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
고찬규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시와 늦가을
[시를 말하는 시 39] 고찬규,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
- 책이름 :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
- 글 : 고찬규
- 펴낸곳 : 문학동네 (2004.11.10.)
늦가을에 늦가을 햇볕이 내리쬡니다. 늦가을 햇볕은 끝물로 벼를 베는 논에 포근하게 내려앉습니다. 끝물로 벼를 베는 논이라 해서 게으르지 않습니다. 모든 논은 차근차근 모를 심어 벼를 기를 뿐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먼저 심고 나중 심는 논이 있습니다. 모를 심거나 벼를 벨 적에는 일손이 많이 드는 만큼, 차근차근 심었습니다. 일꾼이 서로 돌아가며 심었습니다. 그러면, 처음 심은 결에 따라 나중에 베는 결이 같아요.
지난날 사람들은 손으로 심고 베느라 두레와 품앗이를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계로 심고 베느라 기계를 부르는 차례를 기다립니다. 지난날이건 오늘날이건 모심기와 벼베기는 차근차근 이루어집니다. 집집마다 한꺼번에 벨 수 없습니다. 벼를 베어 나락을 널 자리를 마련하자면, 앞서 베어 말리는 나락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마을사람은 누가 먼저요 누가 나중이라 할 것 없이 제때를 기다립니다.
.. 들깨 모종이 끝나던 날 / 밤하늘은 온통 깨꽃들의 잔치였다 .. (깨꽃―솎아내기)
시골 들판에 농약과 비료를 안 쓰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사람이 눈 똥오줌으로 들을 일구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가 누는 똥오줌만으로는 거름을 대지 못하고, 늙은 할매와 할배는 거름을 마련하여 뿌리지 못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와 푸름이가 모조리 도시로 떠나는 터라, 거름을 마련해서 들이나 밭에 뿌릴 일손이 없습니다. 시골에 사람들 복닥복닥해야 똥오줌이 나오고, 이 똥오줌을 거름으로 삭혀 들과 밭에 뿌리겠지요.
오늘날 논에서 자라는 벼는 농약과 비료를 먹습니다. 농약과 비료가 없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벼요, 볏짚이 굵지 않고 길지 않으며 튼튼하지 않습니다. 벼알은 굵게 많이 달린다지만, 짚은 도무지 쓸 수 없을 만한 벼입니다.
옛날이라면 짚을 쓸 곳이 아주 많습니다. 해마다 지붕을 새로 잇지요. 멍석과 망태와 삼태기를 짜지요. 짚신을 삼지요. 바구니며 둥구미며 엮지요. 섬을 짓고 씨오쟁이를 새로 마련해야지요. 콩을 삶고 절구로 찧어 메주를 만들면 짚으로 엮어 들보에 묶어야지요. 그러니, 옛날에는 벼는 벼대로 잘 갈무리하는 한편, 짚은 짚대로 잘 건사합니다. 벼알과 짚을 모두 알뜰히 모십니다.
이제 시골에서 낟가리도 짚가리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기계가 모두 벼를 베니 낟가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짚신조차 삼기 어려운 요즈음 짚인 만큼 여물로 내다 팔도록 비닐로 둥그렇게 엮습니다.
.. 반짝이는 눈도 없이 별을 / 노래하려느냐 .. (마음의 등불)
들에서 자란 벼를 베고 나면, 마늘을 심기 바쁩니다. 예전처럼 보리를 심는 집은 아주 드뭅니다. ‘우리 밀’이나 ‘우리 보리’를 키우면 돈을 제법 만질 만하지만, 또 사람들이 빵을 참으로 많이 사다 먹지만, 정작 밀이나 보리를 가을들에 심는 시골집은 드뭅니다. 돈을 제대로 만지자면 마늘을 심어야 합니다. 아주 자주 고기를 사다 먹는 도시사람은 고기에 으레 마늘을 곁들여요. 김치를 담그든 무어를 하든 마늘을 많이 써요.
벼를 벤 논에 마늘을 안 심는다면, 군청에서 하는 경관사업에 따라 유채씨를 뿌립니다. 유채씨를 심어 봄에 유채꽃 노랗게 흩날리게 하면 군청에서는 돈을 줍니다. 도시사람이 어쩌다 시골을 지나갈 일이 있어 유채꽃 흐드러진 들길을 자동차로 씽 지나갈 적에 “와, 예쁘다!” 하고 말하도록 이끈다며, 돈을 들여 유채씨를 뿌리게 하는 지역행정입니다.
무논과 마늘논에는 농약과 비료를 모질게 뿌립니다. 그나마 유채논에는 농약도 비료도 뿌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논에 심은 유채는 잎이나 줄기를 먹을 만하지 않습니다. 꽃만 많이 달리도록 품종을 고친 녀석이라, 잎이 아주 작고 줄기도 가느다랗습니다. 자동차로 들판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대목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저 노란 꽃물결 보며 좋아라 할 뿐입니다.
유채꽃이 한창일 무렵 꽃이 흐드러지건 말건 시골사람은 이 꽃밭을 갈아엎습니다. 유채꽃이 지기 앞서 논흙을 갈고 논삶이를 해야 곧 모내기를 할 수 있거든요. 가을과 겨울 지나 다시 새봄 찾아들면 시골마을 온 들판은 기계로 흙 뒤엎는 소리가 넘칩니다.
.. 아버지 정년 퇴임 후 / 앞마당 텃밭은 줄어만 갔다 / 자꾸 넓어지는 꽃밭 // 꽃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어야 꽃이라는 / 어머니 앞에 / 한평생을 같이한 아버지는 / 이제 슬슬 눈칫밥이다 .. (꽃복숭아)
고찬규 님 시집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문학동네,2004)를 읽습니다. 숲을 떠메고 갔다는 새들은 어깨가 푸르다고 하는데, 막상 숲을 떠멘 새들이 속삭이는 노래와 같은 싯말은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고찬규 님인데, 전북 부안 시골마을 이야기나 삶빛이나 웃음꽃이나 눈물나무는 그닥 싯말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하, 그러고 보면, 부안이건 고흥이건 보성이건 거제이건, 시골사람은 하나같이 도시로 빠져나갑니다. 옥천이건 영동이건 동해이건 남해이건, 시골사람은 죄 가깝거나 먼 도시로 달려갑니다. 숲과 어깨동무하던 사람들이 숲을 떠메고 도시로 갑니다. 숲과 벗삼던 사람들이 숲을 버리고 도시로 갑니다. 숲과 한솥밥 먹던 사람들이 숲을 내팽개치고 도시로 갑니다.
갓 시골을 떠난 사람들 어깨는 아직 푸른 빛깔입니다. 시골을 떠난 지 한 해 열 해 흐르고 스무 해쯤 되면, 이녁 어깨에 있던 푸른 빛깔은 거의 모두 사라집니다. 없지요. 잿빛으로 바뀌지요. 흐리멍덩한 빛이 되지요.
.. 섬을 섬이게 하는 바다와 / 바다를 바다이게 하는 섬은 / 서로를 서로이게 하는 /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고 / 천 년을 천 년이라 생각지도 않고 .. (섬)
날씨는 늦가을로 접어듭니다. 고흥 시골마을 한낮은 아직 후끈후끈하지만, 새벽과 아침저녁으로는 썰렁합니다. 가을에 새로 돋는 씀바귀랑 민들레랑 고들빼기가 있으나, 웬만한 풀은 모두 시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풀이 씨앗을 남기고 흙 품에 안겼습니다. 후박나무는 새 여름 기다리며 잎사귀 짙푸르고, 동백나무는 새 봄날 기다리며 꽃몽우리 굵습니다.
늦가을 시골 들길은 조용합니다. 벼베기 거의 다 끝나고, 마늘심기 또한 거의 다 끝납니다. 이제 시골 들길 다니는 경운기는 몇 없습니다. 철새는 모두 떠났고 텃새는 먹이 찾느라 아침저녁으로 부산합니다. 늦가을 시골마을에는 고즈넉한 풀노래와 텃새 이야기꽃이 어우러집니다. 누렇게 시든 풀잎이 사그락거리고, 새로 돋은 풀잎이 앙증맞게 살랑입니다. 억새가 하얗게 하늘거리고, 참새와 딱새는 거침없이 우리 집 마당을 돌아다니며 뭐 떨어진 것 있나 살핍니다. 밤마다 별빛이 함박눈처럼 쏟아집니다. 4346.10.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