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빨래터에서 읽는 《원주통신》
박경리 님이 원주에서 흙 만지며 산 지 다섯 해 즈음 될 무렵 내놓았다고 하는 《원주통신》(지식산업사,1985)을 새롭게 읽는다. 곰곰이 돌아보니, 나는 이 책을 아직 도시에서 지낼 적에만 읽었고,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들여다본 적 없구나 싶다.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숨어있는 책〉을 나들이하다가 《원주통신》을 다시 만나면서 생각한다. 2010년 여름부터 식구들과 함께 시골에서 살아가는데, 이제 이 책을 다시 읽으면 느낌이 남다르지 않을까 하고.
‘씨앗을 닮으려는 흙일은 즐겁다’라 이름을 붙인 글부터 읽는다. 박경리 님이 후줄그레한 차림새로 흙을 만지며 일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단다.
.. 언제였는지 내가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서 흙일에 열중해 있을 때 찾아온 사람은 적잖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선생님 오래 사시려고 일을 합니까 하고 말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던 나는 곧 분개를 했다. 상대가 관리였기에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요즘 유행인 핼드클럽에서 하는 운동으로 착각한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어디 그 사람뿐이랴. 대개 모든 사람들은 일하는 내 꼴을 보면 의외라는 표정이었고 이곳의 어느 소녀는 소위 여류작가인 나를 보고 실망했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목걸이하고 귀걸이하고 매끄러운 손에 매니큐어나 하고 있어야만 여류작가냐? … 모리악은 소설가란 하나님을 닮으려는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씨앗을 닮으려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 (63∼64쪽)
박경리 님이 아이들 낳아 돌보는 삶을 도시에서 그대로 이었다면, 아마 박경리 님 마음에도 “소설가는 하느님을 닮으려는 사람”이라는 생각만 있었으리라 느낀다. 이녁 스스로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가다 보니 “소설가는 씨앗을 닮으려는 사람”이라고 깨달았으리라 느낀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풀을 닮고 나무를 닮다가, 스스로 풀이 되고 나무가 되려는 사람’일 때에 아름다운 빛이 환하게 드리운다고 생각한다. 곧, 처음에는 씨앗을 닮으려 할 테지만, 어느새 스스로 씨앗이 된다고 본다. 마음속에 하느님을 품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닮으려고 애쓴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이 된다는 뜻이다.
닮으려고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닮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되면’ 넉넉하다. 스스로 사랑이 되면 즐겁고, 스스로 꿈이 되면 기쁘다. 스스로 빛이 될 때에 밝고, 스스로 하늘이 되고 흙이 될 때에 포근하다.
마을빨래터 청소를 모두 마친다. 나도 큰아이와 함께 빨래터 바닥에 철푸덕 앉는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아이들 몸에 끼얹고 내 몸에도 끼얹는다. 시원하구나. 햇볕 고스란히 받지만, 졸졸 흐르는 골짝물 이어지는 빨래터에 온몸 맡기며 앉으니 더없이 시원하구나.
아이들은 더 놀라 하고, 나는 《원주통신》을 조금 더 읽는다. ‘생명은 시행 아닌 진실 자체’라 이름 붙인 글을 읽는다.
.. 씨를 말려서는 아니 된다. 어떠한 것이든 생명인 씨를 말려서는 아니 된다 … 살구가, 자두가 여물 무렵이면 우리 뜰에는 어디서 오는지 꾀꼬리들, 까치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든다. 그러면 나는 인심 후하게 멀리서 새들을 숨어 본다. 먹고 살아라 새야 … 오늘의 문명은 날이면 날마다 세계 도처에서 도전과 승부욕에 불타게끔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모두 서로가 적인가. 모든 생명은 모두 서로가 적인가. 자연도 인간의 적인가. 적이라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무서운 보복은 불가피한 것이 아닐까 .. (23∼25쪽)
박경리 님이 1985년에 내놓은 《원주통신》은 책이름처럼, 시골마을에서 살아갔기에 쓸 수 있는 글을 모았다. 시골마을에서 햇살과 바람과 비와 흙과 풀과 나무와 새와 벌레와 짐승하고 얼크러지면서 시나브로 태어난 이야기를 차곡차곡 모았다. 모처럼 눈을 트는 글 몇 줄 읽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빛 되는 이야기를 쓰는 한국 작가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오늘날, 맑은 삶 한 자락 고맙게 살펴 읽는다. 자, 아이들아 이제 집에 가서 더 놀자. 4346.7.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