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난 도시농부, 흙을 꿈꾸다 - 정화진 산문집
정화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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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책 읽기 48

 


풀을 먹어야 사람답게 산다
― 풍신난 도시농부 흙을 꿈꾸다
 정화진 글
 삶창 펴냄, 2013.6.21. 11000원

 


  시골에서 살더라도 읍내나 면소재지에 살림집 있으면 싱그러운 푸성귀를 먹기 어렵습니다. 시골 읍내와 면소재지도 도시 한복판과 똑같이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뒤덮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마땅한 얘기인데, 어떤 곡식과 푸성귀도 아스팔트땅이나 시멘트땅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곡식과 푸성귀는 흙땅에서만 자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흙땅에서 자라는 곡식과 푸성귀를 먹습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는다 할 적에도, 이들 돼지와 소는 흙땅에서 난 먹이를 먹어야 튼튼하게 자라요. 흙땅에서 난 먹이 아닌 화학배합사료를 먹여 살점 키운 돼지와 소는 사람이 고기로 먹는다 하더라도 그리 맛나지 않고 몸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흙땅에서 자라는 곡식이나 푸성귀라 하더라도, 비닐을 덮어씌운 데에서 키운 곡식이나 푸성귀라면 싱그럽거나 향긋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바탕은 흙으로 이루어진 땅에 뿌리를 내릴 곡식이면서 푸성귀이면서,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먹을 곡식이자 푸성귀이기 때문입니다.


.. 상추도 마찬가지였다. 겨울 난 상추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뿌리 크기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비록 부추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그간 봐 왔던 여린 상추의 뿌리라 보기엔 하나같이 대물이었다 … 그 나물들을 버무린 무침에 밥과 고추장을 비벼 놓고 마주앉으니 마음이 다 경건해진다. 철마다 식용으로 들과 산에 있는 풀들을 캐 드신 분들은 이미 여든이 다 넘으셨다고, 증산에 매진했던 새마을운동 세대인 60∼70대 분들만 해도 야생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던 강연 내용이 바늘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  (19, 33쪽)


  들판에 비닐을 씌운다고 생각해 보셔요. 논마다 비닐을 씌운다고 생각해 보셔요. 비닐논에서 자라는 나락이 우리 몸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햇볕이 아닌 비닐집 후끈후끈한 기운만 받으며 자라는 나락은 얼마나 맛나거나 향긋할까요.


  비를 맞고 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나락이 싱그럽습니다. 구름 그늘을 누리고 나비와 잠자리와 제비 날갯짓을 받으며 자라는 나락이 싱싱합니다. 무지개와 별과 미리내와 달과 노을 실컷 누린 나락이 향긋합니다.


  그러면, 수박도 참외도 오이도 토마토도 이와 같겠지요. 딸기도 호박도 당근도 무도 배추도 이와 같을 테지요.


  맨땅에서 자란 푸성귀하고 비닐집에서 자란 푸성귀는 맛과 내음과 빛깔이 모두 다릅니다. 햇볕 받으며 개구지게 논 아이들 살결과 햇볕 못 쬐고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하듯 돌아쳐야 하는 아이들 살결은 사뭇 다릅니다. 비와 바람과 구름과 달과 별을 모두 누리면서 일하는 어른들 살갗이랑 사무실이랑 아파트에서 해도 달도 안 보며 일하거나 쉬는 어른들 살갗은 아주 달라요.


  곡식과 푸성귀를 살찌우는 해님이요, 사람을 튼튼하게 북돋우는 달님입니다. 곡식과 푸성귀를 살리는 바람과 비요, 사람을 사랑스럽고 믿음직하게 이끄는 무지개와 미리내입니다.


.. 바로 뒤에 먹어 본 명아주 나물의 맛은 또 다른 경지여서 망초 나물의 맛을 잊게 만들었다. 선배는 아직은 어린 명아주를 뿌리만 잘라내고 줄기째 익혀 초장에 무쳐 내왔다. 명아주를 나물로 먹는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의 맛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었다 … 참이든 쉼이든 평상을 찾을 때마다 일곱 명의 사내들은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이따끔 내려주신 보슬비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물론 한껏 땀 흘리게 해 준 밭에게도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  (64, 157쪽)


  모든 풀은 푸릅니다. ‘푸르다’라는 낱말은 풀 빛깔을 가리키면서 태어났습니다. 푸른 풀이란, 푸른 숨결입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논둑이나 밭둑 풀을 모조리 베거나 풀약 뿌려 죽입니다만, 풀이 있어야 사람들 누구나 ‘풀숨’을 푸르게 쉴 수 있습니다. 풀이 없다면 모두 매캐한 자동차 배기가스와 공장 매연과 발전소 열폐수 바람을 쐬어야 합니다.


  풀이 돋는 땅에 나무가 씨앗을 떨구어 숲을 이룰 수 있습니다. 풀이 돋지 못하는 땅에는 나무도 자라지 못해요. 나무가 우거진 숲을 가꾸자면, 이 땅에는 먼저 풀이 돋아야 합니다. 풀밭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비로소 나무가 씩씩하게 줄기를 죽죽 올릴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나무가 자라는 곳 둘레에는 풀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풀밭에서 나무가 자라듯, 나무 둘레는 풀밭을 이루어 나무뿌리가 흙땅에 튼튼하게 깊게 내릴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곧, 풀과 나무가 어우러지는 곳에서 짙푸른 바람이 불어요. 짙푸른 바람은 지구별이 푸른 빛깔 띠도록 하지요. 지구별이 푸른 빛깔일 적에 지구별 모든 사람은 푸른 숨을 마시면서 맑고 밝은 넋을 건사합니다. 지구별이 푸른 빛깔을 잃어 까만 빛깔이나 잿빛으로 바뀌면, 사람들 마음도 까맣게 바뀌거나 잿빛으로 되고 말아요.


  사랑을 꽃피우자면 풀빛 삶자락 일굴 노릇입니다. 꿈을 이루는 아름다운 삶터 가꾸자면 풀과 나무가 싱그러이 빛나는 마을이 되도록 할 노릇입니다.


.. 내 나이 정도만 살아도 올해 정도의 기후 조건이 적어도 10년에 한 번꼴로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 어떤 경우에서도 이렇게 재앙과 같은 하천 녹조는 발생한 적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한 언론사의 기자가 찾아간 가정집에서는 수돗물에서 악취가 난다고 난린데, 관료는 지극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한다. 정수된 물엔 아무 문제가 없다고 ..  (151쪽)


  도시에서 ‘도시 농부’로 일하는 정화진 님이 이녁 ‘흙짓기’를 적바림해서 엮은 산문책 《풍신난 도시농부 흙을 꿈꾸다》(삶창,2013)를 읽습니다. 정화진 님한테는 이녁 땅이 따로 없습니다. 도시 언저리 빈터를 빌려서 밭자락 가꿉니다. 때로는 논에서 손모를 심습니다. 밭을 일구든 손모를 심든 풀을 베든, 정화진 님을 비롯한 여러 도시 농부는 등허리가 휩니다. 풀약과 비료를 안 쓰면서 흙을 살리려 하니 등허리가 휘어요. 1960년대부터 몰아닥친 새마을운동 때문에 망가진 흙을 되살리려고 힘쓰다 보니, 등허리가 휠밖에 없어요.


  시골마을에서 둘레를 살펴보셔요. 들이나 숲에서 자라는 풀 가운데 ‘약풀’ 아닌 풀이란 없습니다. 모든 풀이 약풀입니다. 〈동의보감〉이건 〈본초강목〉이건 깊디깊은 두멧자락에 몇 포기 없는 풀을 약풀로 여기지 않습니다. 시골마을 여느 살림집 둘레에서 흔하게 피고 지는 풀포기를 약풀로 여깁니다.


  논둑에서 약풀이 자랍니다. 밭둑에서 약풀이 꽃을 피우고 씨앗을 퍼뜨립니다. 시골에 늙은 할매와 할배만 남아 일손이 없으니 논둑이고 밭둑이고 죄 풀약을 뿌려 흙과 풀을 몽땅 죽이는 화학농이 될밖에 없다고들 말합니다만, 흙과 풀을 죽이는 화학농으로는 사람을 살리지 못해요. 한 끼니 배고픔은 달랠 테지만, 배고픔을 달래면서 농약을 함께 마시는 셈이에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도, 도시로 떠난 딸아들도, 또 도시로 떠난 딸아들이 낳은 아이들도 모조리 농약을 함께 마시는 노릇입니다.


  시골마을 자그마한 집에서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날마다 풀을 뜯어 밥상을 차리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설날과 한가위를 맞이해 시골집에 찾아오는 ‘도시로 떠난 딸아들’한테 시골 할매와 할배가 곡식이나 푸성귀나 열매를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도시로 떠난 딸아들이 곡식이나 푸성귀를 받으려면, 시골로 철마다, 또는 달마다 품을 팔러 와야 합니다. 논둑과 밭둑에서 자라는 ‘풀약’을 뜯어서 먹고, 들과 숲에서 자라는 풀을 캐고 솎아서 ‘나물’을 먹어야지 싶어요.


  흙땅에서 땀을 뿌리고, 흙땅에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삭혀 돌려주며, 흙땅에 아이들과 드러눕기도 하고 흙땅을 박차고 뛰놀기도 하면서, 흙바람과 흙내음을 맡아야지 싶습니다.


.. 어른들이 머리를 백날 맞댄들 뾰족한 수가 없던 것은 결국 젊은 노동력의 보충이 끊겨 가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농촌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는 상황이다. 두레의 정신이 아무리 고귀한들 성원이 될 젊은 층의 수혈이 끊긴다면 살아남을 재간도, 존재의 이유도 없는 법 ..  (168쪽)


  풀을 먹어야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풀을 먹어야 짐승들도 짐승답게 살아가요. 햇볕과 빗물과 바람으로 튼튼하게 자라는 풀을 먹어야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햇볕을 머금은 풀을 먹으며 햇볕처럼 따스한 사랑을 나눕니다. 빗물 머금은 풀을 먹으며 빗물처럼 맑은 사랑을 펼칩니다. 바람 머금은 풀을 먹으며 바람처럼 향긋한 사랑을 베풉니다.


.. 광에서 인심 나온다 했던가. 수확이 풍성하니 나눔에도 번민이 적어 좋았다. 회원들 사이의 나눔뿐 아니라 지역 도시농부 공동체에 기부를 할 때에도 저울 바늘에 일일이 민감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밭이나 공동체의 부러움을 살 만했고 우린 그 부러움을 즐기기까지 했다 … 나도 호미를 들고 자리에 없는 두 회원의 파밭을 만든다. 4년간 유기농으로 정성스레 다져진 선유동 농장의 흙에선 호미질마다 산흙의 향긋한 내가 풍긴다 ..  (194, 206쪽)


  ‘유기농’이 좋으니 ‘화학농’이 나쁘니 하고 가를 일은 없어요. 몸을 살리고 마음을 가꾸는 흙짓기로 나아가면 됩니다. 흙을 어떻게 살릴 때에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땅을 어떻게 사랑할 때에 마을이 살아나고 이 나라가 환하게 빛날 수 있는가 하고 살피면 됩니다.


  즐겁게 살아갈 길을 찾아야 즐겁습니다. 사랑스레 살아갈 길을 생각해야 사랑스럽습니다.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걸어가야 아름답습니다. 4346.9.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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