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장과 작가와 편집자
고등학교만 마친 학력으로 출판사 편집자나 기획자나 영업자로 일한 사람이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궁금하다. 아니, 한국에 있는 출판사 가운데 고등학교만 마쳤거나 중학교만 마친 사람을 아무 거리낌없이 입사시험 치르도록 문을 연 곳이 몇 군데 있을까 궁금하다.
나는 고등학교만 마친 학력으로 보리출판사에 영업자로 뽑혀서 일했다. 그 뒤, 토박이출판사에 국어사전 기획·편집자로 뽑혀서 일했다. 토박이출판사는 보리출판사 계열사로, 내가 한 일은 《보리 국어사전》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출판사에서 일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보리출판사 빼고 ‘학력 제한 없이 입사원서 받은 출판사’는 없었다고 느낀다. 요즈음에는 있을까. 보리출판사는 요즈음도 졸업장(학력)을 안 따지면서 일꾼을 받을까.
출판사 일을 모두 접은 뒤 작가라는 이름을 얻어 2004년부터 책을 썼다. 내 이름으로 나온 책에 내 졸업장(학력)은 한 줄도 안 적힌다. 나한테 졸업장(학력) 묻는 편집자는 아직 없다. 작가로 일하고부터는 참말 나한테 졸업장 따지는 이가 없는데, 기관이나 학교로 강의를 갈 적에 가끔 나한테 ‘최종학교 졸업 증명서류’를 바라기도 한다. 다들 ‘형식’이라고 말하면서 졸업장(학력)을 바라는데, 형식, 곧 겉치레뿐이라면 아예 없어도 되리라 느낀다. 초등학교만 마쳤건 초등학교도 안 다녔건, 사람으로 태어나 일하고 놀며 사랑하는 데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 시인이 되려면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오면서 어떤 ‘어른 시인’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하지 않다. 사진가로 일하자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오면서 어떤 ‘어른 사진가’한테서 추천을 받아야 하지 않으며, 어떤 공모전에서 상을 받아야 하지 않다.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영글어 시를 쓰고 사진을 쓸 때에 비로소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다. 졸업장으로 작가 이름을 얻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들 글과 그림과 사진을 그러모아 책으로 엮는 출판사에서는 졸업장(학력)을 아주 꼼꼼히 따진다. ㅁ이라는 출판사 대표는 ㅅ대학교 졸업장(학력) 없으면 아예 안 뽑는다는 말을 대놓고 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ㅁ출판사뿐 아니라 다른 출판사에서도 졸업장(학력)을 더 눈여겨보리라 느낀다. 사람보다는 졸업장(학력)이요, 솜씨나 마음이나 사랑보다도 졸업장(학력)이라고 할까.
더 생각해 본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졸업장(학력)이 있을까. 졸업장(학력) 없는 사람은 책을 읽으면 안 될까. 아니, ‘졸업장(학력) 없는 사람도 즐겁고 쉬우며 아름답게 읽을 책’을 ‘졸업장(학력) 있는 사람’이 즐거우며 아름답게 엮어서 이 땅에 내놓을까. 어쩌면, 이 나라 편집자는 모두 ‘졸업장(학력) 있는 사람’인 터라 ‘졸업장(학력) 없는 사람이 읽을 인문책’을 쉽고 예쁘게 엮을 만한 눈썰미나 눈높이나 눈길이 없다 할 만하지는 않을까.
고졸 편집자와 중졸 기획자와 초졸 영업자가 씩씩하게 일할 수 있는 이 나라 책마을 되기를 빈다. 학교를 다닌 적 없는 작가가 즐겁게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이 나라 삶터 되기를 빈다. 4346.5.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