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속의 내 정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247
박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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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갈바람
[시를 말하는 시 36] 박라연, 《공중 속의 내 정원》

 


- 책이름 : 공중 속의 내 정원
박라연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0.9.18. 5000원

 


  서울에서도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서울하늘은 뿌옇더라도 별은 지구 바깥에서 맑게 빛나요. 제아무리 서울 밤거리에 등불이 환하더라도 별은 지구 둘레에서 밝게 빛나요.
  손바닥을 들어 등불 빛살이 내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가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셔요. 1분 10분 한참 올려다보셔요. 그러면 시나브로 초롱초롱 빛나는 별을 하나둘 만날 수 있어요. 마음속으로 ‘별을 만나야지’ 하고 생각하셔요. 바라보고 생각하고 믿고 사랑하면, 별빛은 사뿐사뿐 나한테 다가옵니다.


.. 스물네 시간 중 단 십 분만 행복해도 / 달디달아지는 / 통통해지는 / 참 가벼운 몸무게의 일상 속에서만 ..  (공중 속의 내 정원 1)


  오늘날 사람들은 서로서로 마음읽기를 잘 안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제 마음이 어떠한가 하고 들여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웃과 동무가 어떤 마음인지 못 읽을 뿐 아니라, 스스로 제 마음부터 못 읽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웃한 사람들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사람은 풀이 어떤 마음이고 나무가 어떤 마음인지 못 읽습니다. 내 마음이 어떤 빛인가 하고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냇물과 빗물과 숲과 들과 뻘이 어떤 마음빛인지 못 느낍니다.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삶을 읽는 넋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풀벌레 마음도 개구리 마음도 숲짐승 마음도 읽을 수 없어요. 풀벌레나 개구리나 숲짐승하고 어깨동무를 못하고 맙니다.


  이제 오늘날 사람들은 도룡뇽을 이웃으로든 동무로든 여기지 않아, 기찻길 놓느라 숲을 밀고 멧자락에 구멍을 냅니다. 이제 오늘날 사람들은 제비를 이웃으로나 동무로나 여기지 않아, 아파트를 끝없이 세우고 공장이랑 골프장을 거침없이 새로 짓습니다. 이제 오늘날 사람들은 메뚜기도 사마귀도 귀뚜라미도 이웃이거나 동무이거나 여기지 않아, 풀밭 밀어 주차장 삼고 논둑과 밭둑을 시멘트로 뒤덮습니다.


.. 부처는 여자였다! 라고 느티나무는 / 깜깜한 눈빛으로 / 깜깜한 목소리로 가지들을 흔들어본다 / 가지들이 제 무릎을 꺾어 / 새 알 까는 소리 / 어린 새 깃 치는 소리 뿜어올릴 때 / 갑자기 눕고 싶어진다 ..  (느티나무)


  갈바람 부는 시월로 접어듭니다. 시골마을은 나락을 베어 길바닥에 말리느라 부산합니다. 옛날 같으면 볏집도 알뜰히 썼으니 볏짚과 나락을 나란히 말렸을 테지만, 오늘날에는 볏짚으로 짚신 삼지 않고 새끼줄 꼬지 않으니, 볏짚은 돌돌 묶어 소 키우는 곳에 팝니다. 나락만 길바닥에 부어 슬슬 뒤집으면서 말립니다.


  나락은 여름 내내 햇볕을 먹으면서 자랐습니다. 여름 내내 햇볕 알뜰히 먹고 자란 나락은 가을에도 다시 햇볕을 먹으며 야무지게 마릅니다. 나락 한 톨에는 햇볕이 얼마나 깊이 스몄을까요. 나락 한 톨에는 햇볕과 함께 바람이 얼마나 넓게 깃들었을까요. 나락이 작은 볍씨에서 이렇게 수북한 열매로 익기까지 얼마나 많은 풀노래와 바람노래를 들었을까요.


  겨를 벗긴 쌀알을 사들여 먹을 사람들은 영양소도 먹겠지만, 시골마을 내리쬔 햇볕을 함께 먹습니다. 시골마을 감돌던 바람을 함께 먹습니다. 시골마을 촉촉히 적신 빗물을 함께 먹습니다. 시골마을 흐르던 농약도 함께 먹고, 시골마을 찾아든 제비 날갯짓도 함께 먹습니다. 아이들 거의 모두 사라진 조용한 시골마을 모습을 함께 먹습니다. 늙은 할매와 할배가 허리 구부러지며 흙을 보듬던 손길을 함께 먹습니다.


  나락 한 톨에는 온누리가 담깁니다. 나락 한 톨에는 해와 비와 바람과 흙이 담길 뿐 아니라, 짙은 사랑이 담기고, 짓꿎은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가 담깁니다. 사람들 살아가는 모양새가 고스란히 나락 한 톨에 담깁니다.


  똥오줌은 어디로 갈까요. 시골사람 똥오줌만으로는 유기농을 할 수 없습니다. 도시사람 똥오줌은 어디로 갈까요. 물로 쏴아 내리며 버리는 똥오줌은 어떻게 될까요. 흙으로 돌아가서 나락을 살찌우는 거름이 될까요. 바다로 버려 바닷물 더럽히는 쓰레기가 될까요.


.. 왜 빨려드는 것일까 동류항? / 괜스레 얼굴 밑의 사연들을 읽는다 / 등에는 장미 새 사슴 토끼의 문신이? / 그가 살아온 세월을 잊고 싶어서 / 살아갈 세상은 / 장미, 새, 사슴, 토끼이기를 바라면서 / 제 뒷모습은 그러했으면, 하면서 / 피 흘렸을 순간이 떠오른다 ..  (동류항)


  시월에 시월바람 붑니다. 구월에 구월바람 불었고, 팔월에 팔월바람 불었습니다.


  새벽에 새벽바람 붑니다. 아침에 아침바람 불고, 낮에 낮바람 불며, 저녁에 저녁바람 불어요.


  날마다 달마다 철마다 해마다 바람이 다릅니다. 언제나 새삼스러운 바람입니다. 늘 새로운 바람입니다.


  다 다른 바람을 다 다른 마을에서 다 다른 빛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밤하늘 가득 채우는 별이 다 다른 빛이요 다 다른 숨결인 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경기도 흐르는 냇물과 전라도 흐르는 냇물과 경상도 흐르는 냇물은 다 다릅니다. 구비가 다르고 숲이 다르며 멧자락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이 다 다른 냇물을 다 똑같은 시멘트무덤으로 만드는 삽질이 이루어졌습니다.


  죽음수렁이 되었던 시화못에 다시 바닷물 끌어들이니 천천히 살아난다고 하지요. 너른 바다는 죽음수렁 시화못을 살포시 어루만지면서 다시금 푸른 숨결 싱그러운 삶터가 되도록 돕습니다. 그러니까, 바다를 막는다는 둑(방조제)은 바다도 못도 뭍도 모두 망가뜨리면서 더럽힙니다. 바다를 막지 않아야 하고, 냇물 흐름을 거스르지 말아야 합니다. 숲을 끊거나 토막내지 말아야 합니다. 나무를 함부로 자르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풀을 마구 베거나 풀밭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야지요. 먼먼 옛날부터 모든 풀마다 이름을 다 따로 붙인 까닭을 생각해야지요. 왜 ‘이름 없는 풀’이란 없을까 하고 생각해야지요. 그리고, 오늘 우리들은 왜 ‘풀이름’을 제대로 듣지도 배우지도 못하고 알지도 가르치지도 못하는지 생각해야지요. 왜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풀을 안 가르칠까요. 왜 아이 낳아 돌보는 어버이들은 스스로 풀을 안 배우고 안 가르칠까요. 왜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서는 풀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말하지 못할까요.


  풀밥 즐기는 사람도 풀을 먹지만, 고기밥 즐기는 사람도 풀을 먹어요. 왜냐하면, 소도 돼지도 닭도 먼먼 옛날부터 풀을 먹었고, 풀에 깃든 벌레를 먹었어요. 풀을 먹는 고기를 먹으니, 고기를 즐긴다 하더라도 으레 풀을 함께 먹은 셈입니다. 나락을 먹을 적에 나락이 여름 내내 먹은 햇볕을 함께 먹듯, 지구별 모든 사람은 언제나 ‘풀을 먹으며 누리는 삶’인 만큼, 풀을 잘 알아야 하고, 풀을 똑똑히 깨우쳐야 하며, 풀을 슬기롭게 다룰 수 있어야 해요.


.. 고흥 반도에서 서울까지 실려온 꼬막이 / 제 살아 있음을 알리기 위해 / 두꺼운 껍질을 열고 / 핏빛 내장을 모두 보여줄 때의 전율 ..  (殘日)


  박라연 님 시집 《공중 속의 내 정원》(문학과지성사,2000)을 읽으며 갈바람을 쐽니다. 아침저녁으로 다른 갈바람을 쐽니다. 해가 똑 떨어지기 앞서 축축하며 쌀쌀한 기운 묻어나는 갈바람을 쐽니다. 해가 둥실 솟아 쨍쨍 내리쬐는 낮에는 따사로운 햇내음 나는 갈바람을 쐽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갈바람을 쐽니다. 풀밭에 서서 풀노래를 듣고 갈바람을 쐽니다. 후박나무 그늘에서 새 후박잎 짙푸른 빛을 헤아리고, 헌 후박잎 떨어져 도르르 구르는 빛을 들여다봅니다. 우리 집 대문으로 타고 오르는 호박넝쿨 푸른 줄기와 잎사귀를 바라봅니다. 가을볕과 가을바람 듬뿍 먹는 호박알 굵고 단단하게 맺습니다.


  나락도 풀도 열매도 사람도 벌레도 살찌우는 가을입니다. 모든 목숨 몸을 살찌우면서 마음을 살찌우는 가을입니다. 몸과 마음을 살찌우니 가을하늘 높다 하겠지요. 몸이며 마음을 두루 살찌우니 가을빛 그윽하다 하겠지요.


.. 바라만 보아도 뜨거워야 할 / 원불교의 천주교의 문패만 초라할 뿐 / 못 박힌 예수의 초상만 외로울 뿐 / 등꽃마저도 보라를 못 보여주다 팔도 ..  (질량 보존의 법칙 6)


  풀벌레가 노래하는 곳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만한 곳입니다. 바람내음 고소하고 햇살 눈부신 곳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랑할 만한 곳입니다. 제비와 멧새가 날고 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이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할 만한 곳입니다. 냇물이 싱그럽고 하늘빛이 티없는 곳이 사람이 사람답게 어깨동무할 만한 곳입니다.


  도시에 살아야 하거나 시골에 살아야 하거나 하지 않아요. 사람답게 살아갈 만한 곳에서 살아갈 때에 사람입니다. 사람다움을 건사하면서 사람다움을 빛낼 만한 곳에서 살아갈 적에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졸업장을 따거나 자격증을 거머쥐거나 면허증이나 허가증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야 한다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사랑·꿈·삶을 실컷 누리면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을 배울 아이들이 아니라, 사랑을 배울 아이들입니다. 대학입시를 치를 아이들이 아니라, 꿈을 펼칠 아이들입니다. 일삯 잘 주는 일자리를 찾아 회사원이 될 아이들이 아니라, 삶을 일구는 빛을 밝힐 아이들입니다.


  시는 무엇일까요. 천천히 살며시 하늘길 걷는 시는 무엇일까요. 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시를 쓰고 어떤 시를 읽는가요. 시는 어떤 노래가 되어 우리 삶으로 스며드는가요. 우리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며 아름답게 노래하며 시를 읊을 만큼 마음밭이 넉넉하거나 너그러운가요. 시가 없이 노래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로 구르는 하루를 이냥저냥 흘려보내지는 않는가요. 4346.10.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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