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 소년한길 어린이문학 1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이오덕을 읽는다 1

 


문학 하는 사람, 문학 읽는 사람
―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이오덕 글
 소년한길 펴냄, 2001.5.3. 15000원

 


※ 책풀이 ※
2001년에 나온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는 “권태응 동요 이야기”라는 작은이름이 붙는다. 1918년에 태어나 1951년 전쟁통에 몸이 아파 서른세 살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만 동요시인 권태응 님이 남긴 작품 366 꼭지를 차근차근 살핀다. 권태응이라는 사람이 이룬 문학넋을 헤아리고, 권태응 동요에 나타나는 가락(운율)을 돌아보며, 권태응이라는 사람이 아이들과 어른들한테 들려주고 싶던 노래가 무엇인가를 짚는다. 권태응 동요는 바로 ‘농사꾼 아이들’이 부른 노래요, 앞으로 이 나라를 씩씩하게 이끌며 일굴 넋은 ‘시골마을 노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가장 좋은 선물은 마음 담은 사랑 어린 말이지 싶어요. 백만 원도 천만 원도 일억 원도 아닌, 마음 담은 사랑 어린 말이 서로를 가장 따사롭게 살찌우지 싶어요. 다만, 가난한 살림일 적에 누군가 백만 원을 보태 준다면 무척 고맙고 즐겁지요. 힘겨운 살림인데 누군가 천만 원 보내 준다면 아주 반갑고 기쁘지요. 돈 만 원에 웃음꽃이 피기도 하고, 돈 십만 원에 눈물이 흐르기도 해요. 왜냐하면, 이러한 돈은 ‘숫자’가 아닌 ‘마음 담은 사랑’으로 주고받기 때문이에요.


  아이들하고 나누는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는 ‘이름난 작가나 화가나 가수’가 베풀어야 즐겁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학교 문턱 밟은 적 없는 할매나 할배가 글 한 줄 적어도 즐겁습니다. 여느 수수한 어머니 아버지가 쓴 쪽글이나 작은 그림이어도 기쁩니다. 자장노래이든 놀이노래이든 어버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노래는 더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러우니 사랑스럽지요. 사랑을 담아 부르기에 사랑스럽고, 이 사랑스러운 노래를 들으면서 사랑이 새로 자랍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이들한테 책을 많이 읽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넉넉히 틈을 마련할 수 있어 책을 많이 읽어 준다면, 많이 읽어 주는 대로 좋아요. 책을 읽어 줄 틈은 없으나, 아이 손을 잡고 사뿐사뿐 들마실이나 숲마실 다녀도 좋아요. 택시를 불러서, 또는 기차나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바닷가로 나들이를 다녀도 좋아요. 함께 삶을 즐기려는 마음일 때에 아이도 어른도 즐겁습니다.


.. 우리 나라는 농사꾼의 나라였습니다. 온 백성의 8할이 농사꾼이었으니까요.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9할도 더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은 농사꾼들이 농사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데서 생겨났고, 노래도 이야기도 춤도 농사꾼들의 것이었습니다. 두드리고 치고 불고 하는 악기도, 그림도, 질그릇도, 집도 모조리 농사꾼들의 것이었지요 … 우리 나라가 농사꾼의 나라라 했는데, 그 농사꾼의 삶을, 농사꾼의 마음을 제대로 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땅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과 함께 살아온 농사꾼들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시인이나 소설가가 있습니까 … 깨끗한 어린이 마음과 남을 생각하는 따스한 정, 이것이 권태응 동요 문학을 받쳐 주는 두 가지 큼직하고 든든한 주춧돌이요 기둥이다 ..  (5, 6, 421쪽)


  동시작가 한 분이 쓴 아름다운 동시를 아이한테 읽어 주어야 아이가 즐겁지 않습니다. 어머니인 내가 동시를 쓰고, 아버지인 내가 동시를 쓰면 됩니다. 아이로서는 ‘이름난 작가’이거나 ‘훌륭한 작가’이거나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한테는 아이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를 즐겁게 들을 적에 즐거워요. 동시를 읽어 주는 어버이도 이와 같아요. 누구 작품을 골라서 읽어 주어도 즐거울 텐데, 나 스스로 아이와 나란히 앉아서 작은 종이에 글을 짤막히 적어 사랑을 담아 읽어 주면 모두 동시가 되어요.


  시 잡지에 실려야 시가 되지 않습니다. 시집을 척 하니 내놓아야 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쓸 때에 시가 됩니다. 마음으로 사랑을 속삭이며 이 이야기를 찬찬히 옮길 적에 시가 됩니다.


  저 먼 나라에 있는 문학이 아니에요. 내 곁에 있는 문학이에요. 대학교를 나오거나 어떤 스승한테서 배워야 되는 문학이 아니에요. 내가 손수 일구는 삶에서 비롯하는 문학이에요.


  우리 모두 시를 써요. 시인이 되려는 시 말고, 스스로 삶을 즐기려는 시를 써요. 우리 함께 동시를 써요. 이쁘장한 말잔치 이루려는 동시 말고, 아이들과 우리 삶터 아름답게 일구려는 동시를 써요.


  가을날 가을비 맞으면서 시를 써요. 가을날 들에서 벼를 베는 흙지기 곁에서 일손을 거들면서 시를 써요. 가을볕 쬐면서 가을노래 부르듯이 시를 써요. 가을볕 쬐며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누런 물결 넘실거리는 들길을 달려요.


  눈빛을 반짝이며 시를 써요. 빙그레 웃음지으며 시를 써요. 두근두근 설레는 가슴으로 시를 써요. 맛난 밥 함께 나누는 사랑으로 시를 써요. 더러워진 옷 신나게 복복 비벼 빠는 손길로 시를 써요.


.. 돈에 환장하고 돈에 미쳐 서로 아귀가 되어 싸우는 사람들의 세상에는 정치고 교육이고 종교고 학문이고 예술이고 명예고 죄다 돈이다. 모든 일이 돈벌이가 되고, 모든 것이 돈벌이 대상이 된다. 문학도 돈벌이 수단이 되고, 아이들도 돈벌이 대상이 된 지가 오래다 … 산속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은 내가 알기로 모두가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나 착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귀가 되어 싸우는 도시에서는 살아갈 도리가 없어, 가진 것을 죄다 빼앗기고 쫓겨나 오직 그들을 포근히 안아 주는 자연을 찾아간 것이다 … 지금은 그 닭들이 모조리 조그만 통 속에 갇혀서 알만 낳는 비참한 기계가 되고, 소리개도 없어지고, 병아리를 세면서 집을 지키던 아이들도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서 외국말 외국글 배운다고 얼이 다 빠져 버렸다. 그렇다면 이런 (권태응) 동요도 폐기 처분을 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럴수록 이런 동요를 가르쳐야 한다. 가르쳐서 우리들에게 이런 삶이 있었다는 것을, 이런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이요, 사람다운 삶이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 해야 한다 ..  (21, 46∼47, 55쪽)


  콩을 털면서 콩내음 나는 시를 씁니다. 들깨를 털고 참깨를 털면서 들깨내음과 참깨내음 감도는 시를 씁니다. 나락을 베어 햇볕에 말리면서 나락내음 고소한 시를 씁니다. 감을 따며 감내음 물씬 흘리는 시를 씁니다. 호박을 따서 호박죽 쑤는 동안 호박내음 달달한 시를 씁니다.


  시는 삶에서 태어납니다. 스스로 일구는 삶에 따라 시가 태어납니다. 시는 사랑에서 태어납니다. 스스로 길어올리는 사랑에 따라 시가 태어납니다. 시는 꿈에서 태어납니다. 스스로 아름답게 이루고 싶은 꿈에 따라 시가 태어납니다.


  밥을 짓는 손길이 시를 쓰는 손길이에요. 밥을 지어 밥그릇에 푸는 손길이 시를 쓰는 손길이지요. 밥을 지어 밥그릇에 푸고는 밥상에 올려 아이들 부르는 목소리가 시를 쓰는 목소리 되어요. 모두 즐겁게 먹은 밥상을 치우며 설거지를 하는 손길이 다시금 시를 쓰는 손길이 돼요.


  걸레를 쥔 손이 시를 쓰는 손입니다. 풀밭을 밟고 흙땅을 밟는 발이 시를 쓰는 발입니다. 구름을 보고 무지개를 보며 달과 별을 보는 눈이 시를 쓰는 눈이에요. 그러면, 시를 쓰는 귀는 어떤 귀일까요? 풀벌레 노랫소리와 개구리 노랫소리에 멧새 노랫소리를 듣는 귀가 바로 시를 쓰는 귀입니다.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시를 쓸 수도 있어요. 기차나 버스 지나가는 소리를 듣다가 시를 쓸 수도 있어요. 어느 자리에서도 시를 쓸 수 있어요. 마음이 따스하다면 따스한 이야기가 시로 태어나요. 마음이 너그럽다면 넉넉한 이야기가 시로 거듭나요. 마음이 환하다면 환하게 빛나는 이야기가 시로 태어나요.


  자, 내 손으로 내 삶을 써요.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고 곰곰이 돌아보면서 시를 써요. 시를 쓰는 동안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겠지요. 아름답게 일군 삶을 떠올린다면 아름다운 모습에 웃음이 나고, 얄궂게 망가뜨린 삶을 되새긴다면 얄궂은 모습에 눈물이 나요.


  기쁜 일은 기쁘게 씁니다. 슬픈 일은 슬프게 씁니다. 기쁜 일을 이웃과 나눕니다. 슬픈 일을 잔잔히 삭혀 내 이웃이 슬플 적에 손을 내밀어 어깨동무를 합니다.


.. 이 수수한 말로 된 (권태응) 동요는 도리어 그 어떤 재주를 부린 작품보다 더 귀하고 값있는 것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우리 문학에서 이와 같이 일하는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정확하게(비뚤어지지 않게) 그려 보인 작품이 동요고 동시고 그밖의 일반시고 거의 없기 때문이다 … 이 동요 역시 농민의 아들딸이면 누구나 가지는 느낌을 평범한 말로 썼다 … 나무만 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서울 같은 큰 도시 근처에나 있었다. 동요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은 한여름에도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팔았던 사람을 생각해서 쓴 것인가? 그렇다면 한여름에 들이나 산에서 땀 흘려 농사일을 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고 어쩌다가 있는 한여름 산의 나무꾼을 보았단 말인가? 이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농촌과 우리 겨레 전체의 삶을 모르는 사람, 도시의 방안에서만 살면서 세상을 머리로만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그저 시골에서 나뭇짐을 지고 도시에 팔러 온 사람밖에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 쓴 동요라 할밖에 없다 … 맨발로 다니는 것이 야만스럽고 원시스럽다면, 야만인과 원시인이야말로 가장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24, 26, 27, 75쪽)


  감자꽃을 본 사람은 감자꽃 시를 씁니다. 호박꽃을 본 사람은 호박꽃 시를 씁니다. 장미꽃을 본 사람은 장미꽃 시를 쓰겠지요. 마음이 뭉클하도록 움직이게 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시를 써요. 그러니까, 메밀꽃을 보면서도 메밀꽃 이야기를 시로 못 쓰는 사람이 있어요. 메밀꽃인 줄 알아채지 못하기도 할 테지만, 메밀꽃이 피건 말건 쳐다보지 않으니까요.


  요즈음 벼꽃 들여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날마다 쌀밥 먹기는 하면서, 쌀겨가 어떻게 생긴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갓 벤 나락을 겨(껍질)째 입에 넣으면 겨도 쌀알도 살살 녹는 줄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있으려나요.


  무지개가 사라진 지 오래된 이 나라입니다. 무지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몹시 드물다 보니, 이제 이 나라에서 무지개를 노래하는 시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뭉게구름 이야기를 시로 쓰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소나기 이야기를 시로 쓰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마치 폭탄처럼 퍼붓는 무시무시한 비만 보는 오늘날이니, 이런 폭탄 같은 비를 시로 쓰는 사람은 있어요. 자동차 가득한 찻길이나 고속도로 넘치는 이 나라이니, 자동차 이야기를 시로 쓰는 사람은 있어요. 입시지옥과 학원굴레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학교와 학원에서 시키는 숙제와 공부 때문에 머리가 아픈 이야기를 시로 쓰는 사람은 있어요.


  그러고 보면, 골목놀이 이야기를 시로 쓰는 사람이 싹 사라집니다. 연을 날린다든지 자를 친다든지 돌을 깐다든지 물장구를 친다든지 흙땅에 금을 긋고 땅따먹기를 한다든지 고무줄을 넘는다든지 제기를 찬다든지 하는, 더없이 수수한 놀이 이야기를 시로 쓰는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어른도 어린이도 없습니다. 어른도 이렇게 안 놀고 어린이도 이렇게 안 노니까, 이런 놀이 이야기가 시로 다시 태어나지 못합니다.


  이제는 컴퓨터게임 이야기가 시로 태어납니다. 어른도 아이도 컴퓨터에 빠지니까요. 이제는 비바람이나 안개구름이나 골짜기 이야기가 시로 태어나지 못합니다. 멧골이나 두메에서 비바람이나 안개구름이나 골짜기를 누리는 아이도 어른도 거의 찾아볼 길 없으니까요.


  시는 삶을 좇습니다. 삶은 시로 나타납니다. 시는 삶을 그립니다. 삶은 시로 드러납니다.


.. 아이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무래도 어머니다. 그런데 농촌 어머니들은 너무나 바쁘고, 일을 너무 많이 한다. 방아를 찧고, 물을 길어 와서는 밥을 짓는다. 실을 자아 길쌈을 하고, 빨래며 바느질을 한다. 그리고 논밭에 나가 농사일까지 하게 된다.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고 있는가를 바로 보고 깨닫게 하는 것도 문학이 잘 할 수 있다 … 일하는 삶을 노래하여 그 삶을 더욱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시, 그것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 아이들에게는 막대기 하나가 온갖 연장이 되고 온갖 장난감이 되고 놀잇감이 된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잘 아는 시인의 눈에는 막대기 하나가 또 재미있는 노랫감이 되는 것이다 … 아이들이 노는 자리가 바로 어른들이 일하는 자리이고, 아이들의 놀잇감은 일하는 자리에서 얻게 된다 … 맑은 물이 흘러가는 마을 앞 개울, 그곳은 엄마가 빨래하는 곳이고, 엄마를 따라간 아이들은 헤엄을 치는 놀이터다 … 가을날 엄마와 아기가 함께 들에 나가면 그 들판은 엄마의 일터가 되고, 아기에게는 다시 더없는 놀이터가 된다 ..  (29, 32, 58, 67, 70, 71쪽)


  우리 집 한켠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가을 고들빼기꽃을 바라봅니다. 모처럼 가을비 내리면서 고들빼기꽃 촉촉히 젖습니다. 고들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봄에는 아주 조그마한 줄기가 올라 줄기째 꺾어서 나물로 먹곤 합니다. 여름부터 줄기 씩씩하게 더 돋으며 입사귀를 쩍쩍 벌립니다. 이때부터는 잎사귀만 바지런히 뜯어서 먹는데, 아무리 날마다 뜯어서 먹어도 새 잎사귀 끝없이 새로 내놓습니다. 이동안 고들빼기는 키가 쑥쑥 자라지요. 가을 맞이하면 잎사귀 줄면서 꽃대가 올라 어른 키를 넘어섭니다. 이제 잎사귀 그만 따먹으라는 듯합니다. 이러고는 줄기 옆으로도 새 꽃대가 돋으며 몽우리가 잔뜩 져요. 고들빼기풀 한 포기에서 꽃망울이 백 송이 안팎 맺힙니다.


  고들빼기풀 한 포기에서 피어나는 흰꽃이나 노란꽃은 달포 즈음 갈마듭니다. 한꺼번에 수십 송이가 피어날 적도 있습니다. 수십 송이 고들빼기꽃 피어나면 나비들은 부산합니다. 이 꽃 저 꽃 팔랑팔랑 날갯짓하면서 꽃가루를 빨아먹습니다.


  맛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나비와 벌이 고들빼기 꽃송이마다 내려앉아 바삐 꽃가루 빨아먹는 모습을 보면, 곁에서 군침이 흐릅니다.


  그러나, 참지요. 봄부터 가을까지 고들빼기잎 즐겁게 누렸으니, 이제 고들빼기씨 맺어 흙으로 뿌려야 이듬해에 새 고들빼기 잎사귀 누릴 수 있습니다. 가을날에는 고들빼기꽃만 실컷 누립니다.


  아이하고 마당에 나와서 가을볕 쬐면서 가을꽃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그래, 시골에서 아이와 살아가며 시골꽃을 늘 바라본다면, 내가 쓸 시란 바로 이렇게 늘 마주하는 시골꽃이 되겠군요. 시골꽃을 노래하고 시골나비를 이야기하며 시골빛을 씁니다. 꽃 한 송이가 어떻게 태어나고, 꽃 한 송이를 나비가 어떻게 누리며, 꽃 한 송이가 다시 흙으로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지켜봅니다.


.. 소꿉 양식이란 말도 재미있지만, 소꿉 양식을 얻기 위해 호박 배를 쪼개는 엄마 옆에서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앉아 있는 아기들을 찾아낸 시인의 그 맑은 마음이 부럽기만 하다 …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은 무엇이든지 우리 말로 그 이름을 지어서 말하던 그 옛날 우리들의 깨끗한 마음과 삶이 갈수록 그리워진다 … 나무의 참모습을 알고 깨닫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깨끗한 몸과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 아마도 천 년도 넘게 이어져 왔을 이 박 농사 호박 농사는, 우리 겨레가 초가집을 짓고 흙담을 둘러 쌓아 거기서 먹고 자고 일하고 노래하면서 살아가는 데 가장 가까이 자리잡아 우리 겨레의 삶과 정서를 이어주면서 하얀 꽃 노란 꽃을 피워 아름다운 고향의 풍경이 되게, 겨레 마음의 빛깔이 되게 하였으리라 … 어린이가 된 마음은 이와 같이 보는 것이 모두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  (80, 119, 124, 125∼126, 172쪽)


  이불을 텁니다. 날마다, 또는 이틀이나 사흘마다 이불을 텁니다. 이불을 털고는 해바라기 시킵니다. 빨래를 합니다. 날마다 빨래를 합니다. 기계한테 빨래를 맡길 수 있으나, 두 손으로 척척 기운차게 비벼 빨래를 합니다. 손으로 빨래를 비비고 헹구노라면, 마음속으로 고운 노래가 흐릅니다. 우리 아이들이 오늘 하루 얼마나 씩씩하게 놀며 옷을 이렇게 더럽히며 땀을 잔뜩 묻혔는가 하고 되새깁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옷 새로 빨고 말려 정갈하게 개면, 또 즐겁게 갈아입으면서 옷이 더러워지도록 뒹굴며 놀 테고 온통 땀투성이를 이룰 테지요.


  아이들 자라는 결을 손빨래 하면서 느낍니다. 이제 이 옷은 큰아이한테 작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이 옷은 작은아이한테까지 작네 하고 깨닫습니다. 큰아이는 이웃한테서 물려입은 옷을 많이 입었고, 작은아이는 이웃과 큰아이를 거쳐 물려받는 옷을 많이 입습니다. 작은아이까지 입는 옷은 많이 해지거나 닳습니다. 옷 한 벌이 여러 아이 거치면서 오래도록 애썼구나 하고 느낍니다. 옷아, 너 조금 더 아이들한테 보송보송한 기운 나누어 주렴, 그러고는 푹 쉬려무나.


  빨래를 하는 삶을 혼자서 흥얼흥얼 노래합니다. 빨래를 하면서 노래를 하고, 빨래를 널며 노래를 합니다. 빨래를 개며 노래를 하고, 새 옷 입히며 노래를 합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을 다닐 적에도 노래를 해요. 언덕길에서 땀 비질비질 쏟는 동안에도 노래를 합니다. 숨을 고르며 노래를 합니다. 기쁘게 바람을 쐬고, 기쁘게 땀을 흘립니다. 나락 익는 깨고소한 냄새 나지, 아이들아? 나락 벤 들판에는 또 나락을 베고 남은 살풋한 냄새 나지, 아이들아?


  후박나무 밑에 서 보자. 후박나무가 우리한테 말을 건단다. 동백나무 잎사귀를 쓰다듬어 보자. 동백나무가 우리한테 이야기를 건단다. 귀를 기울이자. 마음을 기울이자. 생각을 기울이자. 사랑을 기울이자. 우리가 귀와 마음과 생각과 사랑을 기울이면, 풀과 꽃과 나무는 한껏 웃으면서 푸른 숨결을 베풀어 주지.


.. 문학 작품이 아무리 개인의 창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 말을 잘못되게 할 때에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비판해서 바로잡아야 한다. 오늘날에는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방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에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서 멀어져 다만 책 속에, 글 속에 빠져 있다. 그래서 그들이 쓰는 글은 병들고,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말도 따라서 병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 ‘오랫동안의 관찰 끝에 발견한 진리’라고 하는 말은 도무지 맞지 않다.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놀거나 일하면서 저절로 보게 되고 의문을 가지게 되고 행동하게 되고 알게 되는 사실이다 … 한 가지 동요가 어느 지방에도 공통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까닭은, 같은 자연이고 같은 아이들이지만 지방마다 그 자연과 사람의 삶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 정말 여름날 소나기는 하늘이 내려주는 축복이요, 무지개는 자연 속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안겨 주는 선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  (86, 97, 111, 162쪽)


  권태응 님 싯노래를 읽습니다. 책으로도 읽고 노래로도 읽습니다. 싯말 한 자락에 서린 이야기를 가만히 읽습니다. 오늘 내 삶에 비추어서도 읽고, 지난날 권태응 님이 살던 나날을 돌이키면서도 읽습니다.


  권태응 님이 살던 지난날에는 아이들이 어떤 곳에서 어떤 보금자리를 누리면서 하루를 누렸을까요. 권태응 님이 가고 없는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어떤 곳에서 어떤 살림살이를 누리면서 하루를 누릴까요.


  송전탑은커녕 전봇대조차 드물던 지난날입니다. 전봇대뿐 아니라 갖가지 전깃줄과 전홧줄에다가 우람한 송전탑마저 논 한복판과 숲 한복판에 떡하니 들어서는 오늘날입니다. 큰길 하나 겨우 있던 지난날인데, 요즈음은 고속도로가 마을 한복판을 꿰뚫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자동차 얻어 타며 노래를 부를 수 있던 지난날이라면, 요사이는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며 ‘이웃마을에 누가 사는지’를 생각조차 않습니다.


.. 자연을 잃은 아이들은 방안에만 갇혀 겨울을 보낸다. 자연이 없는 방안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 아이들은 달력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을 보면 어느 철인가 저절로 안다 … 풀밭에 가면 풀을 가지고, 모래밭에 가면 모래 위에서, 돌밭에 가면 온갖 돌을 찾아 재미있게 놀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냇물에 들어가면 고기와 같이 놀고, 산에 가면 온갖 열매를 따 먹고 새소리를 들으면서 논다. 자연은 이와 같이 어디를 가도 즐거운 놀이터로 되어 있다. 자연보다 더 좋은 동무, 자연보다 더 훌륭한 학교가 어디 있는가? 자연보다 더 정다운 품이 어디 있는가? 그 자연을 다 빼앗기고, 자연을 다 잃어버리고, 방안에 갇혀 잘못된 글만 읽고 쓰는 비참한 공부로 병들어 가는 요즘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동요다 … 농민의 삶이란 것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이뤄지는 것이고, 나라 사랑이란 것이 이 땅의 산천을 사랑하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제쳐 두고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134, 136, 159, 178쪽)


  문학비평을 하는 사람들은 문학이론을 씁니다. 문학이론에 맞추어 문학을 파헤치고, 문학사조에 따라 문학을 갈래짓습니다. 이오덕 님이 쓴 책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소년한길,2001)는 틀림없이 ‘문학비평’입니다. 문학비평 가운데에서 ‘어린이문학비평’입니다.


  그런데, 이오덕 님은 문학이론이나 문학사조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직 문학으로 남은 작품만 살피면서 문학비평을 합니다. 아니,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라는 책은 문학비평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문학을 이야기합니다. 문학을 노래해요. 문학을 말하고, 문학을 밝힙니다.


  비평하려는 글이 아니라, 노래하려는 글입니다. 평론을 하거나 이론과 사조에 맞추어 자르거나 꿰거나 따지는 글이 아닙니다. 삶을 이야기하고 꿈을 노래하려는 글입니다. 아이들 삶을 밝히면서 아이들 삶을 빛내고 싶어 동요를 쓴 권태응 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예나 이제나 아름다우며 즐겁게 살아갈 아이들 꿈과 빛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하고 길을 살피려 하는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입니다.


.. 곡식 한 알도 소중히 여긴 것은 그 곡식알이 돈이 되기 때문이 아니고 목숨을 가졌기 때문이다 … 돈벌이를 목표로 소를 기르거나 닭을 치거나 개를 먹이는 일이 사람을 얼마나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가, 식구들이 먹을 곡식을 가꾸면서 살던 그 옛날 농사꾼들이 소를 비롯한 그밖의 집짐승을 기르는 것과는 얼마나 다른 일로 되어 있는가 … 장님·귀머거리·벙어리, 이것이 깨끗한 우리 말이다. 요즘은 이런 우리 말을 하게 되면 이런 사람을 멸시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청각장애인·장애인, 이와 같은 어려운 한자말이 아니면 적어도 맹인·농아인 정도라도 한자말을 써야 한다. 우리 말, 우리 것이 천대받고, 우리 말 우리 것을 천대하면서 남의 말, 남의 글, 남의 것을 높이 받드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이런 데서도 잘 나타난다. 어려운 말로 말한다고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되겠는가? 오히려 더욱더 따돌리고 멸시하는 심리가 그 어려운 말 속에서 굳어질 것이다 … 한문 글자로 된 말이면 ‘수확한다’고만 하면 되지만, 우리 말로 한다면 벼나 보리나 수수는 베고, 콩은 꺾고, 깨는 찌고, 목화는 따고, 율무는 떨고, 고구마는 캐고, 대추는 줍고, 밤은 까고, 무 배추는 뽑고, 감자는 후비기도 하고, 이렇게 우리 말은 눈물이 날 만큼 재미있고 넉넉하다 ..  (208, 218, 364, 365쪽)


  노래를 들어요. 우리 가을노래 함께 들어요. 겨울노래도 봄노래도 여름노래도, 서로서로 손을 마주잡고 들어요. 노래를 불러요. 우리 가을노래 같이 불러요. 겨울노래도 봄노래도 여름노래도, 다 같이 어깨를 겯고 불러요.


  비를 마셔요. 비오는 날 우산을 끄고 비를 마셔요. 비오는 날 머리를 하늘로 들어올리고는 비를 마셔요. 입으로, 혀로, 눈으로, 코로, 입술로, 눈썹으로, 이마로, 귓바퀴로, 턱으로, 온몸으로 비를 마셔요. 빗방울이 내 살갗으로 어떻게 스며드는지 천천히 헤아려요.


  햇볕을 쬐어요. 쨍쨍 후끈후끈 땡볕 내리쬐는 날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햇볕을 쬐어요. 온몸 구석구석 감겨드는 볕살이 내 살갗을 어떻게 간질이는지 찬찬히 느껴요.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요. 풀벌레가 노래하면 발걸음 멈추고 노래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요. 제비가 날거나 참새가 날거나 아무튼 어느 새가 되든 날아가 지나가면 그쪽을 바라봐요. 구름이 흐르면 구름이 어디로 가는지 오래도록 지켜봐요.


  노래는 우리 삶 모든 곳에 있어요. 노래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요. 노래는 우리 둘레에 늘 맴돌아요. 노래는 바로 내 가슴속에서 태어나요.


.. 일본말은 이렇게 이름씨를 여러 개 늘어놓고 그것을 ‘の’로 이어서 말(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시 문장(하이쿠)이다. 말을 가장 바르고 깨끗하게 다듬어 써야 하는 시에서 이러하니 일본말에서 이 ‘の’를 얼마나 많이 쓰고 있는가를 짐작할 만하다 … 새로운 형태의 시를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글을 쓰는 이들이 우리 말을 바로 알고 우리 말을 살려쓰는 피나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서 저절로 어떤 형식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글은 산문이고 시고 여전히 남의 글자 남의 말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쓰면서 시의 운율만을 새롭게 지어낸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고,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한갓 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이다 … 문제는, 들어온 것을 어느 정도로 우리가 주체성을 가지고 그것을 잘 삭혀서 우리 것으로 삼는가, 남의 것을 참고하여 얼마만큼 우리 것을 더 넉넉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발전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데 있다 … 말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우리가 우리 말을 살리고 싶어하는 정신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겠다 … ‘넝큼’과 ‘냉큼’은 다르다. 더구나 등으로 짐을 질 때는 ‘뭣이든지 냉큼’ 진다는 것은 아무리 등심 좋은 사람도 결코 있을 수 없다. 등짐을 지거나 지게질을 해 보지 않은 사람만이 ‘뭣이든지 냉큼’ 진다고 할 것이다..  (256, 258, 259, 281, 371쪽)


  이오덕 님은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라는 책을 빌어, 시가 문학이 노래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는가 하고 밝힙니다. 이 작은 책을 발판으로, 시와 문학과 노래를 어디에서 어떻게 즐기는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할까요. 시는 시답게 써야지요. 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노래는 노래답게 불러야지요. 시다운 시를 생각하고, 노래다운 노래를 살필 노릇입니다. 삶다운 삶을 가꾸고, 사랑다운 사랑을 살찌울 노릇입니다.


  곧, 스스로 삶다운 삶을 가꾸면, 저절로 시다운 시가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사랑다운 사랑을 살찌우면, 시나브로 노래다운 노래가 태어나요.


  시를 쓰려고 애쓸 까닭이 없어요. 삶을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누리도록 힘을 쏟고 마음을 들이면 돼요. 노래를 부르려고 용쓸 까닭이 없어요. 사랑을 맑고 밝게 빛내도록 기운을 쏟고 마음을 들이면 돼요.


  삶이 없이는 시가 태어나지 못해요. 삶이 없이는 시를 쓰지 못해요. 사랑이 없이는 노래가 태어나지 못해요. 사랑이 없이는 노래를 부르지 못해요.


  권태응 님이 일군 싯노래란, 삶과 사랑을 바탕으로 지어서 부른 싯노래입니다. 권태응 님이 아이들한테 들려준 싯노래란, 아이들 스스로 삶과 사랑을 즐겁고 아름답게 빛낼 수 있기를 바라는 꿈입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삶을 힘차게 가꾸려는 사람입니다. 문학을 읽는 사람은 삶을 한창 가꾸는 사람입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문학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사람이 아닌, 이웃이랑 동무랑 즐겁게 삶을 나누고 싶은 사람입니다. 문학을 읽는 사람은 이름난 작품을 읽는 사람이 아닌, 이웃과 동무하고 즐겁게 나누는 삶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 시골 농사꾼은 이와 같이 말에 대한 감각이 아주 깨끗하고 날카롭다. 조금이라도 혼란을 일으키는 말은 안 한다. 그런데 서울 양반들은 말에 대한 감각이 무디다. 일은 안 하고 책만 들여다보는 양반들은 그 머릿속에 꽉 박혀 있는 한문 글자 때문에, 그 한문 글자를 억지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만 우리 말에 대한 감각이 마비가 되었다. 이런 서울 양반들의 말을 우리 말의 표준으로 삼았으니 우리 말이 어수선할밖에 없다 … 표준말이라 하여 꼭 한 가지 말만 써야 할까? 그것은 우리 말을 죽이는 짓 아닌가? 왜 우리 말은 표준말의 굴레를 씌워 수많은 말을 다 죽이고, 한문 글자로 된 말은 똑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인데도 아무 제한도 없이 이것저것, 그것도 온갖 어려운 말, 괴상한 말을 제멋대로 쓰도록 해 놓았는가 … 하늘은 파랗다고 했고, 목화밭은 푸르다고 하여, ‘파랗다’와 ‘푸르다’를 올바르게 썼다. 아름다운 자연을 우리 말로 나타내면 이와 같이 저절로 깨끗하고 바른 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  (292, 295, 349쪽)


  시골에 빛이 있어요. 왜냐하면, 시골에는 햇빛이 드리울 숲이 있거든요. 시골에 꽃이 피어요. 왜냐하면, 시골에는 풀과 나무가 뿌리를 내릴 흙이, 숲이, 들이 있거든요.


  도시에는 아직 빛이 없고 꽃이 피지 않아요. 왜냐하면, 도시에는 풀도 나무도 뿌리를 내릴 흙이, 숲이, 들이 아직 없어요.


  그러나, 요즈음 시골도 흙이 자꾸 줄어요. 요즈음 시골에서도 흙이며 숲이며 들이며 자꾸 사라지고, 시멘트도랑과 시멘트논둑이 생겨요. 시골 흙고샅은 모두 시멘트고샅이 되었어요. 거꾸로, 요즈음 도시에는 조그맣게나마 텃밭이 늘고 공원도 생기지요. 안타깝다면, 텃밭이나 공원이 늘어나는 빠르기보다 새로운 아파트마을 늘어나는 빠르기가 훨씬 빠릅니다만.


  빛을 찾으며 시를 읽어요. 꽃을 피우며 시를 써요. 빛을 사랑하며 시를 읽어요. 꽃을 노래하며 시를 써요. 빛과 꽃은 하나이고, 시와 노래는 한몸입니다. 4346.10.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이오덕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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