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23] 고향읽기
― 살아가는 곳과 태어난 곳

 


  나는 ‘고향’이라는 낱말을 그닥 즐겨쓰지 않습니다. 나는 두 가지 말을 씁니다. 하나는 ‘태어난 곳’, 또 하나는 ‘살아가는 곳’, 이렇게 두 가지 말을 으레 씁니다.


  고향이라는 곳을 헤아려 보면, 고향이 이곳이라 하더라도 이곳에서 내처 살아가는 사람 매우 적은 오늘날입니다.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릴 적에 어버이와 함께 옮긴 뒤 내처 살아가는 사람 많고, 고등학교 마치고 스무 살부터 새롭게 살아가며 새로운 고향 되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 많습니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기에 굳이 어느 곳을 고향으로 삼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난 곳’과 ‘살아가는 곳’에 한 가지를 더해서, ‘사랑하는 곳’을 생각합니다. 아마, 누군가는 태어난 곳이 살아가는 곳이면서 사랑하는 곳일 수 있어요. 아마, 누군가는 태어난 곳도 사랑하는 곳도 아닌 데에서 살아갈 수 있어요. 아마, 누군가는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겠지요.


  엊저녁, 어느 분이 저를 다른 어느 분한테 소개하면서 “이곳(전남 고흥) 분은 아니신데, 이곳으로 와서 살아가는 분이에요.” 하고 말합니다. 다른 어느 분은 “귀촌하신 분인가 보네.” 하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가만히 듣다가 생각합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스무 살에 인천을 떠났다가 서른세 살에 인천으로 돌아갔고, 이제 인천을 다시 떠나 시골마을에서 살아갑니다. 인천으로 돌아가 살던 때 일을 곰곰이 떠올립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열세 해 동안 인천을 떠나서 지냈어요.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인천 토박이네’ 하고 말하더군요. 나는 ‘글쎄요’ 하고 말했고, 다른 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인천으로 온 분이 있을 때에 나는 그저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면 인천사람이지요. 다른 말은 다 쓸데없어요.’ 하고 말했어요. 둘레 다른 분들이 인천 아닌 데에서 살다가 인천에 온 분을 보며 ‘당신은 아직 인천사람 아니에요.’ 하고 말하기에, 그런 말은 말이 안 된다고, 그러면 이분을 가리켜 ‘이농인’이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며 이곳을 좋아하면 ‘이곳 사람’일 뿐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나는 오늘 두 아이와 옆지기하고 전남 고흥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전라도사람’이면서 ‘고흥사람’입니다. 나한테는 다른 이름을 붙일 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텃세를 부릴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손님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살아가는 사람은 그저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저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듯, 일하는 사람은 그저 일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루 먼저 어느 회사에 들어갔대서 ‘고참’이나 ‘선배’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하루 먼저 태어났대서 ‘형’이나 ‘선배’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나이가 조금 더 많을 뿐입니다.


  돈이 조금 더 많대서 돈이 조금 더 적은 사람보다 웃사람 되지 않습니다. 이름값이 조금 높대서 이름값 없는 사람 앞에서 우쭐거릴 까닭 없습니다. 어느 마을 토박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에 새로 옮겨서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이든,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한국으로 와서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이든, 모두 똑같은 노동자요, 똑같은 숨결이며, 똑같은 사랑입니다.


  이주 노동자, 이른바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를 똑같이 아끼는 눈길로 바라볼 수 있자면, 토박이와 ‘외지인(손님)’ 나누기부터 없어져야 합니다. 나이에 따라 계급이나 신분을 쌓는 울타리를 없애야 합니다. 선배나 고참이라는 울타리를 허물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길을 걸어야지요. 서로 아끼는 삶을 가꾸어야지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꿈꾸는 마을 살찌워야지요. 4346.5.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당신은 어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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