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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민낯 - 여섯 여자의 30일 행복 실험
하이힐과 고무장갑 지음 / 샨티 / 2013년 12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150
우리는 누구나 늘 부자입니다
― 행복의 민낯
하이힐과 고무장갑 글
샨티 펴냄, 2013.12.16.
새벽에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가 문득 깨닫습니다. 아차, 엊저녁에 밥냄비를 안 비웠구나, 엊저녁에 잠들기 앞서 누런쌀 불려야 했는데 안 불렸구나. 부랴부랴 밥냄비를 비우고 설거지를 합니다. 냄비에 쌀을 붓고 씻습니다. 흰쌀밥 아닌 누런쌀밥 먹으니 아침저녁으로 쌀을 제때 불려야 하는데, 가끔 깜빡 잊고 지나갑니다.
미리 안 불렸으니 흰쌀밥으로 아침을 지을까 생각하다가, 세 시간쯤이라도 불리고서 작은 불로 조금 더 오래 끓이자고 생각을 고칩니다. 물을 조금 더 붓고 오래 끓이면, 미처 덜 불렸어도 그리 딱딱하지는 않습니다.
.. 우리 딸들에겐 나처럼 배우고, 탐구하고, 도전할 기회가 박탈된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아직 나도 세상에서 더 배우고 싶고, 더 탐구하고 싶고, 더 도전하고 싶은 게 많아요. 내겐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을 돈(자유)이 필요해요 … 어린 시절 결핍을 겪은 사람들, 즉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살아온, 뭐랄까 ‘결핍이 있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몸 안에 행복이란 공간이 자리를 잡을 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해요 .. (25∼26, 35쪽)
섣달이 무르익습니다. 며칠 뒤면 동지입니다. 동지를 앞두고 아침이 늦으며 저녁이 이릅니다. 밤은 더없이 어둡습니다. 한 해 가운데 밤이 가장 긴 날이 찾아옵니다. 아직 일월과 이월이 지나야 봄이건만, 나는 늘 섣달 동지날부터 ‘겨울이 풀리는구나’ 하고 여깁니다. 밤이 조금씩 짧아지는 기운을 느끼면서 겨울을 한결 즐겁게 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거꾸로 밤이 가장 짧은 하지를 지나면서 ‘곧 겨울이 오겠구나’ 하고 여겨요. 천천히 저무는 여름을 기쁘게 누리면서 겨울을 맞이해야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부터 이 여름은 한 해가 흘러야 다시 찾아온다고 느끼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맞아들입니다.
겨울에는 아이들 이불깃 여미느라 밤새 뒤척입니다. 여름에는 아이들 부채질 하느라 밤새 꾸벅꾸벅 졸듯이 잡니다. 어느 모로 보면 힘들다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스스로 좋아서 이렇게 살아갑니다. 아이들이 겨울에 따스히 잘 수 있기를 바라고, 여름에 시원하게 잘 수 있기를 빕니다. 나는? 아이들이 따스히 잔다면, 나도 곁에서 따스히 잘 수 있어요. 아이들이 시원히 자면, 나도 곁에서 시원히 잔다고 느껴요.
함께 먹는 밥도 언제나 똑같아요. 아이들이 맛나게 먹을 밥이란, 나도 함께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밥입니다.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책이란, 나부터 스스로 즐겁게 읽을 만한 책입니다. 아이들과 다니고 싶은 숲이나 바다나 들이란, 나도 이 아이들과 다니고 싶은 숲이나 바다나 들이에요.
혼자 먹기에는 아쉽습니다. 혼자 읽기에는 아쉬워요. 혼자 푸른 바람과 맑은 햇볕 누리기에는 더없이 아쉽지요.
.. 30대까지는 정말 우리 가족이 서울에 경제적으로 정착하는 게 지상과제였죠. 열심히 맞벌이했고,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제 삶에 물기가 없더라구요. 가족도 있고 돈도 벌고 뭔가 굴러가고는 있는데, 정작 나는 허깨비 같고 바싹 말라 있는 느낌이었어요. 서울이 이렇게 넓은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직장 사람과 달랑 우리네 가족 말고는 없다는 게 물기라곤 없는 팍팍한 모래 강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 어렸을 때의 환경이 마흔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은 게 .. (32, 50쪽)
매서운 된바람 부는 겨울에는 이 된바람 있기에 겨울답다고 느껴요. 시원한 살랑바람 부는 여름에는 이 살랑바람 있으니 여름답구나 싶어요. 추위와 함께 누리는 겨울입니다. 더위와 함께 맞이하는 여름입니다. 손이 꽁꽁 얼면서 겨울을 즐깁니다. 땀을 후줄근히 흘리면서 여름을 맛봅니다.
나무를 바라보아요. 나무는 봄에도 가을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늘 튼튼하며 씩씩한 숨결입니다. 더운 여름에는 활짝 피어나듯이 푸르고, 추운 겨울에는 다부진 모습으로 말갛습니다. 추운 날에도 푸른 숨결 나누어 주고, 더운 날에도 푸른 숨결 베풀어 주어요.
나무가 있기에 모든 목숨들한테 삶이 있어요. 나무가 자라기에 모든 목숨들이 보금자리를 얻어요. 나무가 없는 뭍이라면 냇물도 샘물도 없으리라 느낍니다. 나무가 없는 땅이라면 흙이 몽땅 메마르겠지요.
나무 없이 삶이 있을까요? 오늘날 도시는 나무란 없이 시멘트와 아스팔트뿐인데, 나무를 모두 밀어낸 탓에 에어컨과 난방기를 돌려야 해요. 나무를 모두 짓밟거나 괴롭히기에, 도시에서는 수도물 마셔야 하고 재채기 끊이지 않으며 병원이 줄줄이 늘어서요.
어느 짐승도 병원을 들락거리지 않아요. 어느 물고기도 병원에 몸져눕지 않아요. 어느 벌레도, 어느 새도, 어느 벌과 나비도, 어느 제비와 까치와 참새도 병원에 기대지 않아요. 오직 사람만 병원을 세우고, 병원에 얽매이며, 병원과 함께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스스로 나무를 베거나 밀거나 없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나무를 잊고 나무를 버리며 나무를 사랑하지 않으니, 자꾸 아프고 힘겨우며 고단해요.
.. 날씨가 그새 많이 선선해졌다. 감사하다 … 남편의 반응이 섭섭하긴 했지만 큰 동요 없이 담담하게 내 갈 길을 생각하는 내 모습이 정말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 단행본들을 사면서는 아이들에게 이 책이 얼마만큼 ‘감동’을 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했다. 그런데 전집을 살 때는 아이들에게 얼마만큼 ‘효과’가 있을까를 기준으로 삼았다 .. (91, 128, 140쪽)
이야기책 《행복의 민낯》(샨티,2013)을 읽습니다. 아줌마 여섯 사람이 조잘조잘 주고받는 수다를 알뜰히 묶은 이야기책입니다. 아줌마 여섯 사람은 아마 서울에서 사는구나 싶고, 아파트 또는 아파트와 비슷한 집에서 살아가지 싶습니다.
아줌마 여섯 사람은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를 낳고 살림을 꾸리지 싶습니다. 집에만 얽매이고 싶은 마음이 없고, 아이한테만 달라붙고 싶은 뜻이 없으리라 느껴요. 그렇다고 회사에 목을 매달고 싶지도 않으리라 느껴요.
그러면, 이 아줌마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을까요. 이 아줌마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싶을까요. 이 아줌마들은 꿈과 사랑을 어디에서 찾아 어떻게 누리고 어떻게 나누고 싶을까요.
.. 평일의 광화문행 버스에는 나를 포함해 여섯 명뿐이다. 한가하고 헐렁해서 좋다. 목동 사거리를 지나고부터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눈을 들어 보니 신촌을 지나고 있었다 … 큰딸과 함께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그늘진 벤치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쐰 날이었다 … 오늘 내가 행복하기 위해 한 선택은 자가용 대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학교 가는 것이었다. 버스 타러 걸어가는 길 10분, 버스와 전철 타고 가는 시간 1시간 30분, 내린 뒤 걸어가는 데 10분이 걸렸다 .. (175, 205, 217쪽)
돈이 있대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이 있어야 밥을 먹습니다. 밥은 돈으로 사고팔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가게와 밥집이 있지만, 가게나 밥집 또한 돈이 있대서 밥을 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흙을 일구어야 쌀을 얻고, 누군가 볍씨를 갈무리하면서 살뜰히 아껴야 밥이 태어날 수 있거든요.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들이 봄 한철에 모내기를 안 하면 이 나라에 어떤 일이 생길까 궁금하곤 해요. 시골 흙지기가 꼭 한 해만 흙일을 안 하고 시골에서 조용히 오순도순 지내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곤 합니다.
파업? 아닙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 모두 고단하니까 좀 쉬셔야지요. 해마다 죽어라 논밭 일구지 않아도 이제는 시골 할매와 할배 넉넉히 먹고살 만해요. 굳이 배추나 무를 안 심어도 유채와 갓은 씩씩하게 돋아요. 상추는 씨만 죽 뿌려도 저희끼리 알아서 엄청나게 자라지요. 상추씨를 안 뿌려도 들은 온통 풀밭이 되어 이 풀 먹고 저 풀 먹느라 바쁩니다. 그러니까, 시골사람은 꼭 한 해쯤 농사를 안 지어야 무언가 바뀔 수 있다고 느껴요. 시골사람이 농사를 안 지어 도시사람을 쫄쫄 굶겨야 모두들 머리를 번쩍 깰 수 있으리라 느껴요.
오로지 돈만 바라보고 돈만 생각하는 도시사람한테, 발등에 떨어지는 불처럼, 한국 농사꾼 모두 한 해 동안 ‘안식년’을 누려야지요. 왜 도시사람만 안식년이니 휴가이니 육아휴직이니 누립니까. 시골 농사꾼도 안식년을 누릴 노릇입니다. 수천 수만 수십만 해를 이은 ‘일’을 쉬고, 시골 농사꾼이 권력자와 양반과 부자와 도시사람 먹여살리던 고리를 싹둑 자를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돈이면 다 되는 줄 여기는 도시사람한테, 돈이면 백화점에서 사다 먹으면 된다고 여기는 도시사람한테, 돈이면 가게와 밥집에 가서 사다가 냉장고에 쟁이면 된다고 여기는 도시사람한테, 시골 흙지기 할매와 할배가 본때를, 아니 삶을, 사랑을, 꿈을, 빛을 보여줄 노릇이라고 느껴요.
우리 삶은 돈으로는 아무것도 안 되어요. 우리 삶은 오직 삶으로 이룹니다. 삶을 가꾸며 삶이 있어요. 사랑을 가꾸며 사랑이 자라요. 꿈을 가꾸며 꿈이 피어나요.
우리는 누구나 늘 부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늘 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늘 평화요 민주이며 통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 돈에 매달리지 않아도 돼요. 애써 무슨무슨 운동을 하지 않아도 돼요. 굳이 머리띠를 둘러야 하지 않아요. 밑바탕을 바꾸면 돼요. 삶을 고치면 돼요.
생각해 보셔요. 한국땅 시골마을 모든 농사꾼이 ‘안식년’을 누리면, 농협을 비롯해 농림부와 대통령과 시장과 군수와 국회의원과 의사와 판사와 기자와 지식인과 소설가와 교사와 공장 노동자와 운전기사와 이런저런 사람들 모두 어떻게 될까요? 미국이나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쌀과 열매와 곡식 사다 먹으면 되나요?
삶을 삶답게 사랑하면서, 사랑을 사랑답게 가꾸는 이웃이 차근차근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슬기롭게 깨달아 맑게 웃는 이웃이 하루 빨리 눈을 뜰 수 있기를 빕니다. 4346.12.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