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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문화 ㅣ 빛깔있는책들 - 민속 1
인병선 / 대원사 / 1989년 5월
평점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65
삶이 그대로 문화이면서 사진
― 짚문화
인병선 글·사진
대원사 펴냄, 1989.5.15.
가을날 누렇게 익는 벼가 차츰 샛노랗게 빛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바라본 사람이라면 사진으로 안 찍고는 못 배기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이라면 이 아름다운 들판을 그림으로 그리려 했을 테고, 더 먼 옛날이라면 가슴 깊이 고운 빛을 아로새겼으리라 느낍니다.
봄에는 짙은 흙빛입니다. 짙은 흙빛에 물이 찰랑찰랑 차고, 이윽고 어린 모가 한 움큼 자리를 잡습니다. 조그마한 볏모는 흙땅에 조그맣게 박힌 푸른 점처럼 보입니다. 이윽고 모가 자리를 잡으며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런 빛을 ‘사름’이라 합니다. 사름을 지난 모는 쑥쑥 줄기를 올립니다. 조그마한 방울과 같던 볏모는 어느새 우쑥 자라 푸른 줄을 흙땅에 죽죽 그은 듯한 모습이 됩니다. 한 달 남짓 지나면 볏포기는 아이들 키높이만큼 자랍니다. 아이들이 여름들에 서면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이도록 볏포기 키가 높습니다. 여름이 저물려 하면서 이삭이 패지요. 이삭이 팰 즈음부터 들판에 누릇누릇 살짝 감돕니다. 이삭이 패고 천천히 알맹이 들어차며 고개를 숙일 즈음 노릇노릇 들빛이 달라집니다. 누런 빛과 푸른 빛이 어우러진 새로운 물결입니다. 이 물결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푸른 빛이 차츰 가시고 누런 빛이 한결 밝으면서 날마다 새롭습니다. 속알이 꽉 차 아주 영글 무렵이면 누런 빛이 노오랗게 거듭납니다. 잘 익었으니 어서 베어 가을볕에 말리라면서 바람 따라 촤르르촤르르 가을노래 베풉니다.
사진작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골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내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빛 달라지는 모습을 삼백예순다섯 장 사진으로 아름다이 엮으리라 생각합니다. 올해와 지난해 다르고, 그러께와 이듬해 다른 들빛을 해마다 새삼스레 한 장 두 장 사진으로 옮기리라 생각합니다.
사진기 든 사람은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들판을 바라보면 됩니다. 들일을 하기 앞서 들빛을 사진으로 한 장 담으면 됩니다.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차근차근 들빛을 날마다 사진 한 장으로 담으면 되지요. 이렇게 한 해가 흘러 삼백예순다섯 장 이야기를 돌아보면, 시골 들빛이 어떻게 사람들 마음과 몸을 살찌우는가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끼니만 채우는 밥이 아닙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실컷 들이켠 아름다운 숨결을 누리는 밥입니다. 밥 한 그릇에는 햇볕내음이 감돕니다. 밥 한 그릇에는 바람내음이 서립니다. 밥 한 그릇에는 빗물내음이 섞입니다. 밥 한 술을 뜨면서 봄볕과 여름볕과 가을볕 어우러진 빛을 헤아립니다. 밥 한 술 입에 넣으며 봄바람과 여름바람과 가을바람 얼크러진 무늬를 돌아봅니다. 밥 한 술 야금야금 씹으며 봄비와 여름비와 가을비 하나된 결을 짚습니다.
.. 짚으로 만든 여러 종류의 망태기들이 황토벽에 걸려 있다. 풋풋한 인상을 풍기는 황토벽과 총호지 문, 짚 제품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농촌 생활의 소박함을 운치 있게 보여주고 있다 … 쌀가마니는 섬이나 멱서리 대신에 일제시대에 기계로 대량 생산하던 것이다. 역사가 짧은 이 쌀가마도 요즘은 비닐 부대에 밀려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 해어진 멍석은 사진에서처럼 이렇게 기워서 썼다. 해진 물건을 기워서 다시 쓰는 알뜰함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부분이다 … 색깔 있는 헝겊이나 비사리로 상(上) 자 혹은 복(福) 자를 넣은 것, 의미 없이 줄을 두어 가닥 넣은 것 등이 있다. 이것들은 다 장식적인 의미보다는 단순히 이웃집과 바뀌지 않게 하기 위한 표시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25, 29, 38, 71쪽)
시골사람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새벽 네 시 무렵에 하루를 엽니다. 겨울에 딱히 일거리 없다 하더라도 네 시 무렵이면 저절로 눈을 뜹니다. 여름에 일손이 바쁘더라도 굳이 두어 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며칠 너무 몸을 쓰면 다른 날 일을 제대로 못해요. 날마다 알맞게 차근차근 일을 합니다. 오늘 할 일을 오늘 합니다. 이튿날 할 일을 애써 오늘 마무리하려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물을 말려서 쓸 생각이라면 잔뜩 뜯어도 되지만, 밥때에 맞추어 뜯는 나물이라면 끼니마다 조금씩 뜯어서 먹을 때에 가장 맛있습니다. 뜯은 자리에서 먹는 풀이 가장 맛있지, 어제 뜯은 풀을 오늘 먹으면 그리 맛있지 않아요. 밥도 새로 지은 밥이 가장 맛있어요. 굳이 식히거나 묵혀서 먹어야 하지 않아요. 끼니마다 알맞게 밥을 지어서 먹으면 됩니다. 보온밥솥에 넣는 밥이 맛있을 수 없어요. 따스한 기운을 건사할 뿐입니다. 따스한 기운조차 새로 지은 밥에서 솔솔 솟는 모락모락 따스한 기운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알맞게 일하면서 알맞게 생각합니다. 알뜰히 일하면서 알뜰히 사랑합니다. 더 가지려 한들 더 가지지 못합니다. 굳이 덜 가지거나 누릴 까닭은 없습니다. 즐거울 만큼 일하고 즐거울 만큼 나눕니다.
사진을 배우는 길은 여럿이고, 사진을 찍는 길도 여럿입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올 수 있고, 여러 사진강좌를 찾아 들을 수 있으며, 온갖 사진책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시골일 배우는 길은 여럿이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길도 여럿입니다. 대학교 농학과를 나올 수 있고, 어버이한테서 시골일 물려받을 수 있으며, 온갖 자료와 책으로 배우거나 귀농학교를 다닐 수 있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시골일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겪고 치르며 부딪혀야 제대로 맞아들이면서 익힙니다. 대학교에서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우더라도 스스로 겪고 치르며 부딪혀야 제대로 받아들이면서 배웁니다.
‘호미질 선생’은 없습니다. ‘씨뿌리기 선생’도 없습니다. ‘풀뜯기 선생’ 또한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호미질을 하고 씨뿌리기를 하고 풀뜯기를 하면서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몸으로 받아들여 배웁니다.
‘사진찍기 선생’은 없습니다. ‘사진읽기 선생’도 없습니다. ‘사진놀이 선생’ 또한 없어요. 그예 스스로 사진기를 손에 쥐고 찍으면서 배웁니다. 스스로 사진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면서 깨닫습니다. 남이 일러 주는 대로 따라갈 수 없는 시골일이고, 집살림이며, 사진길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대로 걸어갈 시골일이며, 집살림이고, 사진길이에요.
.. 모든 전통 문화 유산이 시간이 갈수록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반면, 짚은 날이 갈수록 버림받고 잊혀져 가고 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망각의 높으로 하나씩 둘씩 영원히 사라져 가고 있다 … 짚은 우리 조상들에게 흡사 공기나 물과 같았다고나 할까 … 지붕뿐만이 아니라 볏뭇, 수수뭇, 차곡차곡 쌓아 놓은 낟가리, 토종 벌통에 씌운 주저리, 김장 둥주리, 하다못해 누에를 키우는 잠박, 잠석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리도 솜씨 있게 꼬고 틀어 올리고 매듭을 지었는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도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매우 뛰어난 솜씨였고 나무랄 데 없는 예술품이었다. 마을에서 마침 낫꽂이를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와 만날 수 있었다. 칠순이 넘어 보였으나 구릿빛으로 건장한 그 할아버지는 낯선 서울 여자가 유심히 들여다보자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묻는 말에 심상히 대꾸해 주었다. “할아버지, 그게 뭐지요?” “이거 낫꽂이여, 낫꽂이. 이제 벼도 다 거두어들이고 했으니께 낫 간수를 해야지.” “그거 뭐 서부렁해서 몇 번 꽂으면 금방 망가질 것 같네요.” 필자가 좀 불공스러운 말투로 물었는데도 할아버지는 내색없이 부드럽게 대꾸해 주었다. “망가지면 버리고 또 만들지 어째여.” .. (58, 59, 60∼61쪽)
예나 이제나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빛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지나치는 길에 시골을 찍는다든지, 신문기자로서 취재를 하러 살짝 들르는 길에 시골을 찍는 사람은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시골로 가끔 취재여행이나 촬영여행 오는 사람은 있어요. 그렇지만, 참말로,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며 살아가는 하루를 누리며 시골빛을 사진으로 옮긴다든지 시골삶을 글로 적는다든지 시골꿈을 그림으로 선보이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모조리 도시로 몰리고, 도시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도시에서 갈 길을 열려 하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책이 나오면 도시에서 읽힙니다. 시골에서 읽히지 않습니다. 신문이 나와도 도시사람 이야기를 다루며 도시사람이 읽지, 시골 이야기를 다루는 일 없고 시골사람한테 읽힐 신문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을까 모를 노릇입니다만, 신문기자가 되거나 작가가 되려고 공부하는 이들은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며 도시 문화와 도시 사회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헤아립니다. 날마다 밥을 먹어도 이 밥이 어느 시골 흙지기 손에서 태어나 도시로 오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날마다 물을 마셔도 이 물이 어느 숲에서 흐르다가 도시에까지 오는가를 헤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날마다 옷을 입고 집에서 잠을 자도, 옷 한 벌과 집 한 채가 지구별에서 어떤 빛인가를 깨닫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작가들이 무언가 자꾸 ‘만듭’니다. 이것저것 만들면서 ‘설치예술’을 한다 말하고, ‘메이킹포토’를 한다 말합니다. 도시라는 곳이 ‘억지로 만든’ 마을이기 때문인데, 도시라는 곳은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똑같은 집과 길과 학교를 끝없이 만들어야 하는 터라, 도시 사회 교육이란 틀에 박힙니다. 이른바 제도권입니다. 똑같은 교과서를 써서 똑같은 시험을 치르도록 합니다. 시험점수 잘 받는 아이들을 높이 받듭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이기 때문에 사람한테 등급이나 계급을 매깁니다. 이런 흐름이니, 도시에서 문화나 예술을 하려는 이들도 스스로 등급이나 계급을 매기듯이 ‘무언가 설치하고 만드는 문화와 예술’로 나아가고 맙니다. 도시에서 도시를 꾸밈없이 바라보거나 껴안지 못해요. 도시에서 도시를 스스럼없이 얼싸안거나 어깨동무하지 못해요. 도시가 사람들을 구경꾼이나 톱니바퀴 되도록 내몰듯, 도시에서 문화와 예술을 하는 작가들도 스스로 구경꾼이나 톱니바퀴처럼 구르면서 ‘작품을 만드는 길’에 빠져듭니다.
그러면, 이 ‘만듦사진’이나 ‘만듦작품’은 얼마나 뜻이 있을까요. 이 ‘만듦사진’이나 ‘만듦작품’은 얼마나 목숨을 이을 만할까요. 만듦사진은 백 해나 이백 해쯤 목숨을 건사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만듦사진이 나오면 지난날 만듦사진은 아무것 아닌 채 뒤로 밀리지 않나요? 아주 새롭다 하는 만듦작품이 나오면 예전 만듦작품은 볼품없이 뒤로 젖혀 놓지 않나요?
푸른 바람이 불지 않는 도시에서 만드는 모든 것은 새로운 다른 것에 밀리고 치이고 밟힙니다. 푸른 숨결이 감돌지 않는 도시에서 만드는 모든 문화와 예술은 새로 만드는 문화와 예술에 눌리고 떠돌다가 잊힙니다.
.. 산간에 사는 아낙네들은 길을 가다가도 볏짚을 보면 그것이 비록 한 움큼밖에 안 되는 작은 분량일지라도 소중히 챙겨 들고 간다 했다 …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 농군치고 멍석이나 미거리, 멧방석 같은 것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건 마치 농사의 한 부분과 같아서 농군들에겐 필수적인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짚 제품에는 장이가 따로 없었다 … 누런 벼, 콩, 팥, 빨간 고추가 널린 풍경은 참으로 탐스럽고 대견하다. 요즘은 멍석이 무겁고 짐스럽다고 해서 젊은 사람들이 더러 나일론 천막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인들 말을 들어 보면 나일론은 절대로 멍석만큼 잘 마르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 (63, 64, 71쪽)
시골 낟가리나 볏가리를 사진으로 담던 작가나 기자가 예전에 몇 사람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진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이내 다른 사진감으로 갈아탔습니다. 살롱사진이나 공모사진은 시골 낟가리나 볏가리를 ‘예술스럽게’ 사진으로 찍으려 애쓰기도 했는데, 예술스럽게 사진으로 찍으려 했을 뿐, ‘시골스럽게’ 사진으로 찍지 않았습니다.
우리 겨레 낟가리나 볏가리를 사진으로 찍지 못한 작가들은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인도에 가서도 이들 겨레 시골마을에서 낟가리나 볏가리를 들여다볼 줄 모르고 느낄 줄 모릅니다. 이곳에서 깨닫지 못하면 저곳에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한테 치이거나 밀리거나 시달린 사람들은 한국땅을 떠나 제3세계나 가난한 나라나 두멧시골 있는 나라로 가서 ‘사람한테 치인 적 없이 맑은 눈빛’인 사람들을 만나며 가슴이 북받쳐 오릅니다. ‘사람한테 밀린 적 없이 깨끗한 눈망울’인 사람들을 마주하며 이 고운 낯빛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애씁니다. ‘사람한테 시달린 적 없이 고운 눈매’인 사람들 모습을 바지런히 사진으로 담는 취재여행을 다닙니다.
사진이란 삶이기에 스스로 누리는 삶대로 사진이 태어납니다.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사진을 아름답게 일굽니다. 날마다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에 고단한 빛이 묻어납니다. 스스로 꿈을 짓는 사람들은 사진에 고운 꿈나래 펄럭입니다.
사진이란 삶인 만큼 스스로 빚는 삶대로 사진을 빚습니다. 언제나 노래하는 삶이라면 언제나 노래하는 사진으로 나아가요. 늘 사랑을 속삭이는 삶이라면 늘 사랑을 속삭이는 사진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다 도시에서 살아가고,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며, 도시에서 일자리와 집자리를 찾아요. 이리하여, 오늘날 사진은 거의 다 도시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사진은 거의 다 도시에서 ‘똑같은 틀에서 벗어나려 아웅다웅하지만 정작 톱니바퀴 부품이 되거나 쳇바퀴 돌듯 판에 박은 만듦사진’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새로운 빛이 없는 곳에서 무언가 만든다고 하면 무엇이 태어날까요. 모두 똑같은 틀에 맞추어 스스로 살아가는데 새로 무언가 만들려 한다 한들 새로울 수 없습니다.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가죽신이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짚신과 가죽신의 계급적 차별이 생겨, 급기야 서민들에게는 짚신 이외의 다른 신을 신을 수 없게 하는 제도까지 마련되었고 … 짚신밖에 신을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신을 신을 수 있을까 하는 갈망에서 궁리되고 다듬어진 짚신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어느 공예품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미의 극치를 이루었던 것이다 … 사랑스러운 며느리나 딸에게는 앙징맞고 예쁜 신을 삼아 주고 싶었으리라. 이런 신은 ‘고운 신’이라 했고 남자들이 신는 투박하고 거친 신은 ‘막치기’라고 했다 .. (66∼67쪽)
가을날 가을볕은 가을에만 만날 수 있습니다. 가을날 가을볕 가운데 구월볕과 시월볕과 십일월볕이 저마다 다릅니다. 시월볕 가운데 시월 첫째 주 볕이랑 둘째 주 볕하고 셋째 주와 넷째 주 볕이 모두 달라요. 시월 둘째 주 볕 가운데 첫째 날과 둘째 날과 셋째 날과 넷째 날과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볕이 모조리 다릅니다. 시월 둘째 주 볕에서 둘째 날 아침이랑 새벽이랑 낮이랑 저녁에 드리우는 볕이 또 다르지요.
다른 빛이란 무엇인가를 몸과 마음으로 깨달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다른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삶이란 어떠한가를 몸과 마음으로 알아차려 스스로 지을 적에, 바야흐로 다른 이야기 담는 다른 사진을 이룹니다. 다른 사랑이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다른 빛과 삶을 일구며 느끼고 나누면, 시나브로 내 눈길과 손길로 내 사진빛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 서민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온 짚 제품이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어느 것보다도 그 아름다움이 뒤떨어지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만 그 평가의 기준이 문제가 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귀족적이고 매끈하며 깔끔하고 희귀한 것에만 지나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왔다. “이거 궁중에서 쓰던 거래”라고 하면 사람들의 눈이 금방 휘둥그래지는 것은 물론, 그 속에 당대의 뛰어난 솜씨가 남김없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 특수층의 것이면 무조건 좋게 보아 온 나쁜 버릇 탓도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 짚 문화의 중요성은 그래서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데에도 있다. 전통 문화의 어느 분야도 외래 문화의 영향을 아주 떼 놓고 생각하긴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짚 문화만큼은 아래로만 아래로만 깔려 순수성을 지켜 왔고, 어쩌면 농경 생활이 시작됐을 무렵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조차 적지 않다 .. (77, 78쪽)
삶이 그대로 문화입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그대로 문화입니다. 빨래 비빔질과 빨래터가 그대로 문화입니다. 밥짓기와 설거지가 그대로 문화입니다. 잠자리와 이부자리와 자장노래가 그대로 문화입니다.
문화가 아니라 할 만한 삶이란 없습니다. 문화가 안 될 삶자락이란 없습니다. 부지깽이 하나가 문화요, 비녀 하나가 문화입니다. 연필 한 자루가 문화이고, 깍두기공책 한 권이 문화입니다. 대청마루가 문화이며 장작 한 짐이 문화입니다. 아궁이가, 숯불이, 쑥내음이, 도리깨질이, 빨랫줄이 모두 문화입니다.
삶이 그대로 문화이기에 삶을 그대로 사진으로 찍을 수 있으면 환하게 빛납니다. 만들어야 할 사진이 있기도 하지만, 애써 만들지 않아도 우리들이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 숱한 이야기 흘러넘치기에, 사진으로 담을 빛은 아주 넓고 깊으며 많습니다.
참새를 사진으로 찍어 보시겠어요? 나락을 사진으로 찍어 보시겠어요? 일하는 흙지기 손가락을 사진으로 찍어 보시겠어요? 부추싹이 돋고 부추줄기 오르며 부추꽃 피어 부추씨 맺기까지 사진으로 찍어 보시겠어요? 개구리 한 마리와 제비 한 마리를 한 해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셔요. 어여쁜 사진빛이 샘솟습니다. 잠자리와 나비를 들여다보셔요. 잠자리가 어디에 알을 낳고 잠자리알이 언제 깨며 어떻게 자라서 비로소 잠자리로 훨훨 날아다니는가를 사진으로 적바림해 보셔요. 나비가 어디에 알을 낳으며 이 알이 어떤 잎사귀 먹고 크면서 허물을 벗고 번데기를 거쳐 나비로 거듭나는가를 사진으로 옮겨 보셔요.
날마다 새로운 삶을 보면 됩니다. 날마다 새삼스러운 하루를 누리면 됩니다. 날마다 다른 이야기 태어나는 빛을 느끼면 됩니다.
사진은 언제나 늘 여기에 있어요. 사진은 예나 이제나 노상 이곳에 있어요. 삶은 바로 늘 여기에 있거든요. 이야기는 한결같이 이 자리에서 흐르거든요.
.. 시골에 있는 노인들을 만나 짚 이야기를 꺼내면 열이면 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게 상례다. 우선 그들 자신이 짚 제품은 전혀 하잘것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머리에 꽉 박혀 있기 때문이다 … 시골에 현지 답사를 나갈 때마다 번번이 느끼는 것은 수십 년째 골동상들의 횡포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너무 극심했었다는 사실이다. 시골엔 옛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요강, 다듬잇돌, 다리미, 함지박 같은 것까지도 … 가을바람이 옆에 가려 놓은 마른 옥수수잎을 외스락와스락 흔들며 지나가고 따스한 햇볕이 내려 비치는 무덤 옆 마른 잔디 위에 앉아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듣는 건 참으로 푸근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 (82∼83, 86쪽)
짚풀생활사박물관을 꾸린 인병선 님이 쓴 《짚문화》(대원사,1989)를 읽습니다. 인병선 님은 학자도 사진가도 아니었지만, 우리 겨레 짚삶을 찾으려고 1970년대 끝무렵부터 온 나라 시골마을 두루 다니면서 짚삶을 사진으로 담고 짚삶 이야기를 글로 썼습니다. 멋스러이 찍은 사진이라든지 맛깔나게 쓴 글은 없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인병선 님이 찍은 사진과 쓴 글은 짚내음이 납니다. 짚으로 삼은 짚신이 멋스럽거나 맛깔스럽지는 않으나 수수하고 투박하면서 쓸모가 있듯이, 짚내음이 나도록 찍은 사진과 짚빛이 흐르도록 쓴 글은 수수하고 투박하면서 아기자기합니다.
그렇지요. 짚을 이야기하는 사진인데 짚내음이 나야지요. 짚을 노래하는 글인데 짚빛이 흘러야지요. 짚을 이야기하면서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과 같은 사람들 목소리일 수 없습니다. 짚을 노래하려 하면서 궁중음악을 들려줄 수 없습니다.
짚내음 사진에는 흙빛이 흐를 때에 살갑습니다. 짚빛 글에는 햇살이 드리울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짚이란 볏짚입니다. 볏짚이란 볏포기입니다. 볏포기란 벼알이 알뜰히 맺히도록 버티는 꽃대요 줄기입니다. 볏줄기란 볏모에서 비롯하고, 볏모란 볍씨가 자라며 이루어집니다. 한쪽은 밥이 되고 다른 한쪽은 살림이 됩니다. 벼알은 밥이 되어 밥그릇에 담기고, 볏짚은 살림살이로 되어 집안 구석구석 깃듭니다.
.. 이분들에게 농사란 이제 전처럼 그렇게 절실하지 않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수리 시설이 발달하고, 예와 달리 많은 농약에 극도로 의존하는 농법이, 뭔가 막연하기만 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런 예축의례에서 대단한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볏짚 자체가 옛날의 짚과는 아주 달라져 버렸다 …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수천 년 이 땅의 환경에 맞추어 키워 온 이 재래종 벼는 비록 수확 수치 면에서는 다소 떨어져도 쌀에 윤기가 흐르고 질이 매우 좋았다. 따라서 볏짚도 키가 크고 건강하고 노르스름한 게 때깔이 고왔다 … 이제 저 시골사람들에게 전통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편리하고도 손쉬운 플라스틱 제품을 버리고 투박하고 무겁고 먼지 나고 불편한 짚 제품을 만들어 쓰라고 강요한들 그것이 어떻게 실용될 수 있겠는가 … 그 민속재는 그것을 창조한 그 고장, 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제 빛을 낼 수가 있다. 그 고장, 그 사람들에게서 뚝 떼어 낯선 곳에 갖다 놓고 오로지 민속재로서만 다루어질 때 그것은 이미 뿌리 잃은 죽은 나무가 되고 마는 것이다 .. (90, 100, 102쪽)
오늘날 사람들 집안에는 플라스틱 물건이 아주 많습니다. 석유를 뽑아서 만든 물건이 온 나라 사람들 집마다 그득합니다. 플라스틱과 비닐이 온 도시와 시골을 뒤덮습니다. 마늘을 심건 감자를 심건 고추를 심건 당근을 심건 오이를 심건 토마토를 심건 수박을 심건 호박을 심건 …… 아아, 시골에서 비닐을 흙에 덮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비닐이 없으면 시골일 못한다고 여깁니다. 그나마 논에까지 비닐을 치지는 않습니다만, 논바닥에 비닐을 안 친다 하더라도 논도랑을 죄다 시멘트로 덮어요. 논 둘레는 온통 시멘트입니다. 시멘트로 둑을 쳐서 벼알만 굵고 많이 달리도록 농약과 비료를 들이붓습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가 늙어서 농약을 못 친다고 하니까, 군청과 도청과 농협과 농림부에서 헬리콥터를 사들여 항공방제로 농약을 뿌려 줍니다.
헬리콥터 항공방제를 마주쳐야 할 때면 참 골이 아픕니다. 헬리콥터를 장만하고 관계 기관에 전담 공무원을 두고 뭐를 하는 살림돈을 헤아리자면, 이 돈으로 젊은 일꾼이 손수 농약을 뿌려도 되고, 손수 거름을 내고 손수 피사리를 해도 됩니다. 제대로 된 친환경농사를 하겠다면, 농약산업에 엄청난 돈과 품을 들이지 말고, 젊은 사람들 시골로 보내 손수 거름 내고 흙 가꾸어 들에 아름다운 빛이 흐르도록 땀을 흘리면 됩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오직 돈으로 흐릅니다. 중앙정부도 지역정부도 돈을 따집니다. 새마을운동을 등에 업은 농협은 시골사람한테 기계를 쓰도록 떠밉니다. 기계를 쓰자니 농약과 비료가 있어야 합니다. 농약과 비료를 쓰니까 기계 없이는 넓은 땅을 손수 갈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소를 키우지도 못합니다. 소한테 먹일 풀이 자라는 빈터나 숲이 시골에서 사라졌습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소가 눈 똥을 거두어 거름으로 삭힐 젊은 일손이 없습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됩니다. 이래저래 오늘날 우리 시골마을은 농약빛과 비료빛과 기계빛과 비닐빛입니다. 젊은 사람들 모조리 도시로 보내도록 하는 제도권 학교교육이고, 시골 중·고등학교에서조차 시골일 안 가르칠 뿐 아니라, 시골에 남아 농사꾼 되라고 이끌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시골빛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을 만한 사람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시골빛을 가슴 가득 받아안으며 활짝 웃을 만한 젊은이 나올 길이 꽉 막혔습니다. 애써 시골에 남는다 하더라도 거름내기를 배우지 못합니다. 겨우 시골에 남아도 기계질부터 배웁니다. 호미질이나 낫질이나 가래질이나 괭이질 아닌 기계질로 살아가는 시골 젊은이입니다. 아무런 빛이 없으니 시골로 가고, 아무런 빛을 스스로 일구지 못하니 시골살이 이야기 물씬 흐르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 무엇이 현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자신의 것을 우습게 여기게 만들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고, 해방 이후 밀어닥친 근대화와 산업화의 물결도 그 큰 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더구나 70년대 초부터 단행된 새마을운동은 농촌 사람들이 수천 년 아끼고 젖어 살아온 모든 전통적 가치와 의미를 송두리째 뒤엎어 버렸다. 마을길을 닦기 위해 당산나무를 베어내고 성황당을 부수고 초가집을 양철이나 기와로 바꾸고 낡고 구태의연한 것은 무엇이나 때려부숴 번쩍거리고 울긋불긋하고 편리한 것으로 바꿔 버렸다 .. (103쪽)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만들고, 우리 아이들이 뒤따르는 오늘날 삶이 남김없이 사진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름답게 가꾸지 못한 삶터라, 우리 아이들도 이 나라에서 아름답게 빛날 사진을 가꾸지 못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시골을 마냥 무너뜨리기만 했고, 도시조차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 되도록 북돋우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늘 보는 모습이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손전화입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숲과 들과 바다와 골짜기와 냇물을 바라보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도 숲과 들과 바다와 골짜기와 냇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농약 치는 어른 곁에서 농약내음 맡으며 농약질 배우는 아이들입니다. 풀을 뜯고 흙을 살찌우는 어른 곁에서 풀내음과 흙내음 맡으며 시골살이 익히는 아이들입니다. 자가용 몰고 텔레비전 앞에서 스포츠중계에 소리치며 좋아하는 어른 곁에서는 이러한 모습 똑같이 따라하는 아이들입니다. 도시에서도 텃밭을 일구고 이웃사랑과 두레와 품앗이를 이루어 보려 땀흘리는 어른 곁에서는 이러한 삶 찬찬히 지켜보며 배우는 아이들입니다.
오늘날 한겨레 젊은이들이 이루는 사진이란, 바로 지난날 한겨레 어른들이 이루거나 닦은 사진밭에서 자라는 씨앗입니다. 오늘날 젊은 사진가들이 컴퓨터 프로그램 만지면서 사진을 ‘만든다’고 하지만, 지난날 어른 사진가들은 이 나라 삶자락과 마을과 사람들을 꾸밈없이 수수하면서 살가이 어깨동무하듯 만나면서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지난날 어른 사진가들도 살롱사진이니 공모사진이니 예술사진이니 작품사진이니 하면서 ‘사진 만들기’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채 살았어요. 그렇다고, 앞으로도 삶사진 아닌 만듦사진만 나온다면, 더 앞으로 새로 태어나 자랄 아이들이 걸어갈 사진길도 이대로 굳어지겠지요. 지난날 어른 사진가들이 ‘사진 만들기’에 푹 빠진 채 살았더라도, 오늘날 젊은 사진가들이 ‘만듦사진’에만 파묻히면 앞으로도 모두 재미없고 사랑없으며 힘없는 사진만 되고 말아요. 마치, 오늘날 볏짚이 농약과 비료와 기계질에 시달리며 힘알이 하나 없이 거무튀튀하며 흙내음 하나 없듯이, 앞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사진삶이 쓸쓸한 빛이 된다면 얼마나 슬플까요.
재미란 억지로 만들지 못해요. 사랑이란 돈으로 사들이지 못해요. 힘이란 권력이나 명예나 전쟁무기가 아니에요. 삶에서 재미가 샘솟고, 삶으로 사랑을 꽃피우며, 삶을 어깨동무하면서 새힘 솟아요. 튼튼하고 아름다우며 향긋한 짚이 다시 이 나라 시골에서 자랄 수 있도록, 재미나고 사랑스러우며 힘찬 사진이 새롭게 이 땅에서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웃음으로 어깨동무하는 곳에서 삶이 자라고 사진이 자랍니다. 노래로 활짝 웃는 곳에서 삶이 빛나며 사진이 빛납니다. 풀내음 향긋하게 흐르는 곳에서 삶이 아름답고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4346.10.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