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묶은 책
옛날에 나온 책은 실로 묶었다. 옛날에 나온 책은 오래되어도 종이가 쉬 삭지 않는다. 옛날에 나온 책은 그리 두툼하지 않아도 부피가 있으면서 무겁지 않았으며, 손에 쥐면 느낌이 보드랍다. 참말 나무에서 얻은 종이로 만든 책인 줄 느낄 수 있는 옛책이다.
오늘날에 나오는 책은 본드를 바른다. 산성종이를 쓴다. 쉬 빛이 바래며, 쉬 누렇게 뜬다. 오늘날에 나오는 책은 앞으로 서른 해나 쉰 해쯤 지나고 나면, 종이가 바스라지거나 부스러질는지 모른다.
책은 껍데기 아닌 알맹이를 읽는다. 제아무리 아름다우며 좋은 종이를 써서 만든 책이라 하더라도, 이 아름다우며 좋은 종이에 얼토당토않거나 어수룩한 이야기를 실으면, 책이 책답지 못하다. 껍데기는 책 꼴이라 하더라도 속살은 책하고 동떨어질 수 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책이라 하더라도, 그러니까 비록 본드로 바르고 디자인이나 제본이 좀 어수룩하더라도, 속에 담은 이야기가 알차며 아름답다면, 책 꼴은 아쉽지만 그예 책다운 책이라 말할 만하다. 겉보기로 살피면 오늘날 책으로는 나무결이나 나무내음 맡기 어렵다 하지만, 속살을 살피면서 ‘그래, 책은 참 책이로구나. 책은 나무에서 왔구나.’ 하고 헤아릴 만하다.
겉과 속이 모두 알차다면 가장 훌륭하면서 아름답겠지. 그런데, 겉모습까지 아름답게 꾸미려는 책은 십만 권이나 백만 권 한꺼번에 만들지 못한다. 백 권 천 권 천천히 만들어 천천히 읽히고 천천히 나눌 수 있기에 훌륭하면서 아름다운 책이다.
아름드리나무가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나날이 걸리는가. 아름드리나무처럼 ‘아름드리책’이 되자면, 하루이틀 아닌 한 해 두 해 아닌 열 해 스무 해 아닌, 백 해나 이백 해를 헤아려야지 싶다. 백 해를 내다보며 쓴 글과 이백 해를 아우르며 그린 그림과 삼백 해를 돌아보며 찍은 사진으로 빚은 책일 때에, 더없이 아름다운 책이로구나 하고 말할 만하리라 느낀다. 4346.10.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