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13. 꽃말과 사랑말
― 삶과 마음을 가꾸는 말

 


  제비꽃 모습을 잘 보여주는 책 《특징으로 보는 한반도 제비꽃》(지성사,2013) 을 읽다가 33쪽에서 “운동회 날에는 달리기, 오자미 놀이, 기마전 같은 단체 경기에서” 같은 대목을 봅니다. 책을 가만히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책을 쓴 분은 ‘오자미’라고 적는데, 나는 어릴 적에 ‘오재미’라고 말했어요. 1982∼1987년에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 쓰던 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사와 둘레 어른은 으레 ‘오재미’라 했어요. 그무렵에는 ‘오재미·오제미·오자미’ 같은 낱말이 사투리처럼 조금씩 달리 쓰는 말인 듯 잘못 듣고 잘못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오재미’를 마련해서 하나씩 가져오라 할 때마다 ‘천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속에 콩이나 쌀을 넣으라’ 했어요. 천주머니에 콩을 넣으면 ‘콩주머니’인 셈입니다. 모래를 넣으면 ‘모래주머니’ 되고, 쌀을 넣으면 ‘쌀주머니’ 돼요. 지난날에는 먹고살기 어렵던 가난한 집들 많아, 천주머니에 콩이나 쌀을 못 넣기 일쑤였어요. 동무들은 학교 운동장 한쪽을 파서 모래를 담고는 교실에서 바느질을 해서 모래주머니를 내놓곤 했어요.


  콩이나 쌀 아닌 모래 넣은 주머니를 내면, 교사들은 아주 싫어했어요. 모래 담은 천주머니는 몇 번 던지면 가는 모래가 술술 빠져나오며 못 쓰게 되었거든요.


  그나저나, ‘오재미’이든 ‘오제미’이든 ‘오자미’이든 모두 일본말이에요. 일본에서는 콩을 넣은 주머니를 던지며 노는 ‘お手玉(오테다마)’가 있다고 해요. 이 ‘오테다마’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말꼴이 살짝 바뀌었어요. 국어사전을 살피면 ‘오자미’라 쓰지 말고 ‘놀이주머니’로 고쳐쓰라 나와요. 그런데, 정작 국어사전 올림말로 ‘놀이주머니’도 없고 ‘콩주머니’도 없어요. 올바로 고쳐쓸 한국말을 외려 안 싣고, 일본말만 실은 국어사전이에요.


  사람들 말씀씀이를 살펴봅니다. 아직도 ‘리어카’나 ‘바께쓰’나 ‘오라이’ 같은 일본말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 퍽 많아요. ‘손수레’나 ‘양동이’나 ‘좋아’ 같은 한국말을 써야 알맞고 바르며 고운 줄 못 깨닫는 분 꽤 많아요. 때로는 한국말이 맛이 안 난다 여기며 일본말을 쓰기도 해요. 한국말 ‘병따개’로는 병을 따는 맛이 안 나고, ‘오프너’ 같은 영어를 써야 비로소 병을 따는 맛이 난다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공사장에서 일할 적에는 ‘막일’ 아닌 ‘노가다’라는 일본말을 써야 제대로 일하는 줄 여기곤 해요.


  《특징으로 보는 한반도 제비꽃》을 더 읽습니다. 115쪽에 “제비꽃 종류도 대부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이른바 조춘早春 식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른 봄에 꽃이 피는”이라 말하다가 “조춘早春 식물”이라 말합니다. 쉽고 알맞게 “이른 봄에 꽃이 피는”이라 적었으면 이대로 글을 마무리지어 “이른 봄에 꽃이 핀다”라든지 “이른 봄에 꽃이 피는 특징이 있다”처럼 하면 되지요. 애써 ‘조춘’이라는 어려운 한자말 끌어들이고서, 다시 한자로 ‘早春’처럼 붙여야 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렇게 붙이니 말이 어렵고, 뜻이 뒤죽박죽 섞여요.


  학문을 하며 쓰는 낱말로 ‘조춘 식물’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글월을 헤아리면, 학문을 할 적에도 ‘이른봄 식물’이나 ‘이른봄꽃’처럼 쉽게 새 낱말 빚을 만해요. 더 생각해 보면, 한자말로만 ‘조춘’이라 한 낱말 쓸 노릇 아니라, 한국말로도 ‘이른봄·이른여름·이른가을·이른겨울’처럼 쓸 수 있어요. 국어사전에는 ‘첫봄·첫여름·첫가을·첫겨울’ 같은 낱말 실려요. ‘조춘·조하·조추·조동’처럼 알쏭달쏭한 한자말은 안 써도 즐겁습니다. 아니, ‘조하’나 ‘조동’이라는 낱말이 무엇인지 알 사람은 아주 적어요.


  제비꽃은 이른 봄에 핍니다. 곧, ‘이른봄꽃’입니다. 찔레꽃은 늦은 봄에 핍니다. 곧, ‘늦봄꽃’입니다. 모과꽃이나 탱자꽃이나 붓꽃은 한창 무르익은 봄에 핍니다. 곧, ‘한봄꽃’이에요. 감꽃은 봄이 저물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에 피니, ‘이른여름꽃’ 또는 ‘첫여름꽃’이 됩니다. 바야흐로 가을이나 겨울 다가올 적에 피는 꽃은 ‘가을꽃’과 ‘겨울꽃’ 될 텐데, 철을 더 헤아려 ‘늦가을꽃’이나 ‘첫겨울꽃’ 같은 낱말 새삼스레 빚을 수 있습니다.


  눈은 겨울에 내려 ‘겨울눈’인데 봄까지 내리면 ‘봄눈’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가르면 ‘일월눈’이나 ‘이월눈’, 그리고 ‘삼월눈’과 ‘사월눈’처럼 쓸 수 있습니다. 바람을 두고 ‘오월바람’과 ‘유월바람’이라 쓸 수 있어요. 하늘을 놓고 ‘칠월하늘’과 ‘팔월하늘’이라 쓸 수 있고, 비를 가리켜 ‘구월비’와 ‘시월비’라 쓸 수 있어요.


  하루하루 흐르는 삶을 바라보며 말 한 마디 짓습니다. 삶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말을 즐겁게 짓습니다. 즐거운 삶에서 즐거운 말 샘솟는 동안, 내 마음에도 즐거움 샘솟고, 즐거움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이웃과 동무를 사귀면서, 시나브로 사랑씨앗 한 톨 맺습니다. 내 마음에도 사랑씨앗을 한 톨 심고, 이웃 마음에도 사랑씨앗을 한 톨 심습니다. 알맞고 바르며 아름다운 말로 생각을 가다듬고 삶을 빛내는 사이, 어느덧 내 꿈과 사랑도 알맞고 바를 뿐 아니라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꽃을 생각하니 꽃다운 말이 됩니다. 사랑을 생각하니 사랑스러운 말이 됩니다. 웃음을 생각하니 웃음 넘치는 말이 됩니다. 기쁨을 생각하니 기쁨 가득한 말이 됩니다. 삶을 가꾸듯 말을 가꿉니다. 삶을 가꾸듯 말을 가꾸면서 마음을 나란히 가꿉니다. 말을 가꾸면서 삶을 가꿉니다. 말을 가꾸는 몸가짐으로 마음을 함께 가꿉니다. 말과 마음을 가꾸면서 저절로 삶을 가꾸고 사랑을 가꿉니다.


  꽃내음 나누려는 마음일 때에는, 내 마음 담아서 나타내는 말마디에 꽃내음 찬찬히 묻어납니다. 사랑빛 함께하려는 생각일 때에는, 내 사랑 드러내려는 말마디에 사랑스러운 빛줄기 곱다시 드리웁니다. 전문가나 학자가 ‘오자미’라는 낱말 파헤쳐 고쳐쓰라 일컫기 앞서, 아이들과 살아가는 여느 어버이와 교사 스스로 고운 넋 담는 고운 말 쓰면서 고운 삶 되기를 빕니다. 학문하는 사람이 전문으로 쓰는 낱말에도 따사롭고 살가우며 넉넉한 숨결 북돋우는 마음 깃들 수 있기를 빕니다. 4346.5.2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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