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그림처럼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5
조정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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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하품
[시를 말하는 시 38] 조정, 《이발소 그림처럼

 


- 책이름 : 이발소 그림처럼
- 글 : 조정
- 펴낸곳 : 실천문학사 (2007.1.30.)

 


  아이들이 하품을 합니다. 그렇지만 하품만 할 뿐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곁에서 아버지가 하품을 합니다. 나 또한 아이들마냥 좀처럼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무언가 하고 싶으니 쉬 잠들지 않습니다. 나도 아이들도 오늘만 날이 아닌데 몸을 느긋하게 쉬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서로 졸립고 고단해 드디어 아버지 먼저 자리에 눕습니다. 아이들한테 말합니다. 얘들아, 아버지 먼저 잘 테니 너희는 더 놀다가 너희끼리 불 끄고 자렴. 이제 아이들은 아버지 곁으로 쪼르르 달라붙습니다. 큰아이는 내 왼쪽에 붙고 작은아이는 내 오른쪽에 붙습니다. 아이들은 이불을 뒤집어쓰며 히죽히죽 웃습니다. 졸린 얼굴로 뭘 그리 웃나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래 이 아이들은 혼자 자기 심심해서 아버지인 내가 얼른 잠자리에 들기를 기다렸습니다. 함께 자리에 누워 내가 자장노래 불러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곱게 뽑는 목소리로 가장 보드라운 노랫가락 들려주기를 기다렸습니다.


.. 고랑을 긁어 마늘씨를 놓았다 / 화살촉이 여럿 나왔다 / 무 배추 뿌리에 녹슨 동전이 딸려 나왔다 / 너를 먹고 자란 김치 얹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며 / 물에 잠겨 / 셋이거나 넷으로 보이는 손을 들여다보았다 /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귀가 우는 소린 줄 알았다 ..  (옹관)


  졸린 아이들을 곁에 누인 뒤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자장노래라기보다 그냥 노래입니다. 놀이하며 부르는 노래요, 밥을 짓다가 마실을 다니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어느 때라도 부르는 노래입니다.


  즐거이 부르는 노래이기에 잠자리에서도 부릅니다. 즐겁게 춤추고 뛰놀며 부르는 노래이기에 잠자리에서도 기운차게 부릅니다. “햇볕은 고와요. 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서 풀빛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빛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서 빨강이 되어요.” 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부르는 노래를 늘 새삼스럽게 다시 부릅니다. 큰아이 나이가 여섯 살이니 여섯 해째 부르는 노래인데, 여섯 해째 부르면서도 언제나 새롭습니다.


  큰아이 먼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다가 조용합니다. 이윽고 작은아이도 누나 못지않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노래 몇 마디 따라하더니 조용합니다.


  노래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며 몇 가락 더 부릅니다. 아이들은 벌써 잠들었지만 굳이 더 부릅니다. 잠든 아이들이 더 신나게 꿈나라에서 뛰놀기를 바라고, 나 스스로 내 마음에 고운 노래밥을 주고 싶습니다. 삶을 빛내는 노래요, 삶을 밝히는 노래입니다.


.. 오늘은 아이가 병중이고 / 내일은 밭에 마늘잎이 마르고 / 다음 날 역시 잠을 얻지 못하여 귀만 얇아진다 ..  (불면)


  노래를 부를 수 있기에 살아갑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갑니다. 노래와 함께 사랑을 꽃피우는 삶을 일굽니다. 노래란 무엇일까 아직 잘 모르겠지만, 스스로 짓는 삶이 노래로 되고 스스로 어깨동무하려는 이야기가 노래로 된다고 느낍니다.


  누구나 짓는 노래입니다. 누구나 짓는 삶이니까요. 누구나 즐기는 노래입니다. 누구나 나누는 사랑이니까요.


  봄 지나고 여름 지나 가을이지만, “마알가니 흐르는 시냇물에, 발 벗고 찰방찰방 들어가 놀자, 조약돌 흰모래 발을 간질고, 잔등은 햇볕에 따스도 하다. 송사리 좇는 마알간 물에 꽃이파리 하나둘 떠내려온다. 어디서 복사꽃 피었나 보다.” 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 빨래터 시원한 물이 차갑다고 느끼는 늦가을 언저리인데, 아직도 나는 이런 봄노래를 부릅니다. 봄노래를 부르며 봄을 떠올립니다. 봄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봄내음 흐르도록 합니다.


  늘 그렇지요. 누가 나를 즐겁게 해 주어야 즐겁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살아야 즐겁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 주어야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면 사랑스럽습니다. 누가 나한테 돈을 주어야 넉넉한 살림이지 않습니다. 있는 만큼 스스로 누리는 사람이 넉넉한 살림 빚습니다.


.. 그 골목에서 / 늙은 개가 내 차의 브레이크를 밟은 건 아니었다 / 번호 붙은 유리문들이 / 홍등 아래 딸 하나씩 담고 사열 중이었다 ..  (붉은 골목)


  이웃 할매 한 분 이른새벽부터 나락을 뒤집습니다. 이른새벽 바람으로 나락이 잘 마르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웃 할매 한 분 이른새벽에 함께 들에 나왔다가 “난 이슬 땜에 못 하것소.” 하고 말씀하며 댁으로 들어갑니다. 동이 틀락 말락 새벽녘에는 아직 나락 뒤집기 이르다 여겨, 밥 한 술 자시고 다시 나오실 듯합니다.


  새벽바람으로 뒤집히는 나락은 새벽내음 머금으며 마릅니다. 해가 좀 솟은 뒤 뒤집히는 나락은 아침내음 마시며 마릅니다. 어느 나락인들 안 익겠어요. 어느 나락인들 안 마르겠어요.


  시골마을에는 나락빛 곱고 나락내음 고소합니다. 시골마을에는 빈 들에 흙내음 감돌고, 마늘 새로 심은 논에는 어느새 마늘싹 오릅니다. 푸릇푸릇 올라오는 마늘싹 바라보다가 그리 멀잖은 지난날 헤아립니다. 예전에는 마늘논 아닌 보리 심은 논이었을 테지요. 고구마 먹으며 겨울 나던 시골사람들 겨울에 보리를 밟으며 어서어서 자라 이듬해 봄에 우리 배 불려 다오 하고 노래를 했겠지요.


  참말 이제 어디를 가도 보리밭 보기는 어렵고 마늘밭이랑 마늘논 넘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늘을 많이 심고 거두어도 이 나라에서 심어 거두는 마늘로는 모자라 이웃나라에서 마늘을 사들입니다. 쌀도 이웃나라에서 사들이고, 보리도 밀도 서숙도 콩도 모주 이웃나라에서 사들입니다. 물고기도 사들이고 포도도 사들입니다. 배나 능금은 어떠할까요? 돼지고기와 소고기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며 하루하루 어떤 살림 꾸리는 사람일까요?


  손에 흙 한 줌 안 묻혀도 온갖 곡식 사다 먹을 수 있는 삶은 즐거운가요. 흙내음과 흙빛을 모르고도 유기농이나 자연농 곡식하고 푸성귀하고 열매를 사다 먹을 수 있는 삶은 아름다운가요. 바람을 모르고 햇볕을 모르면서도 밥을 먹을 만한가요. 빗물을 모르고 풀빛을 모르면서도 아이들과 밥 맛나게 먹을 만한가요.


.. 할머니는 내 눈 속에 누우시고 / 한 말씀을 아는 데 / 나는 평생이 모자라다 ..  (사해를 떠나며)


  조정 님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실천문학사,2007)을 읽습니다. 이발소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잘 안 떠오릅니다. 나는 이발소라는 데에 가 본 지 언제인지조차 안 떠오릅니다. 이발소 아닌 미장원에도 가 본 일이 아주 아스라합니다. 1993년을 끝으로 1994년 2월에 고등학교를 마친 뒤부터 머리카락을 깎은 일이 서너 번쯤입니다. 군대 가기 앞서 한 번 깎고, 군대 갔다 와서 두어 번쯤 조금 잘랐는데, 집에서 가위로 싹둑 자르다가 이마저도 번거롭다 싶어 그대로 둡니다.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채 살아갑니다. 턱과 코에 나는 수염도 그대로 둡니다. 거울 한 번 안 들여다보고 살아가니, 수염이 나는지 안 나는지 모릅니다. 나로서는 내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마음을 기울일 겨를이 없다 할 만한데,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마음을 기울이기보다는 내가 날마다 맞이하는 하루에 마음을 기울일 뿐입니다. 하루하루 누리면서 삶을 짓고픈 마음일 뿐입니다. 머리카락 매만지거나 이발소 들락거린대서 삶을 못 짓지는 않아요. 다만, 머리카락 자르는 데에 들일 10분이 아깝고, 이발소 오가는 한 시간이 아쉽습니다. 이동안 아이들과 노래하며 춤추면 참으로 즐겁습니다. 이동안 아이들 자전거에 태워 바닷가로 마실을 다니면 더없이 재미납니다.


.. 신문을 집어다 깔고 앉는다 / 일없이 외유 중인 국회의원들을 / 뭉기적뭉기적 이해한다 / 일 없는 하루를 견디는 일은 어렵다 ..  (맨손체조)


  이발소에서 멀뚱멀뚱 얌전히 앉아 이발소 그림 쳐다보며 꼼짝 않고 있어야 하는 일이란 얼마나 하품이 날까요. 왜 우리들은 머리를 예쁘게 깎아야 할까요. 왜 우리들은 다소곳하게, 깔끔하게, 남들 보기 좋게 머리를 손질해야 할까요.


  우리들은 서로를 눈으로 겉모습을 바라보며 사귀나요. 우리들은 서로를 사랑으로 마음을 살피며 만나나요. 두 눈이 달렸으니 얼굴이나 몸매를 바라볼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한테는 사랑과 꿈이 있는 만큼, 나로서는 사랑과 꿈으로 내 이웃과 동무를 마주하고 싶어요. 내 사랑을 읽고 내 이웃 사랑을 읽고 싶습니다. 내 꿈을 말하고 내 동무 꿈을 듣고 싶습니다.


  신문에 나오는 정치나 경제나 사회 소식을 듣거나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방송에 흐르는 연예인 뒷이야기나 스포츠 소식은 듣거나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요. 나는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 정이 식은 지 오래된 나에게 / 밥은 꼭 한 공기를 더 떠준다 ..  (불경기)


  기지개를 켭니다. 새벽 네 시를 지나니 눈이 또렷또렷 맑습니다. 새벽 다섯 시를 지나니 팔다리 뻑적지근함이 사라집니다. 저 먼 멧기슭 따라 발그스름한 기운 어립니다. 발그스름한 기운은 차츰 노르스름하게 바뀔 테고, 이 기운은 곧 하얗게 달라질 테지요.


  아침저녁으로 뜨고 지는 해가 곱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싱그럽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오는 멧새가 사랑스럽습니다.


  삶이 흘러 이야기 됩니다. 이야기 어우러져 사랑이 됩니다. 사랑이 감돌며 글로 거듭나고 노래로 다시 태어납니다. 글과 노래는 어느새 다시 삶 밝히는 밑바탕 됩니다.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는 하루 오늘 하루도 새롭게 맞이합니다. 4346.10.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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