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말 바로잡기
 (1521) 역할 3 : 가장의 역할을 하게

 

결혼해서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는 남성과, 육아와 집안일을 맡은 여성의 삶은 평행선을 그린다
《안미선-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철수와영희,2009) 156쪽

 

  일본 한자말이기는 해도 워낙 자주 쓰는 ‘결혼(結婚)’입니다. 같은 한자말이라 하여도 우리가 예부터 쓰던 ‘혼인’으로 고치기가 쉽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자꾸 써야 익숙합니다. 얄궂은 역사 때문에 흘러든 일본 한자말도 처음부터 사람들이 익숙하게 쓰지 않았어요. 쓰고 또 쓰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장(家長)’은 ‘집안 어른’이나 ‘집안 기둥’으로 손보고, ‘육아(育兒)’는 ‘아이키우기’로 손봅니다. “여성의 삶”은 “여성 삶”이나 “여성이 보내는 삶”이나 “여성이 누리는 삶”으로 손질하고, “평행선(平行線)을 그린다”는 “나란한 금을 그린다”나 “나란히 달린다”나 “다르게 달린다”나 “서로 엇나간다”로 손질해 줍니다.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는 (x)
 집안일을 맡은 (o)

 

  글쓴이 스스로 짧은 글월 하나에 ‘역할’과 ‘맡다’를 나란히 쓰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어쩌면, 일부러 이렇게 나누어 놓았는지 모르는데, 앞쪽이나 뒤쪽이나 ‘맡다’를 넣어야 올바릅니다. ‘역할’은 일본 한자말이기도 하지만, 이 낱말을 자꾸 쓰면 토씨 ‘-의’가 저절로 들러붙곤 합니다. 이와 달리 한국말 ‘맡다’를 쓸 적에는 토씨 ‘-의’가 달라붙을 구석이 없습니다.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되는 남성
→ 가장 구실을 하는 남성
→ 한 집안 기둥이 되는 남성
→ 한 집안 버팀나무가 되는 남성
→ 집안에서 기둥 구실 하는 남성
 …

 

  한자말 ‘가장’을 그대로 둔다면 “가장 노릇”이나 “가장 구실”이나 “가장 몫을 맡는”처럼 적습니다. 있는 그대로 적으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적을 때에 옳고 바르며 아름다운 글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 적지 않으니, 자꾸 얄궂게 뒤틀리고 말아요.


  글이나 말이 싱그럽지 못하거나 살갑지 못한 까닭은, 자꾸 꾸미려 하기 때문입니다. 겉치레를 하면 할수록 글도 말도 엇나갑니다. 삶을 가꾼다는 마음으로 글을 가꾸면 되고, 삶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말을 사랑하면 됩니다. 4342.8.7.쇠/4346.11.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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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해서 한 집안 기둥이 되는 남성과, 아이키우기랑 집안일을 맡은 여성은 삶이 다르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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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8) 역할 4 : 도망자 역할

 

설령 누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가여운 도망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잔 크렐러/함미라 옮김-코끼리는 보이지 않아》(양철북,2013) 82쪽

 

  ‘설령(設令)’은 ‘아마’로 손볼 수 있으나, 이 글월에서는 덜어도 됩니다. “하고 있다는 걸”은 “하는 줄”로 손질하고, “못했을 것이다”는 “못했으리라”나 “못했으리라 본다”로 손질합니다.

 

 도망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 도망자 노릇을 하는 줄
→ 도망자처럼 노는 줄
→ 도망자가 된 줄
 …

 

  한자말 ‘역할’과 함께 ‘-고 있다’라는 말투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 모두 아픈 역사 때문에 쓰는 말입니다. 이제는 아픈 역사 앙금이나 생채기가 사라졌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늘 쓰는 말 곳곳에 앙금과 생채기가 고스란히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말 속살이 온통 멍들거나 다쳤다고 할 만합니다.


  보기글을 더 살피면 ‘역할’에 ‘-고 있다’뿐 아니라 ‘것’을 함부로 씁니다. 한국말에서 ‘것’은 아무 자리에나 쓰지 않습니다. 어느 것을 가리키는 자리 아니라면 ‘것’을 거의 안 써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말투를 잊거나 잃었기에, 아무 데나 자꾸 ‘것’을 넣습니다.


  낱말 하나부터 찬찬히 다스리면서, 말투를 가만히 추스릅니다. 알맞게 쓸 낱말을 돌아보면서, 즐겁게 빛낼 말투를 헤아립니다. 4346.11.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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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가여운 도망자가 된 줄 눈치채지는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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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89) 역할 5 : 이야기 들어 주는 역할

 

나는 담당 편집자로서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역할에 충실했고
《오쓰카 노부카즈/송태욱 옮김-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한길사,2007) 58쪽

 

  “담당(擔當) 편집자로서”는 그대로 둘 만한데, “그 책을 맡은 편집자로서”로 손질할 수 있어요. “특별(特別)한 일은”은 “남다른 일은”이나 “다른 일은”이나 “돋보이는 일은”으로 다듬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 주는”이나 “그분 이야기를 들어 주는”으로 손보고, ‘충실(忠實)했고’는 ‘힘썼고’로 손봅니다. 글흐름을 살피면 “역할에 충실했고”에서 ‘충실’은 덜어도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역할에 충실했고
→ 그분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일을 했고
→ 그분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 주었고
→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차분히 들었고
→ 그분이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었고
 …

 

  일본사람은 ‘역할’이라는 한자말을 즐겨씁니다. 일본말에서는 이 한자말이 돋보입니다. 한국사람은 일제강점기부터 이 한자말이 일본사람 입과 손을 거쳐 들어온 뒤 여러모로 즐겨씁니다. 이래저래 고치거나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불거져도 한국사람은 좀처럼 한국말을 찾지 못합니다.


  이 보기글을 들여다보면, 일본사람이 즐겨쓰는 한자말 ‘역할’뿐 아니라, 일본사람이 즐겨쓰는 ‘-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그 사람 이야기”나 “그분 이야기”나 “그가 하는 이야기”나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이지만, 나날이 이러한 한국말이 사라지거나 잊혀집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잊습니다.


  글을 쓰는 분 못지않게, 외국말을 한국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분들도 한국말을 슬기롭고 알맞으며 아름답게 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어른들 읽는 책이든 아이들 읽는 책이든, 글을 다루는 분들은 모두 한국말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기를 빕니다. 4346.11.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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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책을 맡은 편집자로서 딱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었고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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