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주는 책 돌려받기

 


  누군가한테 책을 빌려준다면, 이 책을 즐겁게 돌려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돌려받을 생각이 아니라면 빌려주지 않아요. 그냥 선물로 주거나 아예 안 빌려주어요. 누가 나한테 책을 빌려준다면 그이는 책을 즐겁게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그이가 즐겁게 읽은 책을 나도 즐겁게 읽은 다음, 그 책 하나를 놓고 즐거이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우고 싶을 테지요.


  서로 아름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책을 빌려줍니다. 책에 깃든 아름다움을 기쁘게 나누고 싶으니 책을 빌려주고 빌려받습니다. 책 하나를 빌어 마음을 나눕니다. 책 하나를 사이에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빌려준 책을 오래도록 돌려받지 못한다면, 나한테서 책을 빌린 분은 그 책을 잊었을까요. 내가 누군가한테서 빌린 책을 오래도록 돌려주지 않는다면, 나한테 책을 빌려준 그이를 내가 잊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책은 얼마든지 빌려서 읽거나 빌려줄 수 있어요. 책종이는 닳을 테지만 줄거리는 누구한테나 똑같아요. 곰곰이 살피면, 책은 얼마든지 사서 읽을 수 있어요. 굳이 빌려야 하지 않아요. 새책방에 있으면 새책으로 사고, 판이 끊어진 책이라면 도서관을 찾아다닐 수 있으며, 여러 날이나 여러 해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찾아낼 수 있어요.


  돈을 누군가한테 빌려주려 한다면, ‘빌려준다’는 생각 아닌 ‘준다’는 생각을 하라 했어요. 돌려받을 날을 기다리면서 빌려주면, 빌려받는 사람이 힘들어 한다 했어요. 책을 빌려줄 적에도 돌려받을 날을 손꼽으면서 빌려주면, 빌려받는 사람이 힘들어 할 수 있어요. 사람마다 책을 읽는 빠르기가 다르고, 사람마다 꾸리는 삶이 달라, 나는 한두 시간만에 쉬 읽어낸 책이라 하지만, 다른 사람은 여러 해에 걸쳐 미적미적 읽을 수 있어요.


  돈을 빌린 사람이 즐겁게 잘 쓴 뒤 기쁘게 갚을 수 있어요. 돈을 빌리고 나서 오래지 않아 갚을 수 있고, 열 해나 스무 해 지나 갚을 수 있어요. 책을 빌린 사람이 바로 오늘 읽어서 돌려줄 수 있고, 열 해나 스무 해 지난 어느 날 문득 깨달아 뒤늦게 읽고는 뒤늦게 알맹이 알아채어 기쁘게 돌려줄 수 있어요.


  책을 읽는 우리들은 줄거리를 마음에 새겨요. 물건을 손에 쥐지 않아요. 책을 읽는 우리들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요. 두툼한 종이꾸러미를 어깨에 짊어지지 않아요. 마음으로 읽어 마음으로 책을 선물합니다. 가슴으로 담은 책을 내 가슴에 놓은 사랑을 헤아리며 빌려줍니다. 4346.7.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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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7-26 22:14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읽으니 문득 오래 전에 자주 '책을 빌려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책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한달에 얼마씩 내면 '무한정'으로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었는데, 알바생 비슷한 젊은 친구가 '돌려가며 읽는 책'을 책가방에 잔뜩 담고서 여의도의 여러 빌딩 속 '사무실'을 두루 누비며 다녔어요.

'회원' 입장에서는 정말 책값에 대해 아무런 부담없이 책을 실컷 빌려 읽고 돌려줄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그리고 '빌려읽는 책'들이 주로 이름난 문학작품들 중심이어서 금새 다 읽고 다시 빌리기를 반복하고 했던 것 같아요.

그게 아마도 1989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까마득한 옛날이고 또 지금 생각해 보면 아련한 옛날 이야기 같네요.

숲노래 2013-07-26 22:34   좋아요 0 | URL
그런 재미난 '책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네요.
오늘날에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그무렵은 책이 아주 널리 사랑받던 때였구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