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페코로스 시리즈 1
오카노 유이치 지음,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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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273

 


늙은 엄마, 늙은 아들
―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오카노 유이치 글·그림
 양윤옥 옮김
 라이팅하우스 펴냄, 2013.10.8. 12500원

 


  작은 아이들은 적게 먹습니다. 큰 어른들은 많이 먹습니다. 작은 아이들은 힘이 여리고, 큰 어른들은 힘이 셉니다. 작은 아이들한테 무거운 짐을 들게 하지 않습니다. 큰 어른들이 무거운 짐을 듭니다. 작은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뛰놀고, 큰 어른들은 씩씩하게 일합니다.


  어른은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는 어른과 살아갑니다. 어른은 아이를 돌봅니다. 아이는 어른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어른은 스스로 사랑을 지어 아이를 낳고, 아이는 스스로 사랑을 누리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흔히 어른들이 아이를 돌보며 아낀다고 여기지만, 어른들은 아이가 있기에 새롭게 기운을 차리며 ‘살아가는 힘’을 얻습니다. 아이들 작은 손과 작은 눈과 작은 몸과 작은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어른들 큰 손과 큰 눈과 큰 몸과 큰 마음이 ‘얼마나 큰가’를 되새깁니다.


- ‘녹내장 증세가 있는 엄니의 오른쪽 눈동자에 푸른 상자가 들어 있다. 이 안에 지금까지 봤던 것들이 몽땅 들어 있어.’ “근데 이제 몽땅 잊어버려도 괜찮지?” ‘괜찮고말고! 살아 있기만 하면 다 잊어버려도 괜찮아!’ (28∼29쪽)
- ‘엄니가 새벽녘에 바느질을 하십니다. 이불 끝을 잡고서, 보이지 않는 실과 바늘로 꼼지락꼼지락.’ “뭘 꿰매고 계세요?” “우리 아들 나들이옷을 기워 주고 있고만. 에효, 허리야.” ‘엄니는 설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나 봅니다.’ (34∼35쪽)

 


  작은 새가 노래합니다. 작은 새는 크게 무리를 짓거나 여럿이 짝을 지어 날아다니면서 노래합니다. 작은 나무가 춤춥니다. 작은 나무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가을바람 봄바람 골고루 누리면서 춤춥니다.


  가을걷이 마치고 가을나락 말리는 시골 흙지기 곁에서 작은 새가 노래합니다. 구름 없이 파란 하늘 등에 이고 마늘을 심는 시골 흙지기 둘레에서 작은 새가 노래합니다.


  봄에 피어 씨앗 날리던 민들레가 가을에 다시 잎사귀 벌립니다. 봄에 향긋한 내음 퍼뜨리던 쑥이 가을에 다시 푸른 잎사귀 내밉니다. 한쪽에서는 굵고 큰 석류알 맺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조그마한 석류꽃 새삼스레 피어나려 합니다.


  감잎이 집니다. 매화나무 잎이 하나둘 떨어집니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는 겨우내 짙푸른 빛을 한결 더하려고 새잎이 돋습니다. 겨울잠을 앞둔 개구리는 마지막 노래를 들려주고, 가을이 무르익으며 풀벌레 노랫소리 구성집니다.


  햇볕이 드리워 마을과 들판이 따사롭습니다. 바람이 살랑이며 마을과 들판이 시원합니다. 여름까지 우거졌던 풀은 시들고, 가을에 꽃대 올린 풀은 하나둘 저물면서 씨앗을 남깁니다.


  시골에서 아이들은 시골바람 먹습니다. 도시에서 아이들은 도시바람 마십니다. 시골에서 아이들은 시골바람을 어떤 넋으로 먹을까요. 도시에서 아이들은 도시바람을 어떤 넋으로 마실까요.


- ‘햇살을 머금은 커튼이 부풀어오른다. 별것 아닌 이런 시간과 평화로운 경치가 모두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지, 3·11 대지진 이후 항상 생각한다.’ (36쪽)
- “예순 살이면 너, 환갑이야!” “나도 알아요.” “이제 그리 젊지도 않으니까 술 좀 작작 마셔라이!” “큰소리 치지 마, 창피하잖아.” (38쪽)

 

 


  즐겁게 놀며 자란 아이들이 즐겁게 일하며 살아가는 어른이 됩니다. 웃으며 놀던 아이들이 웃으며 노래하고 일하는 어른이 됩니다.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서로를 아끼던 아이들이 맑고 착하게 어깨동무하며 일하는 어른이 됩니다.


  사랑을 지켜보고, 사랑을 배우며, 사랑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온통 사랑에 가득 둘러싸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노래하며, 사랑을 꿈꾸던 아이들은 언제나 사랑을 떠올리며 살아갑니다. 곧, 어릴 적부터 사랑으로 살아온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늙은 어버이한테 사랑을 돌려줍니다. 이동안 ‘어른 된 아이’들은 이녁 아이들한테 ‘사랑은 말 아닌 삶으로 보여주고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가만히 다시 물려주어요.


  먼먼 옛날부터, 아주 오랜 옛날부터, 책 아닌 삶으로 이어온 사랑입니다. 아스라한 옛날부터, 참말 사람 역사가 비롯한 그날부터, 중앙정부나 교육기관 아닌 마을과 보그자리에서 이어온 사랑입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사랑이기에 즐겁게 일하는 하루로 이어갑니다. 기쁘게 꿈꾸는 사랑이기에 알뜰살뜰 여미는 살림살이로 이어집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사랑이고, 마음과 마음으로 가꾸는 사랑입니다. 작은 아이한테서 큰 어른한테 이어지는 사랑이고, 큰 어른한테서 늙은 어버이한테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 “대낮부터 방에서 데굴데굴 방귀만 붕붕 뀌면서 잘난 척하면 못써.” “방귀만 붕붕 뀌는 건 엄니잖아!” “또 에미를 혼내는구먼.” (49쪽)
- ‘엄니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자꾸 잊어버리고 자꾸 가벼워진다.’ (51쪽)
- ‘“시집온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솔개가 그리는 동그라미 안에서 살아온 셈이여.” 언젠가 어머니가 그렇게 불쑥 중얼거렸다.’ (76쪽)

 


  오카노 유이치 님이 그린 만화책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라이팅하우스,2013)를 읽습니다. 오카노 유이치 님은 나이 예순이 넘어 이녁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다시 배웁니다. 어머니 삶에 비추어 이녁 삶을 돌아보고, 어머니 지난날을 되새기며 이녁 지난날을 되새깁니다.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짚고, 한 사람이 걸어갈 길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대단한 효자나 효녀인 오카노 유이치 님이 아닙니다. 여느 마을 여느 살림집 여느 사람인 오카노 유이치 님입니다. 여느 삶자리에서 누리는 여느 이야기를 여느 만화 하나로 빚습니다. 여느 웃음을 들려주고, 여느 눈물을 보여주며, 여느 사랑을 속삭입니다.


- “처녀 때의 내가 찾아온 꿈을 꿨어야. 내일, 나가사키로 시집가야 하는데, 방금까지 농사일을 돕느라 준비도 못 했어요. 신부 수업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고 너무 걱정이 되어서.” (96쪽)
- “내가 치매에 걸려서 네 아버지가 나타난 거라면, 치매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115쪽)
- “여기가 바로 지금의 나카토리예요.” “지금이란 게 언제여?” (178쪽)


  어릴 적에 동생들 돌보느라 학교 문턱을 구경조차 해 보지 못했다고 하는 ‘오카노 유이치 어머님’은 글을 읽을 줄 알까 궁금합니다. 글은 이럭저럭 익혔을까요. 언제나 동생을 돌보고, 시집오는 날 하루 앞서까지 밭일을 하던 어머님은, 시집을 온 뒤부터 고된 일에서 풀려나셨을까요. 새로운 일이 어머님 어깨에 얹혔을까요. 이제까지 동생을 돌보던 삶에서 이녁 아이들 돌보는 삶으로 바뀌는데, 어머님 동생들은 어머님 등과 무릎에서 무엇을 느끼며 컸을까요. 오카노 유이치 님과 이녁 동생은 이녁 어머님 삶과 주름살과 치매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느끼면서 살아갈까요.


- “우리 집에 가자. 기다리고 있어야, 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3년째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잊어버렸어도, 엄니는 살아 있다. 대지진을 겪은 이 나라에, 다른 살아남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다.’ (206쪽)


  어제 하루 살았듯이 오늘 하루 살아갑니다. 어제 하루 노래했듯이 오늘 하루 노래합니다. 어제 사랑했듯이 오늘 하루 사랑합니다. 어제 하루 밥을 차렸듯이 오늘 하루 밥을 차립니다.


  우리 마을 딱새 두 마리 짝을 지어 우리 집 처마 밑으로 둥지를 틀려고 합니다. 아니, 우리 집 처마에 있는 빈 제비집을 저희 둥지로 삼으려 합니다. 제비는 가을이 오자마자 태평양 건너 따뜻한 나라로 돌아갔으니, 겨우내 추위를 이기려고 빈 제비집을 찾아다니며 둥지를 틀려고 하는구나 싶어요.

  이 작은 딱새들은 어떤 사랑으로 만나 조그마한 제비 둥지에 조그마한 살림을 차리려 할까요. 이 작은 딱새들은 겨우내 어떤 삶을 지으며 저희 새끼들한테 사랑을 물려줄까요.


  천천히 동이 트고 밥이 끓습니다. 미역국은 다 끓였습니다. 큰아이는 새벽에 일어나서 쉬를 눕니다. 작은아이는 간밤에 밤오줌 누였습니다. 오늘도 새 하루 열리고, 오늘도 아이들은 신나게 뛰놀 테지요. 어딘가에서 늙은 엄마는 늙은 아이와 함께 새날 맞이합니다. 어딘가에서 젊은 엄마는 어린 아이와 함께 새날 누립니다. 4346.10.1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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