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11월 1
김진 지음 / 허브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66

 


이 가을에 무슨 생각을
― 밀라노…11월 1
 김진 글·그림
 허브 펴냄, 2004.6.26. 6000원

 


  들판이 누렇습니다. 고흥에서는 벌써 벼베기를 마친 논이 있고, 벼베기를 마치자마자 다른 무언가를 심으려고 갈아엎은 데가 있습니다. 일찌감치 유채씨 심으려고 골을 내는 데도 있어요.


  한가위가 되기 앞서 가을걷이가 끝나기도 하지만, 한가위가 지나고 한참 뒤에 비로소 가을걷이를 하기도 합니다. 한가위 보름달 둥그렇게 밟게 올려다보는 올 구월에는 햇볕이 후끈후끈 뜨겁습니다. 칠월과 팔월에도 햇볕은 후끈후끈 달아올랐어요. 날씨가 나날이 달라지는 줄 뻔히 알기는 하지만, 여름철에 이렇게 덥고 비구름은 몇 군데에만 몰아치는 모습을 보면, 우리 삶이 앞으로 이대로 가도 될는지 아리송하곤 합니다.


- “네가 돈치기놀이를 해서 애들 돈을 뺏는다고 목사님께 다 이를 거야!” “그래, 목사님은 남을 속이는 걸 제일 싫어하셔!” “이제 넌 교회에서 받는 구호금도 못 받게 될 거야. 너 같은 거지 아이들은 그렇게 해야 사람이 된다고 울 엄마가 그러셨어!” (6쪽)
- “아메데오, 너희 할머니는 얼마나 네 걱정을 하시는데. 할머닐 생각해 드려야지. 이젠 나이도 드시고. 아메데오, 나쁜 친구들을 자꾸 사귀면 너도 진짜 나쁜 사람이 되는 거야.” (8쪽)


  한가위나 설날에 기차나 버스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고, 자가용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가위나 설날에 고속도로가 막히는 까닭은 자가용이 너무 많이 다니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라는 길이 뚫린 까닭도 자가용이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가 늘고 또 늘어도 끝없이 막히는 까닭이란 바로 자가용이 너무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자가용을 장만한 사람은 길이 막히더라도 자가용을 타려 하지, 버스나 기차를 타려 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쪽이 한결 낫다고 여깁니다. 한가위나 설날 아닌 여느 때에도 길은 으레 막히는데, 길이 뻔히 막히는 줄 알면서, 사람들은 자가용을 놓지 않아요.


  자가용을 달리는 사람은 자동차 움직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 자동차 소리를 듣고, 다른 이 자동차 소리를 듣습니다. 자동차가 시골 들판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더라도, 풀노래를 못 듣습니다. 아니, 풀노래가 흐른다는 생각을 못 합니다. 풀벌레가 노래하고, 들판에 무르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며 내는 나락노래를 못 듣습니다.


  제비는 태평양 건너 저 따뜻한 나라로 갔지만, 참새와 까마귀와 까치를 비롯한 텃새는 시골에 그대로 남습니다. 들판에서 먼 데 있는 찻길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더라도 새들은 깜짝 놀라 푸드득 소리를 냅니다. 멧비둘기도 장끼도 까투리도 모두 화들짝 놀라 푸득푸득 날아갑니다.


  그러나, 자동차에 탄 몸으로는 새가 나는 소리를 못 듣습니다. 새가 나는 줄조차 모르곤 합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오리떼나 기러기떼 날아도 자동차에서는 못 알아채곤 합니다. 나비가 날거나 잠자리가 나는 날갯짓을 자동차에서 느끼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 “어른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어. 난 고아원 같은 곳엔 갈 수 없어! 밀라노로 갈 거야!” “아메데오! 도망치는 건 안 돼!” (25쪽)


  배롱꽃 붉습니다. 배롱꽃은 옅붉습니다. 배롱꽃을 바라보며 ‘연분홍’이나 ‘진분홍’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배롱꽃은 배롱꽃빛입니다.


  아이들과 고흥에서 시외버스로 순천으로 나와, 순천에서 기차를 타고 조치원 거쳐 음성으로 달리면서, 음성에서 다시 안쪽 시골로 차를 달리면서, 길가에서 배롱꽃을 봅니다. 전라도 배롱꽃은 키 큰 나무에서 자라지만, 충청북도 배롱꽃은 키가 작습니다. 그러나, 충청도에서까지 배롱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꽃빛이 곱다고 여기니 찻길 한켠에도 심겠지요. 온 나라에 벚나무를 심어 봄마다 벚꽃잔치를 벌이려 하듯, 늦여름과 첫가을에 배롱꽃잔치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먼길 나들이를 잘 견디어 주는 아이들을 보듬고 달래다가 생각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충청도에서 누리던 아름다운 가을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스라한 옛날부터 오래도록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즐기던 아름다운 가을꽃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이제는 전라도도 경상도도 충청도도 경기도도, 또 서울과 부산과 대구와 인천도, 모두 똑같은 꽃을 누리거나 즐겨야 할까요. 왜 고장마다 다 다른 철과 날씨에 맞게 다 다르게 즐기던 꽃과 나무와 풀과 숲은 모두 사라져야 할까요.


- ‘내가 원하는 내 아저씨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부드럽게 웃고, 반갑게 맞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좀더 원한다면 “야아, 로마에서 만났었던 그 꼬마구나.” 이리 말해 주는.’ (44쪽)
- “애에게 상처입히고 있어. 그 바보가 또 일을 벌이고 있잖아!” (70쪽)


  김진 님 만화책 《밀라노…11월》(허브,2004) 첫째 권을 읽습니다. 로마 뒷골목에서 따돌림이나 푸대접을 받는 아이가 이곳을 떠나 밀라노로 가고 싶어 합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누구인 줄 모르는 채 늙은 할머니하고만 살던 아이는, 할머니가 죽은 뒤 고아원에 보내질 삶인 줄 알아채고는, 할머니가 숨을 거둔 이듬날 짐을 꾸려 이녁 삶터인 로마 뒷골목을 떠나려 합니다.


  동네에서 사랑은 거의 못 받은 채 자라던 아이를 보며 슬퍼 우는 동무는 꼭 하나 있습니다. 아이는 로마 뒷골목을 떠나려 하면서, 이녁 동무한테 자주 편지 하겠다는 말을 남깁니다. 이 아이는 로마를 떠나 밀라노로 가면 새로운 삶 열린다고 생각하겠지요. 이제부터 따돌림도 푸대접도 없이 사랑스러운 나날을 꿈꾸겠지요.


- “마음 깊숙한 곳에서 도망치고 싶어 못 견디는 마음이 자꾸 일어서지?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행여 끝나지 않을까? 넌 너무 약해, 아르트로. 네가 도망쳤기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다. 그들의 목숨값을 어떻게 치를 참이니? 아르트로, 네가 더 크고 강해지길 원해.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네가 강해야 그 애도 살아남는다.” (131쪽)


  이 가을에 뜨거운 볕살 받습니다. 집안에 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흐릅니다. 낮잠에 빠진 작은아이한테는 부채질을 해 주거나 선풍기를 틀어 주어야 합니다. 고흥 시골집에 있었다면 아이한테 부채질을 해 주느라 바빴을 텐데,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온 만큼 선풍기가 곁에서 도와줍니다.


  이 가을에 고향집으로 찾아가는 사람들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까요. 이 가을에 살붙이나 동무를 만나러 먼길 씩씩하게 찾아가는 사람들 마음은 얼마나 즐거울까요.


  두 손에 선물보따리 없어도 됩니다. ‘고향을 찾아가는 몸뚱이’가 바로 선물입니다. 하루를 묵든 이틀을 묵든, 하루조차 못 묵고 저녁에 다시 돌아가야 하든,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말마디를 섞으면서 ‘다 다른 자리에서 눈빛을 밝히며 즐겁게 누릴 삶’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즐겁게 살아가려 할 적에 아름다운 하루입니다. 기쁘게 맞아들이려 할 적에 사랑스러운 하루입니다. 고흥집에 없는 텔레비전이지만, 음성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어, 아이들은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들여다봅니다. 나는 쳇 쳇 투덜거리면서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꾸는 텃밭과 꽃밭 사이를 천천히 거닙니다. 풀내음과 꽃내음을 맡으며 느긋하게 기지개를 켭니다. 4346.9.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만화책 즐겨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