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정호승 시집 창비시선 36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와 이웃
[시를 말하는 시 33] 정호승, 《여행》

 


- 책이름 : 여행
- 글 : 정호승
- 펴낸곳 : 창비 (2013.6.20.)
- 책값 : 8000원

 


  노래 한 가락을 듣고 마음이 따스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말 그 노래가 훌륭하거나 아름답기에 마음이 따스해질 수 있는데, 노래가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하는 대목은 대수롭지 않아요. 노래를 듣는 사람 마음속에 따스한 기운이 있으면, 어느 노래를 듣더라도 이녁 마음속에서 잠자던 따스한 기운이 깨어나면서 둘레를 환하게 보듬습니다.


  글 한 줄을 읽고 눈이 맑아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말 그 글이 훌륭하거나 아름답기에 눈이 맑아질 수 있는데, 글이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하는 대목은 대단하지 않아요. 글을 읽는 사람 마음속에 맑은 기운이 있으면, 어느 글을 읽더라도 이녁 마음속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맑은 기운이 기지개를 켜면서 둘레를 맑게 보듬습니다.


..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  (여행)


  스스로 길어올려 사랑이 됩니다. 스스로 피워서 꽃이 됩니다. 스스로 가꾸며 꿈이 됩니다. 스스로 빚어서 이야기가 됩니다.


  노랫가락 하나는 내 마음을 건드리는 이웃입니다. 글줄 하나는 내 마음을 쓰다듬는 이웃입니다.


  곧, 나는 이웃을 만나고 싶어 노래를 듣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웃을 사귀고 싶어 글을 읽습니다.


  이웃과 마주하면서 내 마음 밑바탕이 어떤 모습인가를 새롭게 읽습니다.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내 마음 언저리가 어떤 무늬인가를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 바다가 되어야 하는 이는 / 당신이다 ..  (무인등대)


  정호승 님 시집 《여행》(창비,2013)을 읽습니다. 정호승 님은 이녁이 시를 쓴 마흔 해를 기리며 이 책 하나 내놓는다고 밝힙니다. 아마, 이녁한테 지난 마흔 해는 ‘여행’ 또는 마실 또는 나들이였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건 마실을 다니건 나들이를 즐기건, 어떤 삶일까요. 바로 이웃을 만나는 삶이겠지요. 여행을 하며 내 이웃을 다시 보고, 마실을 다니며 이웃을 새롭게 만납니다. 나들이를 즐기면서 이웃과 새삼스레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  (지푸라기)


  이웃을 보고 싶기에 여행길에 나섭니다. 가까운 여행이건 먼 여행이건, 며칠짜리 여행이건 몇 달짜리 여행이건, 또는 몇 해에 걸친 여행이건, 나와 이웃이 어떻게 얽히는 삶인가를 느끼려고 차근차근 걸음을 옮깁니다.


  이웃은 바로 나입니다. 나는 바로 이웃입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한테 나는 ‘이웃’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나를 만나는 이웃은 나한테 ‘이웃’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지요.


  그래서, 우리 겨레는 먼먼 옛날부터 짤막한 노래이자 시이자 말마디이자 슬기를 간추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 읊었어요. 내가 너한테 가는 말이란 네가 나한테 오는 말이거든요. 너한테서 나한테 오는 말이란 나한테서 너한테 가는 말이에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면,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 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내가 하는 말은 늘 나한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란 바로 내 마음에 대고 하는 말이에요. 또는, 내 마음이 스스로한테 하는 말이에요. 정호승 님이 쓴 싯말을 담은 《여행》은 정호승 님 스스로 시를 쓰며 살아온 마흔 해에 걸쳐 날마다 꾸준히 스스로한테 들려준 노래입니다.


.. 그동안 내게 돌을 던지던 당신에게 / 내가 빵을 던지지 못해 미안하다 ..  (산책)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집 한켠에 개구리 여러 마리 살아갑니다.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집 텃밭과 풀밭에 풀벌레 수두룩하게 살아갑니다. 매미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집 후박나무와 감나무와 뽕나무와 매화나무와 모과나무 둘레에 매미 여러 마리 살아갑니다. 멧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뒷산과 옆산에서 살아가는 멧새가 우리 집 나무와 마당과 풀밭에 날마다 찾아와서 노래를 베풉니다.


  이 모든 소리는 내가 부르는 소리입니다. 이 모든 노래는 내가 빚는 노래입니다. 나는 내 삶을 일구면서 내 노래와 소리를 누립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꿈과 빛을 흩뿌립니다.


  그러면,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기 앞서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가던 지난날 또한 내가 스스로 지은 삶인 셈일까요? 그렇겠지요. 그때에는 그때대로 내가 지은 삶이요, 오늘은 오늘대로 내가 짓는 삶입니다. 또한, 앞으로 맞이할 내 하루는 앞으로 내가 맞이하고프다고 여겨 짓는 새로운 삶입니다.


.. 서울에서 이미 늙어버린 아들을 용서해주세요 / 이제는 꽃으로 피어나지도 못하고 / 열매 맺지도 못하는 아들을 용서해주세요 / 길 없는 길이 늘 길이었어요 ..  (지하철에서 쓴 편지)


  시인 정호승 님은 이제 이녁 이웃들한테 ‘빵을 던져’ 줄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정호승 님 이웃이 정호승 님한테 ‘돌을 던진다’ 하더라도 빵을 던질 수야 없어요. 빵이든 돈이든 ‘던진다’면 정호승 님 이웃하고 똑같아요. 이웃들이 정호승 님한테 돌이든 빵이든 돈이든 던지면, 정호승 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건네’면 돼요.


  ‘저기요, 이 돌 던지셨지요? 도로 받으셔요. 저는 돌을 쓸 일이 없거들랑요.’ 하고 얘기하면 됩니다. 누군가 정호승 님한테 빵을 던졌으면 ‘저기요, 이 빵 던지셨지요? 얼른 가져가셔요. 저는 혼자서 빵을 구워서 먹을 줄 알아요.’ 하고 얘기하면 돼요.


.. 우산을 버렸더니 비가 온다 / 신발을 벗었더니 길이 보인다 ..  (겨울밤)


  물과 바람과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비와 바람과 해를 먹으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물과 바람과 흙으로 이루어진 풀이며 나무이며 꽃이며 벌레이며 새 또한 비와 바람과 해를 먹으면서 숨결을 이어요.


  지구별에서는 서로서로 이웃입니다. 지구별에서는 서로서로 내 모습이요 내 얼굴이며 내 빛입니다. 내 마음속에 고운 사랑 깃들어 아름다운 하루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이 있으면, 시인 정호승 님 마음속에도 고운 사랑 깃들어 아름다운 하루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을 이야기합니다.


  지구가 그냥 ‘지구’가 아닌 ‘지구별’인 까닭은 우주를 이루는 모든 별과 함께 지구 또한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이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시인 정호승 님한테 손자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시를 노래하며 쉰 해를 걷고 예순 해를 걸을 머잖은 앞날에는 아이들과 활짝 웃는 노랫소리도 들을 수 있으면 반갑겠습니다. 4346.8.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집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