민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할머니도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고 약을 써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감기 정도면 아스피린을 먹을 줄 아는데 아무 때라도 병원에 갈 줄은 모르고 있다 ..  (83∼84, 133, 139쪽)


  오늘 짓는 아파트는 서른 해 뒤에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로 남을까 궁금합니다. 오늘 짓는 공장과 발전소는 쉰 해 뒤에 사회문화나 사회역사로 남을까 궁금합니다. 아마 백 해나 이백 해 뒤에는 4대강사업이나 ‘수도물 청계천’도 문화나 역사 대접을 받겠지요. 밀양에 송전탑을 밀어붙이는 모습도 삼백 해나 오백 해 뒤에는 오늘 우리 사회나 역사를 읽는 이야기로 삼을 테지요.


  일제강점기부터 얼마 앞서까지 ‘구비문학’을 모은다면서 적잖은 학자들이 시골과 골목을 돌아다녔습니다. 머지않아 구비문학을 더는 모을 수 없을 텐데, 구비문학을 모으지 못하면, 앞으로는 어떤 ‘여느 사람 이야기’를 모으려 할까요. 연속극을 보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추억을 구비문학으로 모으려 할까요. 자가용을 몰고 외국여행 다닌 사람들이 들려주는 경험을 구비문학으로 모으려 할까요.

 
  삶이 있기에 이야기가 있어 구비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자료를 모아 인문학을 이룹니다. 권력이나 이름이나 돈하고는 멀리 떨어졌으나, 이웃끼리 오순도순 아끼고 사랑하는 삶이 있어서 이야기가 샘솟았습니다. 책으로 엮든 논문으로 묶든, 삶이 있을 때에 이야기가 있어,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무언가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학을 하든 인문학을 하든, 여느 사람들이 스스로 씩씩하고 꿋꿋하게 일구는 하루가 있을 때에, 이 하루를 발판으로 무언가 꾸밀 수 있습니다.


.. 내가 살고 있던 현저동 막바지의 집들은 대개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서 서기도 어려운 낮은 지붕에 콜타르를 바른 단칸방이었다. 입구 바로 안에는 약간 마루를 낮춘 작은 부엌이 있고, 주실은 2∼3평의 온돌방이다. 판잣집은 가파른 비탈을 깎아낸 좁은 평지에 반쯤 허리를 걸치고 반은 1.5미터 내지 4.5미터 높이의 축대 위에 버티고 있다. 같은 평면 위에 정확히 들어앉은 집은 하나도 없고, 위태위태한 지름길이 바탈을 끼고 직로처럼 상하종행으로 퍼져나갔다 … 우리는 “나는 좀더 잘살고 싶다”는 말을 거듭해서 들었다. 이것은 농촌 지방민의 불만을 표시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설명이다 ..  (158∼159, 163쪽)


  《판자촌 일기》처럼 ‘관찰일기’를 써도 인류학이나 인문학을 할 수 있습니다. 《판자촌 일기》는 1970년대 첫머리 서울 청계천 언저리 삶자락을 잘 보여준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이렇게 관찰일기를 쓰지 말고, 스스로 삶을 일구면서 ‘삶일기’를 써 보면 어떠랴 싶어요.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면서 관찰일기를 쓰는 일은 좀 그만두고, 스스로 삶을 새롭게 지으면서 날마다 꾸준히 삶일기를 쓰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소로우 님이 쓴 《월든》처럼, 스스로 삶을 누리고 짓고 일구고 가꾸는 모습을 차근차근 적바림하면 어떨까 싶어요. 시튼 님도 이녁 삶을 스스로 갈무리했어요.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 님도 스스로 알래스카에서 살아가면서 이녁 이야기를 손수 갈무리했습니다.


  학자들이 ‘이웃 아닌 구경꾼’으로서 구경하는 관찰일기를 쓰기보다는, 마을사람 스스로 마을살이를 쓸 수 있도록 이끌고, 학자는 학자대로 이녁 스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쓸 때에 서로 아름다우면서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인문책 《판자촌 일기》로 1970년대 첫머리 서울 청계천 언저리를 살필 수 있기는 하지만, 참말 청계천 사람들 목소리는 아닙니다. 청계천 사람들 눈높이나 삶자리에서 들여다본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으로는 ‘내가 어디에 서는 사람인가’를 돌아보면서 ‘내가 선 곳을 아끼고 사랑하는 삶’을 이야기 한 타래로 일구는 이들이 늘어나기를 빌어요. 4347.1.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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