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볼 41 - 무삭제 오리지널판
토리야마 아키라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67

 


왜 싸우는가
― 드래곤볼 41
 토리야마 아키라 글·그림
 서울문화사 펴냄, 2002.8.25.

 


  ‘싸워야지’ 하고 생각하기에 싸웁니다. ‘전쟁을 일으켜야지’ 하고 생각하니까 전쟁이 터집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돈에 미쳤다고 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 떼어놓고 살필 적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돈에 얽매인’ 채 살아가니, 돈에 미친 사회가 됩니다.


  돈에 미친 한국 사회가 되는 까닭은,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돈에 얽매이는 삶에 길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오직 시험공부에 대학입시에 등을 떠밀립니다. 이 나라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지을 줄 모릅니다. 돈이 없이 살아가는 길을 배우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찾지 못해요. 이 나라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야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길듭니다.


  삶이 없는 자리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삶이 없는 자리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랑이나 이야기가 없는 자리에는 꿈이 없고, 빛이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을 바라볼 적에 이야기도 꿈도 사랑도 들여다보기 힘들다면, 바로 요즈음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돈에 얽매이도록’ 길들인 탓입니다. 어른들부터 스스로 돈에 얽매이도록 길들면서 바보스럽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 ‘할 수 없군. 드래곤볼로 반드시 되살려 주겠다. 남아 있는 인간들아,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시간 좀 벌어 줘야겠다.’ (24쪽)
- “지구인을 모두 죽였다. 자, 빨리 싸우자. 싸울 놈을 내놔.” (31쪽)
- “참아, 오천! 모든 걸 헛수고로 만들 셈이냐! 너랑 트랭크스가 마인 부우를 해치우기만 하면 엄마는 드래곤볼로 되살릴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실력으론 아직 무리야! 그러니 수행해라! 남아 있는 짧은 시간 안에 필사적으로 수행을 하는 거야!” (41쪽)

 


  싸워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살아갈 뿐입니다. 풀은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나무도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풀과 나무를 이웃으로 두며 살아가면 아주 환하게 알 수 있어요. 넝쿨이 나무를 타고 오르더라도 나무를 잡아먹을 뜻이 아닙니다. 넝쿨풀 스스로 살아가려고 뻗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넝쿨풀이 나무를 감싸올라 나무가 말라죽으면, 넝쿨풀도 더 살아갈 수 없어요. 어리석은 넝쿨풀 있어 나무를 온통 휘감아 말려죽이면, 넝쿨풀도 머잖아 숨을 잃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풀이 한 자리에서 끝없이 피고 집니다. 수십 수백 가지 풀은 한 뿌리로 얽혀 저마다 다 다른 때에 태어납니다. 같은 때에 태어나서 같은 줄기를 올려도 다른 풀은 서로 나란히 돋아 나란히 자라고 나란히 풀꽃을 피웁니다.


  싸우는 풀이 아니라, 어깨동무를 하는 풀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풀도 나무도, 새도 벌레도, 여기에 사람도, 어떤 목숨이건 싸워서는 살아가지 못해요. 싸우는 목숨은 스스로 죽으려는 목숨입니다. 어깨동무하는 목숨일 때에 살아가는 목숨이고, 어깨동무를 할 때라야 비로소 싱그러운 숨결이 됩니다.


  따순 손길 내밀어 보셔요. 따순 눈길이 돌아옵니다. 따순 눈길로 바라보셔요. 따순 손길이 다가옵니다. 우리 겨레 오랜 옛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를 떠올려요. 고운 마음이 흐르고 흐를 때에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 “아직 멀었나요? 이젠 슬슬 끝날 때도 된 것 같은데!” “뭐? 벌써 그렇게 됐나? 흐음. 아직 끝나지 않았단 얘기는, 너의 잠재능력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단 얘기지.” (36쪽)
- “빨리 앉아. 쓸데없이 떠들고 있다간 그만큼 또 시간만 잡아먹는다구.” “정말, 죄송합니다.” (38쪽)

 


  토리야마 아키라 님 만화책 《드래곤볼》(서울문화사,2002) 마흔첫째 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만화책 《드래곤볼》을 겉으로 살피면 온통 싸움이고 전쟁이고 죽음이고 멸망이고 하는 이야기만 흐르는 듯합니다. 만화책 《드래곤볼》을 이끄는 ‘손오공’은 언제나 싸움만 아는 바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참말 손오공이란 아이는 싸움 아니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 ‘싸움’이지, 손오공한테는 싸움이 싸움이 아닙니다. 손오공은 먼저 다른 사람한테 주먹질을 하는 법이 없어요. 손오공은 늘 스스로 갈고닦습니다. 손오공은 언제나 몸과 마음을 가장 뛰어난 빛이 서리도록 다스립니다.


  가장 힘센 사람이 되려는 손오공은 아닙니다. 가장 힘센 사람 되어 지구를 정복하겠다든지 우주를 정복하겠다는 뜻을 품지 않습니다. 손오공은 ‘대련·수련’을 하면서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빛을 보고 싶습니다. 더 세고 튼튼한 누군가를 맞나 솜씨를 견주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더 튼튼하고 다부지게 갈고닦겠다는 꿈을 키웁니다.


- “마인 부우는 우리 아빠를 아는 것 같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시나요? 이유가 뭐죠?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간단한 거야. 미스터 사탄은 마인 부우가 마음을 연 단 한 명의 인간이었다. 우리가 힘으로 어떻게든 해 보려 할 때 미스터 사탄은, 동기야 어떻든 마인 부우와 친구가 되는 길을 선택했어.” (43쪽)
- “키비토 씨, 부탁이 있는데 이 옷을 갈아입을 수 있나요? 아버지와 똑같은 옷으로 부탁합니다. 꼭 아버지의 도복을 입고 싸우고 싶은데.” (151쪽)

 

 


  만화책에 나오는 손오공은 ‘스스로 아름답게 살리는 길’을 걸어가고 싶어서 언제나 무술 훈련을 합니다. 이 무술 훈련은 스스로 아름답게 살리는 길에서만 선보이지, 다른 자리에서는 조금도 힘을 안 씁니다. 다만, 손오공은 여느 사람들 마을하고 아주 멀리 떨어진 깊은 숲속에서 식구들끼리 조용히 살아요. 손오공네 식구는 ‘엄청난 물질문명 판치는 미래사회’이지만, 땔감을 장만해서 나무를 때어 밥을 짓고 물을 덥힙니다. 다른 동무들은 모두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손오공은 시골에서, 게다가 깊디깊은 두멧자락에서 살아요. 고기를 먹고 싶으면 숲속에서 가끔 사냥을 하는데, 따로 사냥을 한다기보다는 숲속에서 홀로 무술 훈련을 하다가 나무가 쓰러지거나 바위가 깨질 적에 곁에서 깔려죽은 큰 짐승이 있으면 고기를 먹습니다. 작은 짐승이 다치면 먹지 않고 다친 데를 보살펴서 놓아 주어요. 채식도 육식도 아닌, 삶자리 둘레에서 얻는 밥을 즐겁게 손수 지어서 먹습니다.


- “아니, 함께 데려가 주자. 행동은 저래도 사실 속은 착한 사람이야. 저 녀석은 자기 나름대로 지구를 구하려고 했거든.” (177쪽)
- “대계왕신님의 생명을 하필 인간 따위에게 주다니! 무슨 그런 말씀을!” “안 그러면 우주는 전부 끝장나 버린다. 마인 부우는 분명 여기도 쳐들어올 거야.” “윽.” “그, 그럼 대신 제 목숨을! 저도 그 정도는 도움이 되고 싶어요!” “무리하지 마. 넌 아직 젊다. 어차피 앞으로 난 이제 1000년 정도밖에 못 사는 노인네야.” (206쪽)

 


  무엇을 먹는가에 따라 삶이 바뀝니다.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삶이 바뀝니다. 무엇을 누구하고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삶이 바뀝니다.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서도 삶이 바뀝니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서도 삶이 바뀝니다. 공장 노동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공장 노동자이기도 하면서, 모두 같다고 할 수 없는 공장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똑같은 노동자’라 할 수 있기도 하지만, ‘똑같은 노동자’라 할 수 없기도 합니다. 서로 살리는 일이 아닌 서로 죽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장 노동자라 하더라도, 이녁이 일하는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적에 나오는 쓰레기와 폐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를 살피지 못할 적에도 ‘똑같은 노동자’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삶과 일과 넋을 함께 읽어야 해요. 삶과 넋과 일이 함께 움직여야 해요.


  삶자리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참말 삶이 달라집니다. 시골에서 사느냐 도시에서 사느냐, 시골에서도 어떠한 시골에서 사느냐 도시에서도 어떠한 도시에서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시골에서 살며 흙을 어떻게 건사하거나 돌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져요. 도시에서 살며 흙을 얼마나 생각하거나 살피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져요.


  흙을 아는 삶과 흙을 모르는 삶이 사뭇 다릅니다. 바람과 빗물을 아는 삶과 바람과 빗물을 모르는 삶이 아주 다릅니다. 햇볕과 구름을 아는 삶과 햇볕과 구름을 모르는 삶이 매우 다릅니다. 냇물과 샘물을 아는 삶과 냇물과 샘물을 모르는 삶이 무척 다릅니다.


- “크, 큰일났네. 계속 오반과 합체한 상태라니. 하, 하지만 어쩔 수 없군. 방법이 이 수밖에 없으니. 혹시 평화를 되찾으면 오반이 다니던 학교에도 다녀야 하나?” “지금 잡담할 시간 없어! 빨리 안 가면 오반이 죽는다구!” “아! 그, 그렇지! 그럼, 다녀옵니다! 여러 가지로 너무 고마워!” (220∼221쪽)


  “왜 싸우는가?”는 “왜 사는가?”로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왜 사는가?”는 “왜 사랑하는가?”와 “왜 꿈꾸는가?”로 고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 생각하는가?”와 “왜 노래하는가?”로 돌려서 읽을 수 있어요.


  싸움을 생각하면 삶이 싸움으로 흐르고, 사랑을 생각하면 삶이 사랑으로 흐릅니다. 아름다운 빛을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빛 누리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따순 눈길과 손길로 어깨동무하는 빛을 생각하는 사람은 노상 따순 눈길과 손길로 어깨동무하는 빛이 흐르는 삶을 누려요. 4346.9.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만화책 즐겨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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