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쓰기
― 삶터, 사진터, 사랑터, 이야기터
따로 어느 곳을 콕 집어서 ‘사진마실(출사)’을 다닐 수 있다. 사진마실을 다닌대서 남들 흉내를 내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스스로 아름답거나 즐겁다고 여기는 데를 찾아다니면 저절로 아름답게 찍는 사진이나 즐겁게 찍는 사진을 얻는다. 다만, 사진마실을 다니면서 ‘어떤 사진을 찍으면서 내 삶을 어떻게 누리고 싶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있으면 먼 나라로 사진마실을 다니곤 집 둘레 골목동네를 걷든 사진 한 장 사랑스레 얻는다.
집에서 어린 아이들 돌보는 어버이라면 좀처럼 멀리 다니기 어렵다. 어린 아이가 둘이나 셋이나 넷쯤 된다면 더더욱 바깥마실이 어려울 만하다. 이런 삶에서 사진마실은 꿈과 같다 여길 수 있다. 그런데, 먼 나라로 가야만 사진마실이 되지 않는다. 마을 저잣거리를 걸어도 사진마실이 된다. 아이들과 함께 저잣거리를 걸어 보라. 아이들은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바쁘고, 저잣거리 아지매와 할매는 아이가 귀엽다며 빙그레 웃는다. 이보다 더 훌륭한 ‘사진연출(?)’이 어디 있으랴. 억지로 웃으라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아이들 바라보며 웃으니, 목에 사진기 걸었으면 퍽 손쉽게 사진 한 장 얻는다. 콩나물 한 봉지 사면서 놀라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다.
집에서도 부엌과 마루와 방 사이를 오가는 아이들 바라보며 사진마실 새롭게 누린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다니더라도 사진마실이 된다. 아이 키높이로 엎드리거나 쪼그려앉으면서 걸어 본다. 이렇게 하면서 아이들 사진을 찍으면 이제껏 느끼지 못한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으니, ‘집안 사진마실’이 된다.
나는 아이들과 살아가는 시골마을에서 대문 밖으로 나갈 적에도 사진마실을 한다고 느낀다. 마당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도 사진마실을 한다고 느낀다. 참말 내 삶터는 어디나 사진터이다. 삶터이기에 사랑을 나누는 곳, 사랑터가 되고, 사랑터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으니 이야기터가 되기도 한다.
한여름에 벼포기 무럭무럭 자라는 곁에 선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사진 한 장 찍으며 스스로 즐겁다. 이 푸른 빛깔이 물결치면서 아이들 가슴속에 어떻게 스며들까. 내가 아이들 뒤에서 따라가며 담은 사진 한 장은 이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어떻게 맞아들일까. 마실을 가면 언제나 아이들이 앞장서서 달린다. 나는 짐과 가방을 들고 뒤에서 어기적어기적 따라가느라 바쁘다. 그런데 이렇게 마실을 다니며 아이들이 무엇을 들여다보고 어디에서 걸음을 멈추어 물끄러미 살펴보는가 지켜보면, 이 모습도 그림이 되고 저 모습도 사진이 된다.
하루하루가 모여 삶이 되듯, 한 장 두 장 찬찬히 찍어 사진이야기 태어난다. 4346.7.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