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12. 말을 배운다
― 서로 다른 삶을 말로 주고받는다

 


  예전에는 ‘내가 사는 고장’ 아닌 다른 곳으로 가면 ‘그 고장에서 사는 사람이 쓰는 말’을 배웠습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같은 인천이라 하더라도 내가 먹고 자고 놀고 뛰고 어울리고 하는 마을에서 쓰는 말이랑, 언덕 하나 넘어가는 마을에서 쓰는 말이랑 조금씩 달랐어요. 큰길 건너 이웃한 마을에서 쓰는 말도 달랐고, 버스를 타고 한참 달려서 찾아가는 다른 이웃마을에서 쓰는 말도 달랐어요.


  그렇다고 경상도말과 충청도말과 전라도말 사이에 다르듯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말씨가 살짝 다르고, 말결이 살짝 다릅니다. 말하는 높낮이가 다르고 빠르기가 달라요. 나어린 우리들은 우리 마을에서 놀 적에 딱히 걸리는 일이 없습니다. 한 마을에서 살아가니까요. 한 마을 동무끼리는 어떤 놀이를 하건 말이 같고 놀이를 하는 법(규칙)이 같습니다. 놀이에서 쓰는 말도 같아요. 그런데, 신흥동에서 숭의동으로 놀러가면, 용현동에서 구월동으로 놀러가면, 만석동에서 송림동으로 놀러가면, 화평동에서 전동으로 놀러가면, 저마다 말씨도 말투도 말결도 살짝살짝 다릅니다. 말씨가 다른 만큼 놀이하는 법이 다르고, 놀이에서 쓰는 말이 다릅니다.


  인천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간다든지 어느 시골로 간다면, 또 서로 말과 놀이법이 달라요. 아이들끼리 서로 어울려 놀면서도 말씨와 놀이법이 다르니 곧잘 부딪힙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이렇다 하더라도 저 마을에서는 저렇게 하니, 좀처럼 뜻이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다툼을 벌이다가, “좋아,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마을에서 하는 대로 하고, 다음에는 너희 마을에서 하는 대로 하자.” 하면서, 한 번씩 놀이법을 바꾸며 같은 놀이를 합니다. 술래잡기도, 돌치기도, 구슬치기도, 고무줄놀이도, 공기놀이도, 참말 마을에 따라 고장에 따라 놀이말이랑 놀이법이 사뭇 달랐어요.


  어릴 적에는 왜 이렇게 놀이말이랑 놀이법이 다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다른 줄 몰랐어도 다른 마을이나 고장이 놀러갔으면, 한나절 뒤에는 다른 마을과 고장에서 쓰는 놀이말이랑 놀이법이 익숙합니다. 때로는 다른 마을과 고장에서 하는 대로 노니 새롭고 재미나기도 합니다. 거꾸로, 다른 마을이나 고장 동무들도 우리 마을로 찾아와서 우리 마을에서 하는 대로 놀이말과 놀이법을 바꾸면서 재미나거나 새롭다고 느낍니다.


  삶자리에 따라 말이 다릅니다. 삶에 따라 말이 다릅니다. 곧, 한 고장이라 하더라도 고장을 이루는 조그마한 마을마다 말이 달라요. 전주·청주·해남이라는 고장은 이러한 고장대로 말씨가 다를 텐데, 이 고장에서도 읍과 면으로 들어가면, 읍과 면에서 또 작은 마을로 더 들어가면, 저마다 말씨가 다르지요. 또 작은 마을에서도 냇물 건너와 골짝 건너 더욱 작은 마을에서 말씨가 다르고, 더욱 작은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말이 달라요. 모든 사람은 삶이 다르기에 모든 사람은 이녁 삶에 맞추어 다른 말을 누립니다.


  그러고 보면, 말을 배운다고 할 적에는 ‘삶을 배운다’고 할 만합니다. 삶을 배우려는 뜻에서 말을 배운다고 할 만합니다. 외국말을 배우는 때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핀란드말이나 네덜란드말을 배워 보셔요. 핀란드와 네덜란드를 한결 깊고 넓게 살피며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이 일본말을 배워 일본에서 지내거나 일본을 돌아다닌다면, 훨씬 깊고 넓게 살피며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일본사람도 한국말 배워 한국에 올 적이랑 한국말 모르는 채 한국에 올 적은 아주 다릅니다.


  이효리 님이 쓴 《가까이》(북하우스,2012)라는 책 217쪽을 보면, “나는 사회인이고 연예인이고 채식주의자다.”와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이효리 님은 “채식(菜食)을 즐긴다”고 하는군요. 요즈음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먹을 적에 ‘육식(肉食)’이라고들 하고, 풀을 즐겨먹을 적에 ‘채식’이라 하니, 무슨무슨 ‘주의자’라고도 적는구나 싶어요. 그런데, 채식이란 ‘풀먹기’요, 육식이란 ‘고기먹기’입니다. 한자로 새 낱말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말로 새 낱말 빚을 수 있어요. 따로 한 낱말로 빚지 않는다면 “나는 풀을 먹어요”라든지 “나는 고기를 좋아해요”라든지 “나는 풀 먹는 사람이에요”라든지 “나는 고기를 즐겨먹어요”처럼 말하면 넉넉합니다. 아직 ‘즐겨먹기’는 국어사전에 안 오르는 낱말인데, 앞으로는 이런 낱말도 국어사전에 실으며 즐겁게 쓰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바바라 아몬드 님이 쓴 글을 김진·김윤창 두 분이 옮김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간장,2013)라는 책을 읽다가 286쪽에서 “그 관계 덕분에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대안적인 성인 여자들의 본보기를 마음속으로”라는 글월을 봅니다. “대안적인 성인 여자들의 본보기”라 나오는데, “또 다른 여자 어른들 본보기”라든지 “여자 어른들 새로운 본보기”로 손질할 만합니다. 아무튼, 이 글월에 “기대고 의지(依支)할 수 있는”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외국책 한국말로 옮긴 분들한테 이러한 말투가 익숙하기에 아무렇지 않게 이처럼 글을 쓰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도 한국말을 깊거나 넓게 헤아리지 않으면, 이러한 말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리라 봅니다. 요즈음 한국사람은 이 말투를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이 말투가 올바르거나 알맞는가를 생각하면서 글을 읽을 수 있을까요.

  한자말 ‘의지하다’는 “= 기대다”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대고 의지할”은 겹말입니다. “기댈”로 손질하든지 “기대고 믿을 만한”처럼 적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쓰는 글 한 줄은 이 글을 읽을 사람한테 잘못된 말투를 퍼뜨립니다. 넓게 돌아보지 않고 읊는 말 한 마디는 이 말을 들을 사람들한테 그릇된 말투를 들려줍니다.


  말을 배운다 할 때에는 삶을 배웁니다. 말을 들려주는 일이란 삶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말을 한다면 어떤 삶을 보여주는 셈일까요. 알맞지 않거나 엉뚱한 말을 들려준다면 어떤 삶을 이야기하는 셈일까요.


  사랑스러운 삶을 나누도록 사랑스럽게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삶을 노래하도록 즐겁게 글을 쓰고 말을 하면 더없이 빛나리라 생각해요.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도록 아름답게 글을 쓰고 말을 하면 아주 싱그럽겠지요.


  일부러 말치레를 하지 않아도 돼요. 애써 겉치레로 말옷을 입히지 않아도 돼요. 무언가 그럴듯해 보이는 말을 하기보다는, 스스로 삶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때에 빛나요. 배운 티를 내거나 있는 티를 드러내는 말로는 우리 가슴을 울리지 못해요. 사랑을 속삭이고 즐거움을 노래하며 아름다움을 빛낼 적에 서로서로 가슴이 촉촉히 젖어들어요. 마음밭에 사랑씨앗 한 톨 심으며 글과 말을 따사롭게 짓습니다. 마음자리에 꿈씨앗 두 톨 심으며 글과 말을 정갈히 다스립니다. 4346.10.18.쇠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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