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일기 쓰는 마음

 


  두 아이를 모두 재우고 나서 홀로 깊이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왼쪽에 큰아이 오른쪽에 작은아이 재우느라 자장노래를 한참 부르는데, 노래를 부르다가 내가 먼저 곯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하나씩 꿈나라로 사뿐사뿐 접어드는 결을 조금 더 자주 느낀다. 이때에 나는 우리 옆지기가 ‘몸이며 마음이 안 아픈 사람’이었으면 어떠했을까 하고 돌아본다. 몸도 마음도 튼튼한 옆지기였다면, 몸이나 마음 가운데 한쪽이 튼튼한 옆지기였으면 어떠했을까.


  모르는 노릇이지만, 옆지기가 몸이나 마음이 튼튼할 적에는 아버지가 두 아이를 건사하면서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놀리고 가르치고 하지는 못했으리라 본다. 내가 게을러진다기보다 ‘우리 사회 여느 흐름’ 물살에 따라 ‘몸과 마음이 튼튼한 옆지기’가 집일이며 아이돌보기이며 거의 도맡지 않으랴 싶다. 이러면서 나는 시골살이는 꿈조차 못 꾸면서 도시에서 바깥일 맡아 돈을 버는 일에 매달려야 하지 않았으랴 싶기까지 하다. 그러면, 아이들은 유아원·어린이집·유치원을 다닐 테지. 나는 아이들과 저녁에만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될 테지.


  내가 육아일기를 쓸 수 있는 까닭이 옆지기가 아픈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 대목은 몹시 크구나 싶다. 또한, 옆지기가 아픈 사람이 아니라 한다면, 나 스스로 이모저모 살피거나 배우거나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느낀다. 또는 퍽 늦게 깨닫거나 살피거나 받아들였겠지.


  다른 한편으로, 몸이며 마음이 튼튼한 옆지기를 만났을 적에 이녁이 바깥일에 더 눈길을 두어 바깥으로 돌아다닌다면, 나로서는 오늘날과 같이 집일을 하면서 아이돌보기를 도맡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는 처음부터 깊거나 넓게 살피지 못한다. 아이한테 무엇을 먹이고, 살림살이를 어떻게 건사하며, 예방주사가 어떤 화학성분으로 이루어졌다든지, 또 아이를 낳고 세이레를 어떻게 맞이하고, 시설 아닌 집에서 아이들과 누리는 삶을 어떤 넋으로 빚느냐 하는 대목을 얼마나 살필 수 있을까.


  새근새근 잘 자는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고 이불깃 여미면서 생각에 잠긴다. 나는 나한테 주어진 삶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사람이라 할 텐데, 오늘 내 삶은 스스로 바라면서 걸어가는 길이라 할 만하다. 집일과 아이돌보기 도맡는 사내(아버지)가 거의 없는 이 나라에서, 아이들이 어떤 사랑을 물려받을 때에 아름답게 자라는가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기에 걷는 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육아일기를 쓰고 싶었기에 걷는 길이 아니라, 우리 집 두 아이가 삶과 마을과 보금자리를 고루 돌아보도록 이끌고 싶기에 걷는 길이다. 함께 일구며 함께 꾸리는 삶과 살림이지, 아버지나 어머니 한쪽이 짐을 짊어지는 삶이나 살림이 아니다. 시설이나 학교에 섣불리 맡길 교육이 아니라, 집과 마을에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이룰 교육이다. 아이들은 지식이 아닌 삶을 배우면서 물려받을 때에 싱그럽게 자란다. 아이들은 학습(선행학습이건 후행학습이건)이 아닌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를 누릴 때에 즐겁다. 호미질을 학습시킬 수 없고, 모래밭에 그림 그리며 노는 삶을 학습시킬 수 없다.


  어머니들이 아기를 몸속에 열 달 보듬는 느낌이 더없이 즐거우며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이 땅에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으며 재우고 입히고 먹이는 느낌 또한 그지없이 즐거우며 아름답다. 아이를 씻겨 보라. 아이를 먹여 보라. 아이한테 노래를 불러 보라. 아이와 그림놀이를 하고 공놀이를 해 보라. 아이와 손을 맞잡고 마실을 다녀 보라.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나들이를 다녀 보라. 아이와 눈을 마주하면서 책을 읽어 주고 글을 가르쳐 보라. 하루하루 얼마나 새로우며 기쁜가. 너무 많은 사내(아버지)들이 이 기쁨과 보람과 웃음하고 동떨어진 채 지내니, 사내들도 자꾸 바보스럽게 살고, 이 나라와 사회와 마을도 아름답지 못한 쪽으로 기울어지는구나 싶다. 4346.10.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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